남근선망의 다른 이름은 [ ]이다
‘하버드 사랑학 수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의 저자
마리 루티의 신랄하고 유쾌한 젠더 정신분석
‘명색이 페미니스트’ 마리 루티의
남근선망 다시 읽기
<하버드 사랑학 수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를 통해 우리 시대 연애의 본질과 진화심리학의 허구적 이분법을 날카롭게 비판한 토론토대학의 비판이론 및 젠더&섹슈얼리티학 석좌교수 마리 루티의 최신작이다. 이 책에서 루티가 주목한 것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만연한 나쁜 감정들이다. ‘남근선망...’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지만, 남근선망을 포함한 나쁜 감정들이 이 책의 주제이다. 이를 위해 루티가 소환하여 ‘씹고 뜯고 맛보는’ 소재는 진지한 이론적 성찰부터 은밀한 개인적 경험까지 하나같이 흥미롭다. 프로이트의 남근선망 개념을 장난스럽게 유희하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가난한 국경 마을 얘기에서 신자유주의적 실용주의 고찰로 넘어가는 식이다. 루티는 말한다. 남근선망으로부터 고통받는 건 남자도 마찬가지라고. 페니스가 진짜 사회적으로 가치화된 남근 및 이성애가부장제적 권위의 상징 역할을 한다면, 이 신체기관을 소유한 이들도 그렇게 느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페니스를 소유했는데 이 기관이 지녔다는 권위를 누리지 못한다는 느낌, 아이콘의 상징과 현실 간의 괴리. 문화적으로 형성된 페니스 신화는 여성들은 부족한 존재처럼 느끼게 하고, 남성들은 사기꾼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한다.
왜 이렇게 불안하고 짜증이 날까?
이성애가부장제하 여성의 우울
“여성들이 불평등하게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나쁜 감정들과 남근선망 사이의 연관성을 바로 알아챈 여성 또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웃었을 것이다.”
루티는 남근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이 특권을 열망하도록 우리를 길들이는 이성애가부장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미 성평등이 이루어진 사회로 추정되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이성애가부장제가 지속되는 현실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책 제목을 ‘남근선망…’이라고 붙인 것도, 아직까지 지속되는 여러 나쁜 감정들 가운데 특히 남근선망을 부지시키는 이성애가부장제적 사회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통렬히 비판하기 위함이다. 때론 프로이트와 엮이기 싫어 ‘남근선망’이라 하지 않고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의 격분이나 짜증, 분노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안다. 진심으로 격분하게 되는 여자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수사적으로는 거세의 비유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잘라 버리고 싶다!
대체 좋은 삶이 뭔데?
신자유주의가 묻어 버린 나쁜 감정들
루티는 특히 좋은 성과/높은 생산성/꾸준한 자기계발/끊임없는 쾌활함으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특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가 노래 부르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노력이 보상받는 삶이 좋은 삶인가? 경제적으로 잘살게 되면 그걸로 끝인가? 루티는 참을 수 없는 현재를 견디게 하는 그릇된 희망의 실체를 날카롭게, 그러나 유머러스하게 분석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성과와 생산성, 자기계발, 억지 쾌활함으로 가부장제가 생산하는 여러 나쁜 감정들을 억압한다. 신자유주의는 자기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묻어 버리는’ 데 매우 유능하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를 질문할 시간은 없고, 그저 현실의 목표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심지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부정적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이 시대의 공리적 실용주의는 불면증조차 시간 낭비로 보고, 이런 나쁜 감정 자체를 수치스럽게 그리고 부정적으로 느끼게끔 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나쁜 감정이 싹트려고 하면 우리는 잽싸게 이런 감정의 목을 졸라 버린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젠더강박장애
동성애 혐오는 가부장제의 필수품
요즘 영화건 현실에서건 성별 불쾌감gender dysphoria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즉,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이들이다. 이에 대해 루티는 이런 사람들이 병적으로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다. 완전히 이분법적인 젠더 구조에 따르지 않는/못하는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 구조가 흐트러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젠더 분열/성차에 대해 광적인 근본주의적 태도,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누구나 즉시 알아볼 수 있게 “남성적이고” “여성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병적이지 않은가. 이른바 “젠더 강박관념”이다. 엄격한 젠더 구별이 전통적인 이성애의 토대였던 점을 고려할 때, 이 광적인 열정 뒤에는 분명 동성애 혐오homophobia가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남성은 “가진 자”, 여성은 “못 가진 자”라고 규정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현재의 이성애가부장제적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유리한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의 공모
여성에게만 인간 존재의 결핍을 강요하는 젠더 고정관념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남성들은 페미니즘 투쟁의 동지다.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 젠더 관념을 초월해야만 이성애 여성과 이성애 남성은 물론이고,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등등도 모두 같이 살 수 있을 것 아닌가.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을 어떤 분야에서건 압도하거나 앞지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페미니스트들이 해체하려고 하는 바로 그 분열적인 젠더 차이를 오히려 강화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여성에게 유리하다고? 그런 주장은 여성과 남성 그 어느 쪽에도 득이 되지 않는다. 압도니 승리니 하는 말들 자체가 남성과 여성을 기존의 대결 국면에 더 단단히 가두기 때문이다. 최근 높아진 대중의 관심으로 페미니즘은 더 큰 곤경에 처했다. 모든 가치를 상품과 화폐로 연결시키는 신자유주의가 페미니즘이라고 그냥 둘 리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문화로 포장되는 소비문화는 만족감을 약속하는 다수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곤경을 기회로 삼는다. 여성 ‘우대’가 광고 트렌드가 되면서, 페미니즘 같은 사회운동조차 우아한 도나 카렌 정장이나 구찌 브리프 케이스 같은 상업적 코드로 변신한다.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든 사회운동의 신조들마저도 자본 시스템에 도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루티는 상업적인 페미니즘에 일정한 의구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프로이트에서 푸코, 다시 라캉으로
삶을 망치는 나쁜 감정과 감정소모
이론적으로 철저하되 알기 쉽게 쓴 루티의 이 책은 오늘날 젠더 문제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현안, 성소수자와 비혼자들의 권리, 남녀가 아닌 젠더 관계가 봉착한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라캉 이론에 기대어 해설한다. 루티는 남근선망 개념도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의식의 선도적 개념으로 이해한다. 라캉 역시 페미니스트와는 거리가 멀지만, 남성 역시 여성과 똑같이 ‘거세된’ 존재라고 단언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에 중요하게 기여했다는 분석이다. 오늘날 우리가 젠더 불평등을 초월한 포스트페미니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주장에는, 신자유주의적 이성애가부장제가 미묘하지만 지속적인 개조에 재개조 과정을 거쳐 사회 전반에 더 은밀히 암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셸 푸코의 생명관리정치 이론과 자크 라캉의 욕망, 로렌 벌랜트의 ‘잔혹한 낙관주의’ 개념을 동원하여, 루티는 (우리의 결혼과 연애를 지배하는) 친밀성의 합리화, 젠더 고정관념의 영속, 이성애 문화의 포르노화 등을 분석 한다. 특히 사회가 권장하는 번지르르한 자아실현과 낭만적인 연애, 직업적 성취라는 신화 밑에 자리한 우울과 불안, 좌절과 욕구불만이 어떻게 우리 삶을 망치는지를 분석하는 대목은 정곡을 찌른다. 모든 구성원에게 끝없는 자기계발과 쾌활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