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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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와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독일에서 출생한 철학자다. 유대인 박해와 정치적 억압이 점차 심해지던 시기, 미국으로 망명하여 국적 없이 생활했던 그는 나치에 탄압받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등 20세기의 폭력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정치사상서를 거듭 완성했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렌트는 『뉴요커』지의 특파원 자격을 얻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참관한다. 이로써 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탄생했다. 평범한 인간인가, 극악무도한 악마인가?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SS)에서 유대인 학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2년 나치 독일의 ‘최종 해결책’(대량학살) 계획과 병참을 책임지며, 유대인 600여만 명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절멸수용소로 몰아넣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아이히만을 유대인 문제 전문가, 극악무도한 살인자, 유대인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흔든 악마로 바라본다. 그러나 아이히만을 진찰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는 그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 친척 덕분에 일자리를 얻은 적이 있었고, 유대인 지도자인 테오도어 헤르츨을 존경해 그의 35주기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시온주의(유대인 국가 건설 운동) 지지자를 자칭했으며, “유대인의 발밑에 단단한 지반을” 놓아주기 위해 애썼다. 그는 자기 손으로 사람 한 명 죽여본 적 없지만, 대량학살을 위한 행정적 역할을 능숙하게 해냈다. 개인의 증오나 잔혹함의 결과가 아니라, 체제와 명령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한 결과였다. 생각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판단하기의 무능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이데올로기의 광신자나 정신병자로 바라보지 않으며, 그의 얄팍함과 무감각함을 지적한다. 아이히만의 기억은 관심 밖의 일에 대해서라면 모두 부정확했고, 말은 의기양양한 기분을 느끼기 위한 상투적 단어로 가득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놀라울 정도로 무감각했다. 그는 독일 제3제국, 즉 히틀러의 명령과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그가 행한 유대인 학살은 ‘국가적 공식 행위’였고, 재판관과 기자들을 지긋지긋하게 만든 이런 도덕적 판단 능력의 부재는 그가 “필요하다면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낼 수 있게 했다.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복종하는 것이 … 의무였고, …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들을 했을 뿐…” (74쪽) 이 재판을 본 한나 아렌트는 “사유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판단하기의 무능을 가진 사람들이 비판적 사고 없이 주어진 상황에 따른다면 결과는 끔찍한 재앙일 수 있다”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렌트는 평범한 그 누구도 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쟁이 끝난 후 아이히만은 한때 자기가 의무로 여겼던 것이 이제 범죄로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판단 규칙을 그저 새로운 언어 규칙에 불과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사례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악의 형태라고 경고한다. 무비판적 복종, 평범한 당신도 악이 될 수 있다 스스로를 책임 없는 행정가로 여긴 아이히만의 모습은 2024년 겨울 비상계엄 상황에서 지시를 비판 없이 따른 관료와 군 관계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히만이 단지 명령에 따라 대량학살을 수행했듯이, 명령을 실행하는 이들이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을 포기하고 “작은 톱니바퀴”로 전락할 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은 흔들린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위험성뿐 아니라 비판적 사고의 상실이 가져올 사회의 실패를 경고한다. 아렌트의 말처럼, 거대한 악은 무자각한 순응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