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일기 쓰기, 하루 종일 거울 들여다보기,
수업 땡땡이치기, 한밤에 라디오 듣기, 첫사랑과 댄스파티 가기,
그리고…… 자살하기?
영화 「처녀 자살 소동」의 원작 소설
화이팅 작가상(1993), 해럴드 D. 버셀 기념상(1995)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데뷔작
미국의 이른바 ‘잘나가는’ 젊은 소설가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가 민음사모던 클래식으로 재출간되었다. 단 두 편의 장편소설로 “오늘날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뉴요커》)라는 평가를 받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이다. 리즈번가의 10대 소녀들이 한창 아름다울 나이에, 그것도 다섯 명 모두 자살해 버리고 마는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의 소설을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사건 당시인 20여 년 전과 현재 사이를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며 능수능란한 솜씨로 펼쳐 나간다. 그는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1970년대의 문화, 즉 ‘베이비 붐 세대’의 문화를 작품에 생생하게 되살렸을 뿐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던 기성세대와의 갈등을 조용히 지적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 『데미안』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문제적인 성장소설을 탄생시켰다. 『처녀들, 자살하다』는 출간되자마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에게 아가 칸 상, 화이팅 작가 상, 해럴드 D. 버셀 기념상 등 문학계의 여러 상들을 거머쥐게 해 주었고 소피아 코폴라 감독, 커스틴 던스틴 주연인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 20여 년 전, 평범한 마을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
리즈번가의 막내딸 서실리아가 자살을 기도했다. 목욕을 하다가 손목을 그었다. 리즈번 자매들이 목욕하는 광경을 훔쳐보러 몰래 집에 들어왔던 소년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자기 방 창문에서 몸을 던져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다 할 이유도 유서도 없었던 그녀의 자살 이후, 동네 사람들은 서실리아의 언니들 넷도 분명 죽은 동생처럼 이상한 애들일 거라고 수군대며 리즈번 가족을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슬픔에 젖어 모든 일상생활에서 손을 놓아 버리고 집에 있는 문이란 문은 꼭꼭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고 만다. 리즈번 자매들은 사람들에 의해, 어머니에 의해 점차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간다.
어느 날, 리즈번가의 넷째 딸 럭스와 비밀 연애를 하고 있던 트립이 친구들을 동원해 리즈번 자매 모두를 댄스파티에 데려가고, 럭스와 트립은 밤늦도록 둘만의 시간을 즐긴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트립은 잠든 럭스를 운동장에 버려 둔 채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후 리즈번 자매들은 통금 시간을 어기고 밖에서 밤을 보낸 럭스 때문에 등교는커녕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집 안에 갇히고 난 얼마 뒤부터, 방에만 늘어져 있는 게 지루해진 럭스는 밤마다 부모의 눈을 피해 지붕 위에서 동네 남자들과 정사를 벌이기 시작하고 고등학교 교사였던 리즈번 씨는 “자기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학부모들에 의해 해고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리즈번 가족이 사람들에게 점차 외면당하던 무렵, 리즈번 자매들은 한밤중에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동네 소년들에게 일종의 구조 요청과도 같은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느 날, 그녀들로부터 자정에 자신들을 데리러 와 달라는 쪽지를 받은 소년들은 리즈번 자매들을 데리고 멀리 도망칠 꿈에 부푼 채 약속한 시간에 리즈번가의 지하실에 내려간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천장에 목을 매고 죽어 있는 소녀의 시체였고 그들은 깜짝 놀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도망쳐 나온다. 리즈번 자매들은 그날 밤 집 안 곳곳에서 모두 자살한 것이었다. 수면제를 잔뜩 삼킨 채, 오븐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 자동차 안에서 질식한 채 말이다. 둘째 메리가 금방 발견된 덕에 유일하게 살아나지만 그녀 역시 막내 서실리아처럼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면제를 삼키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메리의 장례를 치른 날 밤, 리즈번 부부는 어둠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동네를 떠나 버린다.
■ 능수능란한 이야기꾼 제프리 유제니디스
『처녀들, 자살하다』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첫 장편소설로, 1993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도서관 협회(ALA)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 2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1999년 소피아 코폴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까지 했다. 한 가정에서 일어난 자살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이 이렇게 화제가 된 이유는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바꾸는 타고난 재능”(《뉴욕 타임스 북 리뷰》)이라고 평가 받는 유제니디스만의 독특한 이야기 솜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제니디스는 이 작품에서 사건 당시인 20여 년 전과 현재 사이를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야기를 할 때 화자의 어조는 마치 사건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10대 청소년의 미성숙함과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낸다. 화자로 기용한 10대 소년들은 관찰자이기 때문에 제한적인 정보만을 습득할 수밖에 없고, 또 어린 나이와 리즈번 자매들에 대한 감정으로 인한 객관성 결여 때문에 관찰자로서의 신뢰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미숙함은 리즈번 자매들에 대해 이런저런 속단을 내려 버리는 ‘어른들’과 대조되면서, 오히려 반대로 진정성을 획득하고 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동네 어른들의 증언을 인용할 때에도, 작가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기성세대의 어조를 소년들의 어조와 똑같은 설득력을 가지도록 생생하게 표현해 낸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작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는 얻을 수 없는 효과를 성취해 내고 있다.
■ 그녀들은 왜 자살한 것일까?
-‘소년들’의 눈을 통해 하나하나 모이는 소문들
이 작품의 화자는 단순히 “우리”라고만 지칭되는 불특정 다수의 동네 소년들이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성적 호기심이 풍부한 이 소년들은 저마다 리즈번 자매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다. 어른이 된 이들이 리즈번 자매들의 자살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조사에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어느 한 사람도 정확한 사실이라 할 수 없는, 각자가 생각하는 진실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찾아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유제니디스는 ‘이렇다’ 할 원인은 알려 주지 않은 채 ‘부모님’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와 대중매체, 그리고 소년들의 관점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 주면서 독자가 나름대로 이유를 밝혀 내도록 이끌고 있다.
기성세대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듣는 음악이나 무신론 아니면 우리가 아직 해 보지도 못한 섹스와 관련된 도덕적 해이를 그 원인으로 생각했다.”
리즈번 가족을 비롯한 이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가톨릭교도다. 그런데 유독 리즈번 부인만은 거의 모르몬교에 가까울 정도로 청교도적인 생활 방식을 딸들에게 강요한다. 리즈번 자매들은 어머니가 《TV 가이드》에서 미리 내용을 읽어 보고 봐도 괜찮겠다고 판단한 프로그램만을 시청할 수 있었으며, 안전성이 입증된 책만을 읽을 수 있었고, 가슴이 파인 옷도 입을 수 없었으며, 남자 애들과 어울리거나 함께 자동차를 타고 외출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집에서 나오려면 그 수밖에 없었어요.”라는 럭스의 말처럼, 이들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중매체의 관점은 지역 신문사의 수습기자인 린다 펄에 의해 전개된다. 펄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서실리아의 죽음을 선정적인 어조로 묘사한 기사를 연재한다. 처음에는 서실리아의 죽음을 “십 대들의 자살”로 뭉뚱그려 일반화하고, 리즈번 자매들이 흑 마술이나 악마주의에 빠진 것처럼 오도하더니, 리즈번 자매들이 모두 자살하고 난 뒤에는 언니들이 서실리아를
rushmore
5.0
어릴 때 이 책을 봤다면 읽는 내내 자매들이 왜 단체로 자살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느라 명확하지 않은 결말에 시시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자매들의 자유 선택에 대해 철저하게 주변 이웃의 시각으로, 그들의 일상을 파헤져봤자 어떤 유의미함도 얻을 수 없고 어떻게도 연결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저 애도하게 만드는 방식이 몹시 세련됐다. 커스틴 던스트가 연기하는 럭스 너무 궁금한데 영화버전 볼 길이 없어 슬퍼..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아둔함은 축복일까? 총명함은 저주일까?"
은채
5.0
소설은 주제,구성,문체로 이루어진다. [처녀들, 자살하다]에 5점을 매긴데는 문체의 역할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제프리의 문체와 묘사와 레퍼런스들은 핀터레스트의 뿌옇고 에스테딕한 저화질 사진들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준다. 비극적 주제를 미학적인 단어구성과 담담한 뷰포인트로 풀어내는 점이 좋았다. 도입부는 리스본 자매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타자화해 관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중반부부터 리스본 자매를 개별적 존재로 바라보며 묘사가 변해가는 점도 좋았다. 아이러니하게 남성 작가로서 한계가 이 점에서 가장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제프리는 1960년생임을 감안했다. (145p. 그 전까지 사내녀석들은 집에서 각자 보잘것없는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상투적인 장면-신나게 파도타기를 하거나 스키 모자에 달린 잘 익은 과일같은 방울을 달랑달랑 흔들어대며 스케이트장에서 쏜살같이 도망치는-속에서만 리스본 자매들의 모습을 그려 왔었다. 그러나 차 안에서 실제 살아 있는 그 애들 옆에 앉아 있어 보니, 그런 상상들이 얼마나 허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이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 여동생이랑 별다를 것도 없는 애들이더라고.’) 몽롱하게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리스본가 자매들은 처음에는 누가 누구인지 거의 구분되지 않으나 읽으며 터리즈,메리,보니,럭스 그리고 서실리아는 서로 다른 샴푸 냄새만큼이나(219p.허브정원에서 레몬 그레이드를 지나 사과나무 과수원에 이르기까지)다른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낭만화된 자살 안에서 리스본 자매들이 한 선택의 이유는 소년들이 말하듯 모든 퍼즐 조각들을 다 모아도 항상 빈 공간이 남기 마련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든 책의 문장을 빌리자면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공공
3.0
글 전개하는 사람이 자매가 아닌 동네 남자애들이라는게 신선했다. 그리고 그 남자애들 시선이 처음에는 징그러웠는데 나중에는 음... 하는 느낌? 여자애들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집착이랑 주변사람들의 시선? 분위기 때문이였던거같는데 나름 스스로 추스리고 회복하는 아이들을 주변이 막내의 죽음으로 힘들고 고민스럽고 그들만의 시간이 필요한 아이들로 몰아갔던것같다. 정작 그 애들이 필요했던건 그런 시선이 아니라 전과같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였을텐데. 그 사건이 꼬릿표처럼 따라다닐까봐 자살한건 아닐까
propertyoftho
4.0
American girl 1970s aesthetic (from 1993)
재비
4.0
파헤칠수록 깨닫게 되는 단 하나의 진실, 무엇도 그들을 설명할 수 없다.
오수진
4.0
세상의 많은 비극을 두고 우리는 이유를 찾아 보기도 하고, 만약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가정법을 써 보기도 하는데, 결국 우리가 하게 되는 것은 걷잡을 수 없이 굴러가는 비극 앞에서 멍청하게 보고 서 있거나 모든 일이 끝난 뒤의 폐허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곱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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