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단 한순간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보통 사람들이 쓴 미국 역사 자유.평등.민주주의의 상징이던 미국이, 어쩌다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나 영원할 것만 같던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흔들리고 있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시작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은 10여 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며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가고 있고, 미국을 증오하는 목소리를 높아지게 했다. 게다가 자신만만하게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은 어마어마한 전쟁비용을 대느라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자유.평등.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테러 위협의 칼끝에서 전전긍긍하게 되고, 세계 제1의 강대국이라는 지위를 위협받게 되었을까. 그것은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아니 어쩌면 미국이 아메리카대륙에서 원주민들을 처참히 짓밟으며 몰아냈던 그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화려한 가면 아래서 행해 온 침략과 폭력의 제국주의 역사가 미국의 덩치를 키웠고, 또 바로 그 때문에 다른 나라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며 결국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다.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미국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초기 역사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기까지,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어 온 미국의 침략 역사를 낱낱이 파헤쳐 보여 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미국이 어떻게 세계를 이끄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왜 다른 나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검은 미국 뒤편에는 자유의 나라 미국을 유지하고 지탱한 보통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이 안으로는 가난한 노동자와 유색 인종들을 억압.착취하고, 밖으로는 쿠바.필리핀.아이티.베트남 등을 침략해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을 되짚어 보노라면 가슴이 아파 그 어두운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기가 힘들다. 아마 그 어둠의 역사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암울한 역사를 이야기하는데도, 책 사이사이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 소녀는, 폭력과 불의로 가득 찬 미국 역사에 대한 강의를 마친 하워드 진에게 우리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한다. “이 어두운 역사가 바뀔 수 있는 희망이 있나요?” 하워드 진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희망은 지금 보이는 세계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너무 좌절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 이 책의 저자 하워드 진은 인류의 잔인한 행위들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바라보기보다는 다른 역사 읽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역사를 바라보면 “전쟁과 더불어 전쟁에 대한 저항을, 불의와 더불어 불의에 맞선 반란을, 이기심과 더불어 자기희생을, 폭정 앞에서의 침묵과 더불어 도전을, 무정함과 더불어 연민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는 거대한 적과 맞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함께 싸워 승리한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 차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의 역사책이 특별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역사를 보면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최저 생계 비용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기 위해, 자신의 안전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벌인 끝에 하루 8시간 노동을 비롯한 여러 권리를 쟁취했다. 또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도서관과 식당, 버스 같은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따로 구분하는 흑백 분리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모두가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종차별이 잘못된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수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인종차별 철폐를 부르짖었고, 결국 흑백 분리 정책은 폐지되었다. 미국이 해외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벌일 때면, 전국 곳곳에서 당장 전쟁을 그만두라는 평화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1973년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인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기도 했다.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에는 이밖에도 투표할 권리를 요구해 참정권을 쟁취한 여성들, 정부가 은폐하려던 베트남전의 진실을 담은 기밀문서를 몰래 빼내 와 언론에 공개한 사람들, 전쟁터에서 학살당할 위기에 놓인 민간인들을 목숨을 걸고 구해 낸 사람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자유와 민주주의 나라 미국을 만들고 지탱한 진짜 주인공은 링컨이나 케네디 같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에서 길어 올린,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 하워드 진이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 읽기를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가 마주한 현실에서부터 그 힘이 길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2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하워드 진은,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다 현실의 모순을 조금씩 깨달았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공군 폭격수로 참전하게 된 그는 전쟁의 참화를 몸소 겪은 후 자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세상의 모든 전쟁에 반대했다. 전쟁이 끝난 후 콜롬비아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아 1956년부터 애틀랜타에 있는 흑인여자대학교인 스펠만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학생들과 함께하며 본격적으로 인종차별 문제에 눈뜨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흑백 분리 정책에 항의하는 사회운동과 민권운동을 시작한 그는 이후 언제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편에 서서 불의와 싸웠다. 이처럼 자신이 살아가는 순간순간 깨닫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그는 그 결과를 가지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행동하는 삶을 살았다. 노엄 촘스키는 이런 그를 가리켜 “우리가 신뢰하고 믿고 따를 수 있는 인물을 필요로 할 때 하워드 진은 언제나 맨 앞줄에 서 있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하워드 진은 “역사는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하워드 진의 대표 저서 《미국민중사》는 그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여 민중의 시각에서 미국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1980년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200만 부 이상 팔리며 미국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바로 이 《미국민중사》와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에세이인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만화로 재구성한 책이다. 만화로 만나는 진짜 미국이야기 하워드 진을 도와 이 책을 각색한 폴 불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미국민중사》를 대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또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하워드 진의 놀라운 저서에 담긴 중요한 식견을 다른 예술적인 형태로 조명해서 보여 주고자 한다.”그리하여 이 책은 만화라는 형식으로 알기 쉽게, 또 사진이나 당시 신문 등의 자료를 적절히 활용하여 설득력 있게, 그동안 지워지고 가려졌던 진짜 미국이야기를 들려준다.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주로 하워드 진이 사건을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중간중간 아메리카 원주민의 눈으로, 그리고 혁명가의 눈으로 역사를 서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그 당시의 상황을 더욱 실감 나게 만날 수 있게 한다. 이 책의 장점은 단 한 권의 만화책으로 《미국민중사 1,2》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미국민중사》를 읽어 보려 마음먹었지만 만만치 않은 분량 때문에 아직 실천하지 못한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입문서가 되어 줄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