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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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시리즈 4권. 하스미 시게히코가 영화비평가로 데뷔한 1969년부터 최근까지의 글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것으로 일종의 ‘비평선집’이다. 영화 비평가로서 활동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표한 글들에서 정선한 것을 모은 것인 만큼 그의 비평의 특징과 지향점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계영화계 전체를 뒤져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비평가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를 포함해 오늘의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쟁쟁한 중견들을 감독의 길로 이끌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영화관객들에겐 둘도 없는 지침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하스미 시게히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프랑스에서 플로베르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들뢰즈와 푸코를 일찌감치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 학자이며, 동경대 총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던 거물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평론이 그의 화려한 지적 배경과는 달리 철저히 영화광적이며, 기존의 평론이 이르지 못한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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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저자 서문-한국의 독자들에게--11 1부 다시,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이 부재하는 것의 광채--19 영상의 이론에서 이론의 영상으로--46 영화, 황당무계한 반기호--80 영화와 떨어지는 것--94 제도로서의 영화--128 영화와 비평--137 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 속에서 돈 시겔과 리차드 플라이셔 또는 그 혼탁과 투명--145 프리츠 랑 혹은 원환의 비극--167 장 르누아르 또는 촉각도시의 흔적--188 존 포드, 뒤집어지는 하얀색--209 <기적>의 기적-드레이어의 경우--231 영화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246 흡혈귀한테 보내지 못한 편지: 소네 추세이 --257 시네마의 선동장치--261 헨리 폰다는 결국 영화와 행복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284 파국적 슬로모션--286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할리우드의 50년대--302 어두어져 가는 시간 속에서: 미조구치 겐지 <치카마츠 이야기>--333 일본영화의 황금시대: 미조구치, 오즈, 나루세--348 고다르와 트뤼포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의 귀중함--354 <풀 메탈 자켓>의 큐브릭은 실패작을 찍는 것조차 실패했다--357 파라자노프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허우샤오시엔의 <동동의 여름방학>에 넘치고 있는 영화의 기척에 몸을 드러내보면 어떨까--360 지금 영화는 완고하게 침묵하고 있다. 그런 영화의 침묵에 대해 비평가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363 ‘모든 영화는 미국영화이다’(고다르)라고는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게 된 할리우드의 영화의 참상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를 향해서 영화에의 기대를 어떻게 조직하면 좋을 것인가--371 액션영화 베스트 50--379 3부 이동하는 영화들 알프스 남쪽 사면의 마조레 호반에 남쪽의 영화도시가 출현한다--397 영평인으로 홍콩영화제에 출석해 12일 간을 보냈다. 신작으로는 허우샤오시엔과 첸카이거의 영화가 틀림없이 일급의 작품이었다--423 마드리드의 거리에서 영화를 말하다: 빅토르 에리세와의 대화--429 광주의 존 포드--441 절대의 화폐: 사고와 감성을 둘러싼 단편적 고찰 1--445 4부 영화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작가주의에 거스르면서 팀 버튼을 옹호하는 것의 곤란--457 고다르의 고독--465 선악의 피안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밝은 미래>--488 영화의 21세기는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과 함께 시작된다--502 연출가의 지능지수의 이상한 높음: 마이클 만 <콜래트럴>--506 존 포드와 던진다는 것--509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 이 사치스러운 B급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516 21세기에 걸맞은 진정한 픽션을 처음 인류에게 제시하다: <스티브 지소의 해저 생활>--525 리얼타임 비평을 권함--528 에드워드 양 추도--561 몽고메리 클리프(트) 문제에 관해서: 영화사의 캐논화는 가능한가--570 이 영화작가의 겸허함의 결여는 보는 사람의 관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테렌스 맬릭 <트리 오브 라이프>--588 영화붕괴전야에 부쳐/영화붕괴전야를 향해서--592 해설: ‘영화광인’ 하스미 시게히코--임재철--603 옮긴이 후기--611 원제 및 출전--613 하스미 시게히코 연보--618 찾아보기--624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영화광인’ 하스미 시게히코, 그 40년간의 궤적의 기록 이 책은 하스미 시게히코가 영화비평가로 데뷔한 1969년부터 최근까지의 글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것으로 일종의 ‘비평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비평가로서 활동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표한 글들에서 정선한 것을 모은 것인 만큼 그의 비평의 특징과 지향점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계영화계 전체를 뒤져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비평가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를 포함해 오늘의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쟁쟁한 중견들을 감독의 길로 이끌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영화관객들에겐 둘도 없는 지침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하스미 시게히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프랑스에서 플로베르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들뢰즈와 푸코를 일찌감치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 학자이며, 동경대 총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던 거물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평론이 그의 화려한 지적 배경과는 달리 철저히 영화광적이며, 기존의 평론이 이르지 못한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일 것이다. ‘연주자’로서의 비평가 하스미의 영화비평은 자신의 압도적인 영화체험을 바탕 삼아 종횡무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영화 글이 보여주는 일견 현학적으로 보이는 공세에 독자는 아무래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고 과연 빈약한 영화 체험밖에 없는 자신이 영화를 논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하는 두려움까지 갖게 한다. 영화를 말하는 그의 열정에 의심을 가질 수는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과연 이 정도까지의 열정을 쏟아야하는가 하는 의아함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스미 시게히코의 이러한 태도는 결코 영화 체험의 양에 의해 자신의 영화적 판단에 우월성을 부여하려는 태도, 즉 아무래도 자기과시적이라고 생각되기 쉬운 그런 태도가 아니다. 그의 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 체험의 ‘폭넓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체험의 ‘강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강렬한 응시의 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체험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수확은 화면을 뚫어지게 봄에 의해 얻어지는 예상치 못한 발견, 하스미식의 용어로 말하자면 ‘조우’의 순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우가 가능해지려면 화면을 볼 때 절대 화면 밖의 요소를 개입시키지는 않는다는 태도를 견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스미 비평의 진수는 이러한 응시의 힘을 통해 얻은 조우의 체험을 자기류의 테마틱스(주제론)로 재구성하는 데에 있다. ‘부정한다는 것’, ‘먹는다는 것’,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산다는 것’, ‘보는 것’, ‘멈춰서 있는 것’ 등을 각 장의 주제로 내세우고 있는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하스미류의 테마틱스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중에서는 곡선을 주제로 한 히치콕에 대한 글, 원환을 주제로 한 프리츠 랑에 대한 글, 흡혈귀를 주제로 한 소네 추세이에 대한 글 등이 이러한 하스미류의 테마틱스의 대표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스미 자신이 일본에서 한참 영향력이 높아지던 시기, 스스로의 비평 활동에 대해서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한 1981년의 좌담회에서의 발언에서 그의 테마틱스적 글쓰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영화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라는 것은 지금 영화에 있어서 19세기가 끝나고 영화에서의 20세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19세기 음악의 분야에서는 위대한 작곡가가 많이 있었고 20세기가 되자 이번에는 위대한 연주가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1960년 이후 연주가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영화에 있어서 연주가라고 하는 것은 누구냐고 하면 그것은 보는 사람 즉 관객입니다. 우리가 인터프리테이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 환경으로서의 영화가 풍부해지기도 하고 빈곤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19세기의 대작곡가에 해당하는 감독들이 차지하는 지위라고 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명백히 저하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에 대한 비평가의 강세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현실인 것입니다. 초인적인 작가들, 하워드 혹스, 오즈 야스지로라든지 히치콕이라든지 혹은 마키노 마사히로 같은 굉장한 작가들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거나 혹은 젊은 사람들이 그들 위대한 작가들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 주기를 초조해하며 기다리고 있어보았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이 만든 영화를 평가하기는 합니다만 결코 여기에 미래를 걸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걸어야 하는 것은 연주가 쪽으로, 영화 그 자체를 연주해가는 우리 관객의 감성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화의 연주 그 자체를 수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영화적인 환경을 바꿔 가는 방식으로 연주해가면 좋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하스미적인 스타일’의 확립 플로베르 연구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스미가 1965년 일본에 돌아와 한 최초의 작업은 롤랑 바르트, 미셀 푸코, 질 들뢰즈 등의 인터뷰를 발표한 것이다. 60년대 후반 즉, 일본에서도 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의 지적 동향에 지극히 민감했던 시대에 그는 첨단의 흐름을 대단히 명석하게 소개함으로써 문명을 얻기 시작했다. 문학평론가로서의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해준 것은 1979년에 발표한 <표층비평선언>이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 책은 어떤 부자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읽는 것, 쓰는 것 그리고 사고하는 것에 반드시 끼어드는 그런 부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부자유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에 가까운 그런 경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유라고 믿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아주 드물게 자신을 잊고 심지어는 세계를 잊어버리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경이적인 예술작품을 조우했을 때나 아니면 놀라운 영화를 발견했을 때 말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은 항상 언어화,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야기로의 탈바꿈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의 틀로 편입돼야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가능한 그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어서의 어떤 결정적인 체험, 즉 한계체험이라고 해도 좋을 이 체험은 일상적인 레벨 즉 평준화된 세계로 끌어내려지고 만다. 어떤 대상이 계측 가능한 깊이 혹은 내부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면 한계체험은 더 이상 한계체험이 아니라 일상적인 체험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비평이란 존재가 과잉된 어떤 것과 황당무계한 조우를 연출하는 철저하게 표층적인 체험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체험을 그 고유성에 있어서 그대로 살려내는 ‘표층적인 비평’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스미의 전략은 언어를 그 극한에까지 밀어붙여서 거의 그 의미가 쉽게 포착되지 않는 지점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미작용이 거의 상실되는 지점까지 언어를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독특한 문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일본어 문장으로서는 구두점이 아주 적으면서도 대단히 호흡이 긴 그의 문장은 그냥 읽으면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일종의 “주술적인 리듬”까지 느껴진다. 도발적인 어투, 그리고 종래의 일본어 문장으로는 거의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호흡이 긴 문장. 바로 이런 것이 일본의 비평계에서는 ‘하스미적인 것’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시네필의 은밀한 쾌락’에서 ‘영화적 환경에의 개입’까지 하스미는 자신의 영화체험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는 편에 가까웠다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어떤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을 골라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영화는 거의 다 보는 편이었다는 것이다. 중학생 시절에는 만원의 재개봉관 맨 앞줄 구석에서 르네 클레르의 <침묵은 금>을 끝까지 보다가 안면마비를 일으켜 한 달 간 병원을 다닌 경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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