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언어는 멸종에 관한 것이었는지 사랑에 관한 것이었는지”
끝을 상정하는 사랑의 위기 속에서
오늘도 힘껏 멸종해, 너를 멸종해
사랑의 화석을 더듬는 멸종의 고고학
유선혜 첫 시집 출간
202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선혜의 첫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08번으로 출간되었다. “지금 여기 이곳에 발 딛고 서 있으면서 보고 듣고 만지고자 하는 열정”(심사평)으로 써 내려간 시 43편을 총 4부로 나눠 묶었다.
공룡은 운석 충돌로 사랑했다고 추정된다
현재 사랑이 임박한 생물은 5백 종이 넘는다
우리 모두 사랑 위기종을 보호합시다
어젯밤 우리가 멸종의 말을 속삭이는 장면
아주 조심스럽게
멸종해, 나의 멸종을 받아줘
우리가 딛고 있는 행성, 멸종의 보금자리에서
공룡들은 사랑했다 번식했다 그리하여 멸종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한 공룡들의 이름을 외우고
분류하고 그려내고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아이들은 멸종하고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부분
표제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시인은 ‘사랑’과 ‘멸종’의 자리를 고정해놓지 않는데, 이에 따라 시어의 위치를 부러 바꿔 읽다 보면 언뜻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둘 사이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이란 “이별이라는 단어를/이해해본 적 없다는 듯이/끝을 상상하는 능력을 모두 잃은”(「빈맥」) 감정이기도 하지만, “싱거운 미래”(「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요즈음에는 차라리 “끝으로 간다는 것에 대해/그러나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리미트 영의 마음”(「영으로 갈 때」)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을 전제하게 되었다고 해서 사랑을 멈추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흐릿한 마음”일지언정 그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여전히/여전하”고 “서로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우리의 임무”(「그게 우리의 임무지」)이므로 사랑은 계속된다. 마치 “고고학자”처럼, “운석이 떨어지기까지 어떤 비밀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는지 말해주지 않”(「뼈의 음악」)을지라도 지금껏 사랑하다 멸종해간 존재들이 남긴 뼛조각을 추스르는 데 골몰하며, 결국 우리는 멸종할 때까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사랑해,라고 발음하는 수밖에 없다”(「마녀와 로봇의 사랑」). 이 시집은 바로 유선혜의 목소리가 처음 전하는 사랑과 멸종의 발화이다.
“우주는 팽창하고 모든 점은 멀어진다고 해도
다가가는 찰나가 있어”
잡종의 별자리와 기울어진 행성이
증명을 거스르며 날아와 지구에 건네는 믿음
타당하지 않다고 해도
증명할 수 없다고 해도
믿게 되는 구절들이 있어
전제와 결론의 나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번짐이 있어
[……]
내면이 멸종한 행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외로움이 있어
어제 우리가 나눈 대화
당신이 나에게 몸짓으로 전한 인사와 내가 침묵으로 대답한 질문 침묵을 이해하는 눈빛과 독특한 말의 리듬
이 모든 게 거짓인 행성을 상상할 수 있니?
―「충돌에 관한 사고실험」 부분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다가와 “지구에 새로운 멸종을 가져”(「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오기 전 운석의 원래 모습은 너른 우주를 떠다니는 유성체이다. “쓸모없는 것들만 사랑하는 너를 사랑하는 나와/자꾸만 절뚝이는 반쪽짜리 나를 사랑하는 네가/섞여 들어”간 모습으로 “허무하게 반짝이는”(「잡종의 별자리」) 별의 조각과 “한 대 맞아 찌그러져/기울어진 궤도를 가진” 채 “불규칙한 박자에 맞춰/끔찍하고 괴상한 주기로 회전하는”(「사이비 리듬」)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뭉쳐진, 이상하고 아름다운 덩어리.
우주 저편을 부유하던 유성체가 머나먼 지구의 대기권 안으로 뛰어드는 까닭은 “우리의 몸과 몸이 만날 때/오로지 물질로 구성된 육체들이 부딪힐 때/함께 충돌”해야만 “만들” 수 있는 무엇의 존재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면과 의미가 사라진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증명하려 하는 시대를 들이받음으로써 감히 그 “증명을 거스르”기 위해, 반인반수의 별자리와 어긋난 리듬의 행성은 기꺼이 운석이 되어 지구와 부딪으며 “우리를 입자의 덩어리가 아니게 하는/입술로 흘러나온 파동 너머의 그것을”(「충돌에 관한 사고실험」) 창조한다. 단단한 믿음을 안고 지구로 날아드는 이 별똥돌의 충돌은 다분히 의도적이므로, 그것이 그리는 궤적은 “하늘에서” 추락의 포물선이 아니라 “댄스처럼 보일”(「멸종의 댄스」)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영혼에도 구멍이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존재의 구멍
그 실체를 찬찬히 감각하는 생의 손아귀
누군가는 영혼의 구멍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고,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구멍이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것들을 보세요. 우리에게 빈 곳을 채워 넣으라고 명령하는 구멍의 중력. 비어 있는 것의 질량. 갈구하는 묵직함.
이것들을 느낄 수 없나요?
―「구멍의 존재론」 부분
“우주를 가득 채”우던 “미지의 물질이” 지구에 도착하여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곳은 바로 인간의 ‘구멍’이다. 이 구멍은 “사랑이나 정의, 투쟁 혹은 혁명으로도/틀어막을 수 없는 틈새/없는 것들로 정의되는/여집합으로만 서술할 수 있는/고집스러운 빈자리”여서, 우주의 물질조차 그저 “구멍을 관통”하며 “훑고 지나”갈 뿐 이를 채우지는 못한다.
“인간이라면 구멍을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구멍의 존재론」)지만 시인은 제 “머리에 구멍이 났”(「괄호가 사랑하는 구멍」)음을 시집의 가장 첫 작품에서부터 고백한다. “귀엽지 않은 개체는 인간이 다 죽여버”(「원룸에서 추는 춤」)리기 때문인지 그의 구멍은 “조금 더 커지면 야옹 하고 울지도” 모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괄호 칠 수 없는 생각’들을 먹고 “점점 크게”(「괄호가 사랑하는 구멍」) 자라난다.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조연정이 짚고 있듯 시인에게 있어 구멍은, 즉 “영혼의 허기와 존재의 결핍”은 이토록 “당연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존재”하여 “언제나 분명히 감각되는 실체”인 것이다.
시인은 구멍을 단순히 드러내는 데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키운다’고 표현한다. “펄펄 뛰며/채워 넣기를 명령하”다가도 막상 무언가를 “욱여넣으면 토해내는” 이 까다로운 ‘반려 구멍’을 도넛 반죽 다루듯 따뜻한 손으로 “이리저리 주무르”(「구멍의 존재론」)고 도닥인다. “뭐든 잔뜩 부풀면” 다시 또 “구멍이 난”(「악의 문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밀가루가 부풀어 오를 때 나는 찰나의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잠시나마 “살아 있다고 느끼”기 위해. 가만한 손길로 “살아가는 모든 것의/타고난 결핍”(「구멍의 존재론」)을 느끼는 데 집중하는 유선혜의 “취미는 살아 있기, 특기는 고요하기”(「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