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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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노동과 나의 노동이 만나고 얽혀 빚어진 글 그 글에 담긴, 혹은 미처 담기지 못한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두려움, 설렘과 긴장, 공감과 버거움 ‘진실’보다 중요한 것: 인터뷰이에 관하여 취재는 늘 현장에 가닿지 못하고 멈춰버리곤 한다. 처음 접한 현장을 알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기록자에게 존재하는 ‘낯선 곳으로 가 흔한 이야기를 듣는’ 관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이면이자, 세상이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그래서 아무도 쓰지 않는 이야기를 듣겠다고 가서는 ‘흔한 이야기’를 듣고 오는 일이 잦다. 기록자 또한 익숙한 이야기에 귀가 열리는 사람이므로. 이런 관성은 인터뷰이 스스로가 메우지 않은 틈새를 기록자가 앞서 메우려 하는 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인터뷰이는 세상 혹은 기록자의 욕망을 아는 존재다. 알고 답한다. 인터뷰이가 기록자의 관성에 조력하는 셈이다. 이는 청자를 고려한 말하기이며, 소통에 대한 믿음이자, 목소리를 키우려는 전략이다. 그럼 그들이 기록자 앞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기는 어렵다. 그의 욕망조차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특정한 서사를 원하는 세상의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더불어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다. 인터뷰이는 한자리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기록자는 현장이나 인터뷰이 곁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그곳을 살아가는 이들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은 생물이기에 운동하고, 욕망 또한 변화한다. 오늘의 진실이 곧 내일의 진실일 수는 없다. 그들은 내게 자신의 노동에 대해 세밀히 털어놓았다가도, 돌연 자신의 이름을 글에 넣지 말아달라고 한다. 자신이 등장한 구술을 지워달라고 요청하는 이도, 후일 내게 과거의 인터뷰가 부끄러웠다고 털어놓는 이도 있다. 그런 인터뷰이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정말로 알 수 없다. 간혹 망망대해를 떠내려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몰라도 끄덕인다. “글의 주인공이자 기록 대상자, 자신의 공간에서 일하고 관계 맺는 인터뷰이의 삶 자체를 존중하지 않으면 황폐한 돌섬에조차 당도할 수 없”기에. 그럼에도 인터뷰이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목소리를 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을 때, 혹은 말의 힘에 이끌려 자신의 내력과 사연을 털어놓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만큼 후회도 크다. “자신이 마련해둔 자리는 한 평인데, 자꾸만 기록자나 기자들이 자리를 넓게 쓰려고 몸을 밀고 들어”오니, 긴장이 발생할 수밖에. 그럴 때면 인터뷰이가 (인터뷰를 마치고) 느꼈을 헛헛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듬어보려고 노력한다. 친밀한 사이도 아닌 기록자에게 ‘너무 많은’ 말을 털어놓은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그 말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울 무언가를 인터뷰 자리에서 건넸던가.” 응답과 알아챔: 기록글이 빚어지는 과정 “그저 말을 원했다. 꼭 완결된 말일 필요도 없다. 말을 쉬는 타이밍, 생각을 가다듬는 헛기침, 침묵, 떨림. 이 모든 것이 섞인 ‘말’을 원했다. ‘몰라’도 좋고 ‘아니’도 좋았다. 꼭 음성언어일 필요도 없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내가 해독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내가 그(들)의 대화에 동참할 수만 있다면. 그런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응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난감할 때가 많다. 때론 너무 많은 것을 물어 자책했고, 때론 중요한 무언가를 묻지 않은 것을 한탄한다. 무엇을 들어야, 얼마나 알아야 응답할 수 있을까. 잘 듣는다면 응답할 수 있을까. 기록자와 인터뷰이가 나눈 대화가 글이 되는 아름다운 순간은 도통 오지 않는다. 인터뷰이가 슬쩍 보여주는 것은 그의 삶의 한 토막일 뿐이다. 기록자는 겨우 그 토막을 엿보고서 그의 삶을 아는 척 적어내려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기록자에게는 불안이 있다. 세상 역시 자신이 읽어내린 방식으로 그를 읽어내릴 거라는(바로 이것이 세상의 응답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 역시 인터뷰이에 대해 잘 모른다는 불안감. 기록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해석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어쩌면 해석과 해독이라는 것은 어떤 대단한 지적 행위가 아니라 사소한 알아챔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일 술을 마신다는 나이 든 현장 노동자가 쓱 짓는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내가 가닿을 수 없는 낯선 곳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같이 웃는다. 돌아서 저이의 웃음 속에 숨겨진 시스템과 제도를 파악하려 애쓰며,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할 위험을 헤아리고, 이로부터 이득을 얻는 이를 생각한다.” 내게 말을 들려준 이들이 보여주는 시선과 관계가 기록자인 나의 세계로 들어올 때 나 또한 다른 언어를 가지게 된다. 나의 세계 또한 그들에 의해 확장된다. 그들의 세계를 올곧게 전할 자신은 없지만, 공간과 사건, 삶과 시대에 대한 해석을 들려주는 인터뷰이에게 나 또한 응답할 수 있길 꿈꾼다. “기록이란 상대의 손에도 흙 묻히는 일이라는 것. 어떨 때는 잔뜩 흙이 묻은 상대의 손에 내 손을 가져가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차피 괴로움도 갈망도 흙 묻은 손으로 내가 감당해야 한다면, 화자의 손을 감싼 그 내 몫의 손만이라도 인간의 체온을 유지한 채 바지런히 움직여야겠다. 말하는 이의 세계와 기록자의 세계가 서로 얽혀 빚어진 기록이 나올 때까지.” 인터뷰를 망치게 하는 것들 정작 현실은 녹록지 않다. 취재 현장에는 기록자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만연하다. 사소한 실수로 인터뷰 내용이 하나도 녹음되지 않는 무서운 일도 있지만, 이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내상을 입게 되는 사고도 있다. 인터뷰이와의 관계를 망치게 되는 사고. 그런 일은 “서로가 동등하지 않음이 과하게 드러날 때” 발생한다. 인터뷰를 망친 어떤 날이 있었다. 그날 만난 고려인 인터뷰이의 말을 통역해주는 (마찬가지로 고려인인) 통역자는 나를 줄곧 불편하게 만들었다. 통역에 앞서 자기 생각을 말하기 바빴다. 사달이 난 건, 인터뷰이가 들려준 학창 시절 이야기에 내가 “제1외국어로 독어를 배우셨다니 신기하네요. 영어는 외국에 과목에 없었나요?”라고 답했을 때였다. 통역자는 내게 거칠게 항의했다.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왜 그랬을까. 당시 나는 고려인들이 누구인지는 고사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지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던 날들이었다. 러시아권에서 자란 인터뷰이에게 “독어를 배우셨다니 신기하네요”라고 맞받아치다니. 그건 분명 나의 무지였다. 나의 무지를 지적한 통역자는 옳았지만, 그 방식이 너무 거칠었기에 나는 지켜오던 예의를 내려놓고 불편한 감정을 표출했다. 그때 나는 내가 폭력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게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기에. “내가 여자여서. 심지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고 공적인 권력이 없어 보이는 여자여서.” 그럼에도 그 분노보다 스스로의 무지함에 대한 자책의 비중이 더 컸다. “당시 나는 사람들에게 ‘그를 어떻게 보자’고 말하는 것이 기록자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들을 어떻게 봐야 한다 또는 보지 말아야 한다고 답을 내리고 싶었다. ‘정당한’ 시선이라는 강반이 나를 조급하게 했고 가장 중요한 일을 잊게 했다. 저들은 나에게 보여지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때로는 나조차 ‘나답지 않은’ 노동을 하기도 했다. 상대(인터뷰이)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으로 비춰지고자 스스로 ‘무난한 여자/사람’을 연기한 적이 있었다. 처음 찾아간 농성장에서 중년 남성들이 나를 농담 삼아 ‘자신의 애인’으로 소개할 때,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웃었다. 내가 불쾌함을 표했을 때 싸해질 분위기가 인터뷰에 어떤 영향을 줄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또한 진심으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돌아보니 그 노력은 너무 ‘여성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