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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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청나라, 당나라 역대 황제 평전’에 이은 네 번째 시리즈 국가 위기 때마다 결사항전 대신 돈과 타협으로 살아남던 왕조의 최후 이 책은 역사 자료에 근거하여 송나라(960~1279) 황제 18명의 통치 시대에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봄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과거에만 머물러있는 역사는 박물관의 먼지 쌓인 골동품에 불과하다.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에 대한 예측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음으로써 현재를 바로잡고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다. 중국 최후의 대 분열기였던 5대10국의 시기는 무장들의 혁명으로 지방적 할거의 절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송의 건국으로 이 시기는 막을 내렸고, 송의 태조 조광윤은 공제로부터 역사상 최후로 선양 형식을 밟아 송을 건국하고 문치주의 전통과 군주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송나라는 오늘날 중국 한족에게 자랑이자 굴욕이다. 이는 송나라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반영한다. 먼저 그들은 왜 송나라 역사를 자랑으로 여기는지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첫째, 송나라는 ‘피’를 흘리지 않고 건국한 왕조이며, 둘째, 송나라는 ‘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 왕조이며, 셋째, 송나라는 이른바 ‘중국식 민주주의’를 꽃피운 시대였고, 넷째, 송나라 때 중국의 도시 문명은 크게 발전했고, 다섯째, 송나라는 과학, 의학, 학술,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와 반면에 굴욕은 무엇인가. 송나라는 2대 황제 송태종 조광의의 북벌정책이 실패한 후 국가가 망할 때까지 300여 년 동안, 거란(요나라), 서하, 금나라, 몽골(원나라) 등 북방의 여러 왕조에게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다. 송나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였으며 최첨단 무기인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물론 백전백패는 아니었으나, 왜 그렇게 싸우기만 하면 대패했을까. 또 송휘종 조길, 송흠종 조환 두 황제가 포로로 잡혀 금나라로 끌려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온갖 치욕과 고통을 당했을까. 오늘날 중국 한족은 이른바 ‘정강의 변’을 중국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다. 몇 가지 중대하고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역대 황제들은 대체적으로 무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의 조상인 송태조 조광윤의 성품과 통치술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나라 멸망 후 오대십국의 분열과 대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군권을 장악한 지방의 절도사들이 무력에 의지하여 건국한 왕조가 얼마나 허망하게 망했는지, 조광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치국의 도는 ‘무(武)’에 있지 않고 ‘문(文)’에 있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전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으로써 모든 난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또 유가의 인의사상에 바탕을 둔 어진 정치를 펴고자 노력했다. 이는 황위를 계승한 황제들에게 애민사상을 가지게 했으나, 가급적이면 전쟁을 회피하게 했으며 국난 극복의 의지를 약하게 했다. 또 그들이 천부적으로 제왕의 자질보다는 예술가, 문인의 자질을 타고난 것도 불행한 일이었다. 둘째, 송나라 황제들은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돈’으로 평화를 산 잘못을 저질렀다. 주변 국가들과 체결한 평화조약은 대부분 송나라에게는 불평등조약이었다. 당장 적군을 물러가게 하고 황제 자신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다면, 어떤 굴욕도 마다하지 않고 돈으로 해결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주변 국가의 침략을 더욱 자극했다. 주변 국가의 왕들은 송나라를 침략하여 황제를 협박하면 얼마든지 엄청난 재물을 갈취할 수 있었다. 셋째, 송나라는 개국 초기부터 무신이 몰락하고 문신이 다스린 왕조였다. 문신들은 지나치게 대의명분에 집착했다. 당파싸움을 벌이고 탁상공론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막상 적군이 쳐들어오면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난국을 타개하려고 했다. 물론 송나라에도 이강, 악비, 한세충 등 구국의 명장이 있었으나, 그들의 항전 의지는 언제나 황제의 소극적인 태도와 간신의 모함에 좌절되고 말았다. 넷째, 북송을 멸망시킨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는 무력이 너무나 강했다. 송나라 황제 18명 가운데 8대 황제 송휘종 조길은 예술에 탐닉하여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며, 15대 황제 소도종 조기가 황음무도한 생활을 한 것 이외에는, 국가를 망칠만큼 큰 과오를 저지른 군주는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제왕의 도를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며 유가 경전의 가르침과 종법 사상에 충실한 군주였다. 그런데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아주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금나라의 개국 황제, 아골타는 한평생 싸움터에서 살다간 맹수처럼 사나운 장수 출신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전광석화처럼 빠른 기병을 이끌고 끊임없이 북송의 변경 지방을 유린했다. 칭기즈칸의 후예가 건국한 원나라는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력이 강했다. 송나라가 금나라와 원나라를 이웃 국가로 둔 것은 불행이었다. 더구나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그 두 나라에게는 호랑이 앞에 놓인 사슴 신세였다. 중국역사에서 역대 왕조는 대부분 내부 분열과 민란으로 망했다. 하지만 송나라는 외침에 의해 망한 것이다. 송나라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군인을 무시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국가는 망할 수 있다는 엄중한 교훈이다. 송나라처럼 아무리 고도의 문명국가를 이루었더라도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둘째, 국가는 거시적 의미의 ‘문(文)’과 ‘무(武)’의 동등한 가치 체계를 바탕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송나라는 문에 치우친 국정 운영을 했기 때문에 무력이 강한 국가에게 먹힌 것이다. 이른바 ‘문무겸전(文武兼全)’은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셋째, 외교는 결코 감정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송나라의 철천지원수는 금나라였다. 몽골족이 북방의 초원과 사막 지대에서 원나라를 건국하고 송나라에게 연합군을 조직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키자고 제안했다. 당시 남송 정부는 이성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고 오로지 금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하여 원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늑대를 쫓아내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고 말았다. 만약 남송이 원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등거리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했다면, 원나라에게 그렇게 쉽게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시대에 우리나라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넷째, 당파싸움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왕안석은 6대 황제 송신종 조욱의 지원을 받고 신법(新法)을 주장하며 혁신 정치를 폈다. 신법이 초기에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으나, 송신종 이후에는 당파싸움으로 변질되어 오랜 세월 동안 국론을 분열시켰으며 북송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오늘날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당리당략에 얽매인 정치인들이 ‘국회의사당’에 득실거릴 때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의 재앙이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재앙의 근원이 어디에 있든, 최초의 확진자가 중국 호북성 무한에서 보고된 것은 사실이다. 중국이 ‘사고’를 치면 전 세계가 악영향을 받는다. 하물며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책이 역사적인 면에서 중국과 중국인을 편견 없이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