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2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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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페미니즘 담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여성학자이자 '영화광'인 정희진이 20년 동안 꼭꼭 쌓아 둔 영화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다. 저자가 '내 인생의 영화들'로 꼽는 28편의 영화가 담겼다. 정희진에게 영화는 기분 전환이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치열한 인식 활동이다. '혼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와 홀로 대면하여 자신만의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일이며, 나와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 일이다. 영화와 나만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영화 속 인물과 만나고 그 인물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의 내면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혼자서 본 영화>는 '나에게 말 걸기'이자 '타인에게 말 걸기'의 기록이다. 정희진은 영화를 보는 일을 "내 경험 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를 만나는 일로 정의한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위치를 벗어나 새로운 각도에서 이면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영화는 '렌즈'다. 영화는 현실을 담는다. 영화는 우리 역사의, 인생의 한 부분을 잡아챈다. 위치를 바꾸어 다르게 보는 순간,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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レビュ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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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머리말 _ 한 편의 영화가 내 안에 들어올 때 1장 사랑하기와 말하기 사이에서 가족 밖에서 탄생한 가족 _ <가족의 탄생> ‘사랑한다’와 ‘사랑했다’ _ <하얀 궁전> 남성이 요부가 될 때 _ <인 더 컷>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_ <피아니스트> 부패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_ <디 아워스> 메릴 스트립의 노래, 아바의 노래 _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때 _ <샤도우랜드> 사랑한다면, ‘배용준’처럼 _ <외출> 마지막 장면 _ <문라이트> 2장 상처가 아무는 시간 지옥에서 탈출하는 법 _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인간이 위대할 때 _ <타인의 삶>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 _ <밀양> 가해자를 찾아가 만난다면 _ <끔찍하게 정상적인> ‘착한’ 여자의 ‘나쁜’ 남자 순례기 _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상처가 아무는 시간 _ <위플래쉬> 질투라는 자발적 고통 _ <질투는 나의 힘> 누가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 _ <더 스토닝> 상처와 응시 _ <거북이도 난다> 슬픔의 강을 건너는 방법 _ <슬픔의 노래> 3장 젠더, 텍스트, 컨텍스트 ‘정치적인’ 남성, ‘비정치적인’ 여성? _ <송환> 북한 남성 판타지 _ <강철비>, <의형제>, <용의자>, <공조> 타인의 시선으로 1루까지 걷다 _ <YMCA 야구단> 정체성의 슬픔 _ , <우리 학교>, <피와 뼈> 박정희와 김재규의 차이? _ <그때 그 사람들>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러나 인간인”_ <사방지> 여성 리더와 여성주의 리더 _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아주 격렬한 평화 만들기 _ <웰컴 투 동막골> 몸의 기록 _ <머니볼>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주인공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인생의 동반자로 나는 그/그녀와 함께 산다. 영화는 나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이 영화들이 있어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죽도록 사랑한 영화 28편 《혼자서 본 영화》는 한국 페미니즘 담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여성학자이자 ‘영화광’인 정희진이 20년 동안 꼭꼭 쌓아 둔 영화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다. 저자가 ‘내 인생의 영화들’로 꼽는 28편의 영화가 담겼다. 정희진에게 영화는 기분 전환이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치열한 인식 활동이다. ‘혼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와 홀로 대면하여 자신만의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일이며, 나와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 일이다. 영화와 나만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영화 속 인물과 만나고 그 인물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의 내면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혼자서 본 영화》는 ‘나에게 말 걸기’이자 ‘타인에게 말 걸기’의 기록이다. 영화를 보는 나만의 습관이 있다. 혼자 본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메모하느라 대개는 두 번 본다. …… ‘혼자서 본 영화’는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 머리말에서 한 편의 영화가 내 안에 들어올 때 《혼자서 본 영화》에서 정희진은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으로서 자신만의 주관적이고 독자적인 입장에서, 특유의 전복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읽고 해석한다. 권력과 젠더에 관한 놀라운 감수성을 바탕에 깔고 외로움, 사랑, 상처, 고통, 구원을 이야기한다. ‘나쁜 남자’들을 거치며 삶이 망가져 가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에게서 저자는 ‘혐오’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발견한다. 계속 배신을 당하면서도 사람을 믿고 사랑을 하는 마츠코야말로 자신의 주체성을 놓치지 않는 진정으로 강인한 존재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성폭행 피해자 소녀는 지옥 같은 학교의 가해자들 사이에서 수동적 피해자 되기를 거부하고 타자가 되기를 선택함으로써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가족의 탄생>을 보면서 저자는 ‘정상 가족’이 아닌, 연대와 사랑으로 뭉친 대안적 가족에서 위안을 받는다. “이 영화는 나를 숨 쉬게 한다.” 정희진의 자유로운 느낌과 생각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하나의 이야기에 담긴 다양한 해석을 만나게 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접하게 된다. 정희진은 영화를 보는 일을 “내 경험 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를 만나는 일로 정의한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위치를 벗어나 새로운 각도에서 이면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영화는 ‘렌즈’다. 영화는 현실을 담는다. 영화는 우리 역사의, 인생의 한 부분을 잡아챈다. 위치를 바꾸어 다르게 보는 순간,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 ‘머리말’에서 내용 구성 “이 영화는 나를 숨 쉬게 한다.” - 1장 ‘사랑과 말하기 사이에서’ 1장은 <가족의 탄생>부터 <디 아워스>, <피아니스트>, <하얀 궁전>, <문라이트>에 이르기까지,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한 사랑의 여러 모습과, 사랑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 정치적 문제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들을 모았다. 예를 들어,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은 <피아니스트>는 스스로 성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여성의 욕망과 쾌락, 자율적 선택으로서 마조히즘을 보여준다. 정희진은 이 영화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일탈 욕망을 여성이 추구할 때 따르는 처벌을 확인한다. <디 아워스>에서는 여성을 족쇄에 묶는 배타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고, 여성을 유혹하는 ‘남성 요부’가 등장하는 <인 더 컷>에서는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를 여성(이른바 ‘팜파탈’)의 탓으로 돌리는 남성 판타지를 뒤집는다.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은 성적 주체로, 여성은 성적 대상으로 만든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유사 이래 여성은 언제나 성적 주체였다. ‘꽃뱀’의 유혹에 넘어간 남성들의 ‘억울한 호소’, ‘큰 뜻’을 이루려는 남성과 이들을 대변하는 남성 문화는 여성을 ‘남자 신세 망치는 골칫덩이’로 경멸해 왔는데, 그 혐오의 정점이 ‘창녀’였다. 이처럼 여성은 성의 피해자로서 또는 주체로서 남성의 편의에 따라 늘 양립해 왔다. - <인 더 컷>(48쪽)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문제는 필요한 관계를 얻으려면, 그 관계를 오래 이어 가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 사랑 이전에 윤리. 윤리는 정치학이고 사회 정의다. 윤리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 “당신의 존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 <하얀 궁전>(38~39쪽)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한다면……” - 2장 ‘상처가 아무는 시간’ 때로 삶은 보이지 않는 모래늪이 도사린 사막처럼 느껴진다. 고통과 상처가 언제 우리의 발목을 잡아챌지 알 수 없다. 끔찍이 사랑하던 자식을 유괴범의 손에 잃거나(<밀양>), 학교 급우들에게 왕따와 성폭력을 당하는 일(<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더 힘든 시간은 사건 이후가 아닐까. 상처를 끌어안고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야 하므로. 2장에서는 <위플래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끔찍하게 정상적인>, <밀양>까지 주로 고통과 상처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난다.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면, 우리는 지배 집단과의 싸움보다 누가 더 큰 상처를 받았는가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 - (105~106쪽) 약자에게 대화는 어려운 일이고, 강자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가해자가 대화를 먼저 요구할 때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이고, 피해자가 대화를 청할 때는 “나한테 왜 그랬나요?”라고 묻기 위해서이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면, 대화를 다루지만, 피해자는 무너지지 않고 가해자의 멱살을 잡는다. 피해자에게 도움까지 주겠다는 가해자의 팽창된 자아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찌질하고 비겁하면서도 동시에 배려와 시혜의 주체가 되려는 이들.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는 타인이 지치기를 바란다. - <끔찍하게 정상적인>(125쪽) “말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돌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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