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역사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37년 세월을 엿보다
1968년 첫 작품을 발표한 이래 방대한 저술활동을 펼쳐온 탁월한 역사작가 시오노 나나미. 15년에 걸쳐 완간한 『로마인 이야기』시리즈를 비롯하여 『바다의 도시 이야기』『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등 흥미진진한 역사 논픽션을 쉼 없이 써온 그는 『남자들에게』『침묵하는 소수』 등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품격 있는 삶의 태도와 스타일을 말하는 매력적인 에세이로 사랑받아 왔다.
이번에 펴내는 에세이집 『생각의 궤적』은 1975년부터 2012년에 이르기까지 지난 37년간 다양한 매체에 실린 그의 글들을 엄선하여 엮은 책이다.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에 이어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과 『신의 대리인』으로 신인 딱지를 뗀 젊은 작가였던 30대부터, 『로마인 이야기』『르네상스 저작집』『십자군 이야기』 등 대작들을 펴낸 70대 노작가로 무르익기까지, 긴 세월 동안 틈틈이 써온 이 에세이들은 한 편 한 편 나누면 그때마다의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이처럼 한데 엮어놓으면 사고의 흐름인 동시에 삶의 흔적이다.
이탈리아에서의 생활, 젊은 날의 지중해 편력, 역사와 문명에 대한 생각,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의 추억, 『로마인 이야기』 집필에 임하고 전력하는 과정, 역사작가로서 자세와 창작의 풍경, 음식.여행.축구.패션.영화 등 다양한 관심사에 대한 품평……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다가오는 그의 글들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로서 엄격하고 정제된 모습이 아닌, 작품의 이면에 있는 ‘인간’ 시오노의 일상과 삶이 드러난다.
젊은 날의 지중해 편력과 인생을 바꾼 ‘로마의 가을’
2009년에 쓴 글에서 시오노는 젊은 여자의 몸으로 ‘선원’이 되어 지중해 곳곳을 누볐던 모험담을 회상한다. ‘그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맞고,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쉬면서’ 경험한 이 지중해 순례는 훗날 그가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여러 작품을 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죽으면 이 지중해 어딘가에 재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미리 남겼다고 할 만큼, 그의 지중해 사랑은 남다르다.
“우선 지중해의 웬만한 항구도시에는 다 있는 요트하버의 클럽에 간다. 클럽에는 정박 중인 요트의 구인 광고가 닥지닥지 붙어 있다. 일하면 공짜로 태워준다는 내용이다. 그런 데다 응모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이십대 시절의 나는 각지의 요트하버를 전전하면서 지중해 순례를 마쳤다. 그 부산물로 요트 조종 기술을 약간 익히게 되었는데, 지중해 주변을 내 두 눈으로 본 것과 요트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 두 가지가 훗날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쓸 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19쪽)
20대의 시오노는 자신의 꿈을 좇아 이탈리아로 홀로 건너갔었다. 그의 발길이 처음 닿은 곳은 다름 아닌 10월의 로마. “로마의 가을은 나를 역사 작가로 만들었다”고 할 만큼 매혹적인 도시였다. 그리하여 1년 예정으로 떠난 유럽 여행은 로마를 본거지로 삼은 긴 여행이 되었고, 40여 년이 넘는 이탈리아 거주로 이어졌다. 그 세월 동안, 그가 처음 품은 꿈과 계획이 차근차근 영글어갔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를 바다 건너 저 먼 나라의 과거 이야기 속으로 인도해준 수많은 작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시오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도시 로마에 찬가를 보낸다.
“로마는 역시 아름다운 도시다. 아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마저 든다. ……2천 년 동안 변화한 일곱 가지 얼굴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미묘하게 중첩되어 살아 있다. 이만큼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도시를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서 나는 인간의 삶을 느낀다.”(202쪽)
‘스타일’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생각의 궤적』에는 우리가 기존의 작품에서 접할 수 없었던 시오노의 여러 얼굴이 담겨 있다. ‘글이 곧 사람이라지만 먹는 것 또한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그에게 식사의 자리는 무척 의미를 부여하는 공간이다. 음식을 즐기면서도 유쾌한 대화를 만들 줄 아는 친분 있는 두 선배 학자들을 시오노는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음식체험 또한 문화.문명의 단면을 드러내는 까닭에 여행지에서 현지 음식을 기꺼이 즐기라고 말한다. 또한 ‘바라봐서도 행복할 뿐만 아니라 몸에 지녀도 행복해지는’ 보석과 ‘유행은 좇지 않으면서도 우아함을 잃어서는 안 되는’ 세련된 패션 감각, 특히 영화와 축구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탈리아 사람들보다 더 열정적인 얼굴이 된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카메라맨으로 위장해서, 바티스투타의 슛을 보고 싶어요. 골문 바로 뒤에서 말이죠. 그 타고난 스트라이커의 발이 차는 슛의 대단함을, 골키퍼와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만끽하고 싶은 것이죠. 강력하게 밀고 들어오는 그 느낌을.”(106쪽)
그는 “일본인은 ‘격’이 있는 얼굴을 잃어가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하지만, 날카로우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자국민을 바라보기도 한다. 또한 ‘언제나 다소의 긴장감이 요구되는’ 오랜 타향살이에서 터득한 마음가짐을 전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쉽게 동화되거나 융합했다면 그건 가짜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모국과 비교하며 한탄해서도 곤란하다. 외국에 산다는 것은 이렇게 타협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고 늘 자신을 타이르는 나날의 연속이다.”(114쪽)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의 우정,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
“역사적으로 위대한 남자들이 몇 명이나 살고 죽었지만, 내가 반할만 한 남자가 쉬이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하다, 고매하다고 느끼는 인물은 있지만, 현실 속의 남자보다 더 현실감이 있고 몸과 마음까지 사로잡는 남자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332쪽)
이전의 다른 에세이들과 마찬가지로, 『생각의 궤적』에는 시오노가 매료된 다양한 역사적․동시대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악마적 매력’을 지닌 노부나가와 마키아벨리에 대한 깊은 애정, ‘유능한 테크노크라트’로서 로마 제국의 기반을 견실히 다진 티베리우스 황제의 생애에 대한 품평, ‘자신을 경탄함과 동시에 절망케 하는 상상력’을 가진 펠리니와 ‘관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비스콘티라는 두 이탈리아 거장 감독과의 추억, 온몸으로 감상한 영화 「카게무샤」를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보내는 팬레터, ‘50세가 되면 각자의 로마사를 쓰자’고 약속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국제정치학자 고사카 마사타카에 대한 추모 등……
시오노와 교류하였고, 삶과 작품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력과 예리한 관찰력은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그런데 야망을 품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일일까. 사심이 없다고 공언하는 이상주의자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끼쳤는지는 역사 속의 수많은 실례가 증언해 주고 있다. 나는 이런 위선자보다는 야심가 쪽이 훨씬 해가 적다고 생각한다. 아니,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면, 야망을 품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217쪽)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창작의 풍경
이 책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대목은, ‘작가’ 시오노의 집필실 풍경일 것이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진지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자세로 작품에 임했는지 알 수 있다.
예컨대 시오노가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 남자’ 체사레 보르자에 대해 쓸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은, 관능 그 자체다.
“몸과 마음은 5백 년 전 옛날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 있었다. 그리고 나의 주인공 체사레 보르자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일본의 내 남자친구들보다 훨씬 현실감 있는 남자였다. …… 나는 그의 가무잡잡하고 탄력 있는 팔의 감촉도 알고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