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의 귀향길을 따라,
경복궁 광화문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걷는 역사의 길, 휴식의 길
1569년 3월 4일(음력), 퇴계 이황이 선조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길에 오른 날이다. 도산서원에서는 퇴계 선생의 귀향 450주년이 되던 2019년부터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 걷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당시 귀향길을 되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지리학자이자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인 이기봉 박사가 이 길을 처음으로 완주하였다.
이후 이 길을 홀로 걷기도 하고, 때론 함께 걸으며 다섯 번이나 다녀왔으며, 일부 구간은 수없이 걸었다. 누군가는 지겹지 않냐고 왜 그 길만 걷느냐고 묻지만, 이기봉 박사는 일상에 지친 이에게 위로와 휴식을 주는 천국의 길, 해방의 길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공저자인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귀향길에 오를 당시 퇴계 선생과 마침 같은 나이로,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아흐레간 이 길을 걸으며 온몸으로 우리 국토를 호흡하며 인생이 넘쳐났다며 감탄해 마지않는다. 이태호 교수는 어스름한 하늘에 노란 조각달이 처연한 풍경, 걸으며 다가오고 지나치는 봄 강의 아침, 물안개 지는 신비로운 풍광 등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퇴계 선생은 말을 타고 배를 타고 13박 14일간 이 길을 갔지만, 오늘날 지방자치단체에서 길을 잘 닦아놓은 덕분에 우리는 걸어서 9일이면 최종 목적지인 안동 도산서원까지 도착할 수 있다. 이 길은 퇴계 선생의 귀향길이지만 퇴계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걷는 길은 아니다. 육백 리 귀향길은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던 우리 국토 곳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며 걷는 나의 길, 우리의 길이다. 퇴계 선생 덕분에 역사의 길, 휴식의 길이 생긴 셈이다. 육백 리 퇴계길을 걸으며 휴식의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육백 리 귀향길은 퇴계 선생이
고달픈 우리에게 선물해준 위로와 휴식의 길이다!
# 눈부신 국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
매해 음력 3월 4일이면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선생이 경복궁 사정전 앞에서 선조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귀향길을 떠난 날을 기려 13박 14일간 이 길을 따라 함께 걷는 재현 행사를 하고 있다. 2019년 퇴계 귀향 4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이 행사를 위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퇴계 선생의 귀향길을 되살렸는데, 당시 사전답사를 하며 귀향길을 되살린 이기봉 박사는 다섯 차례나 이 길을 완주했다.
이기봉 박사는 재현 행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최적의 길을 찾아냈다. 중간중간 일부 구간을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기간을 단축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8일 만에 완주하느라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다리가 성치 않을 정도로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후 누구나 걷기 적절한 9일 코스를 완성하였다.
하루 종일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무려 9일이나 걸으라니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옛날 사람들은 하루 평균 90리(약 40km)를 걸을 정도로 다들 걷기의 달인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6일이면 갈 거리를 퇴계 선생은 가는 길 곳곳마다 지인을 만나 추억을 나누느라 14일이나 걸린 것이다. 게다가 퇴계 선생의 나이 예순아홉이라 쉬엄쉬엄 간 것 이유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들처럼 걷는다면 모두 초주검이 된다. 하지만 9일이라면 충분히 걸을 만한 거리다. 굳이 9일을 내리 걸을 필요도 없다. 하루만 걸어도 좋고 이틀만 걸어도 좋다. 가다가 집으로 돌아와 다음번에 그 지점으로 찾아가 다시 출발해도 좋다. 주말을 이용해 이틀씩 나누어 걸어도 된다. 마냥 걷다 풍경에 흠뻑 빠져 인근에서 숙박하며 느긋하게 풍경을 즐겨도 좋다. 며칠을 걷든 그 길에서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또다시 찾게 될 것이다.
# 자동차 여행으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감동의 시간
세차게 흘러가는 한강 여울의 소리를 들으며, 이름 모를 풀꽃과 새들의 소리를 친구 삼아 때론 지루하게 때론 황홀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아침 호수 위로 희뿌옇게 피어오른 물안개, 물가의 버드나무 숲가 저 멀리 솟아난 산, 강 한가운데 섬을 가득 채운 갈대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은 눈 호강을 시켜준다. 숲속 오솔길 계곡의 거칠고 맑은 물소리, 나뭇잎 부딪히며 스치는 바람소리는 멋진 친구가 되어 다가온다.
산과 마을, 논과 밭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며 언덕과 고개를 여유롭게 넘나드는 시골길은 때로는 정겹고 때로는 멋지며 때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장관으로 다가온다. 거기에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넓은 사과밭이라도 더해지면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봄이면 하얀 사과꽃이 온 언덕을 눈부신 무릉도원으로 만든다. 이런 풍경은 충주의 마즈막재에서, 단양에서 대재를 넘어 풍기에 이르기까지, 영주 시내에서 도산서원까지 곳곳에서 펼쳐지며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자동차 여행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동이다.
# 퇴계 선생이 우리에게 선물해준 안전한 길
충주 시내 동쪽 마즈막재를 넘으면 안타깝게도 충주호에 옛길이 잠겨 걸어갈 수가 없다. 이 구간은 충주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청풍나루까지 간 다음 청풍고을의 여러 유적을 구경한 후 다시 유람선을 타고 장회나루까지 가면 된다. 유람선을 타면서 다리를 쉬기도 하고 청풍호의 멋진 풍광을 만끽할 수도 있다.
중간중간 잠시 인도가 사라지는 구간이 있는 게 흠이긴 하지만 아주 짧은 구간이니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퇴계 선생이 안전한 귀향길을 절묘하게 만들어주셨다. 이기봉 박사는 만약 퇴계 선생이 서울부터 충주까지 배를 타고 가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서 도시와 산업 개발이 가장 덜 이루어진 지역 중의 하나인 경상북도 동북쪽의 예안 고을 출신이 아니었다면, 안전한 육백 리 귀향길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길을 찾는 이가 많아져 언젠가 충주시와 단양군, 영주시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귀향길을 만들어주길 기대해본다.
우리 땅과 고을 이름에 대한 이기봉 박사의 해박한 지식과 늘 뒤를 돌아보며 셔터를 누르고 저 멀리 먼 산 너머 아름답게 펼쳐지는 능선과 풍광을 스케치한 이태호 교수의 그림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먼 길 가다 혹여 길을 잃을까봐 전체 지도 외에도 복잡한 지역은 상세지도를 덧붙였다.
전 일정을 누군가와 벗 삼아 함께 가도 좋고, 홀로 걸어보는 것도 좋다. 걷다 보면 길가에서 마주치는 꽃과 새, 나무, 물, 산이 걷는 이를 반갑게 맞아준다. 많은 이들이 제주도 올레길을 걷듯, 내륙의 우리 국토를 만끽할 수 있는 육백 리 퇴계길을 걸어보길 희망한다. 퇴계 선생이 선물해준 역사의 길을 걸으며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의 시간을 가지며 그 길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