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사진작가이자 여행가, 에세이스트인 후지와라 신야의 에세이집 『인생의 낮잠 - 사진, 여행, 삶의 또 다른 시선』이 다반에서 출간되었다. 후지와라 신야가 일본의 여성지 『CREA』에 연재했던 여행과 사진에 관한 에세이 36편을 모은 책이다. 일본 각지와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 그리고 유럽으로 이어지는 여행의 자취들은, 사람과 자연을 대하는 그만의 독특한 시선 속에서 삶에 대한 경건하고도 깊이 있는 성찰들을 자극한다.
인연이란 오묘한 끈의 의미를 되새기는 스탬프, 진정한 웃음의 의미를 찾는 눈썹을 가진 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닮은 트림 고양이, 기이한 운명으로 만난 대나무 꽃, 호기심으로 찾아 떠난 고양이 섬, 아련한 추억 속의 섬마을 소녀, 가족의 신화가 되어 버린 난로, 거대한 파도를 기다리는 노인 등 그가 찍고 쓴 사진과 이야기들은 재미와 감동을 넘어 잔잔한 삶의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대의 나그네, 후지와라 신야의 세상 밖 풍경!
여행의 본질은 일상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익숙했던 것들과의 결별을 통해 여행자는 자진해서 이방인이 된다. 터전이 아닌 곳에 스스로 내던져진 자의 불안과 막막함,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 풍경을 향한 설렘은 이방인의 운명이자 특권이다. 시대의 나그네로서 정처 없이 떠돌았던 후지와라 신야, 그가 바라본 독특한 세상 밖 풍경은 그래서 더욱 익숙함에 가려져 있던 일상의 의미와 빛깔을 새로운 시야에서 일깨워 준다. 사람과 풍경을 대하는 그만의 담백하고 사려 깊은 눈길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길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향하고 갈수록 균형을 잃어가는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과 함께 인간적인 것에 대한 향수와 동경을 일깨운다. 이 책에 담긴 에세이들이 독자들에게 은은한 감동과 함께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성찰의 자극을 주는 이유다.
천사의 눈썹을 가진 개의 일화는 덧없는 인생과 웃음의 의미를 잔잔하게 일깨우고, 잘못 배달된 스템프로 인해 한 여성과 우연한 만남을 가지게 된 일화는 우리의 삶을 보이지 않게 감고 있는 인연이란 오묘한 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종군 기자들이 잔혹한 전쟁의 현장 대신 주로 난민의 모습만을 사진에 담게 된 배경에, 퇴색한 기자 정신이 숨어 있다는 지적은 베테랑 사진작가다운 연륜을 느끼게 한다. 고베 대지진의 참혹한 폐허 속에서 셔터 누르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사진작가로서의 사명과 인간적인 연민이 빚어낸 가슴 뭉클한 고뇌의 흔적이다.
대변의 악취를 없애주는 약이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사실도 흥미롭고, 이처럼 자연의 본성을 불결한 것으로 치부하고 배제하려는 지나친 청결주의가 일본인의 육체를 도리어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비판은 매우 날카롭게 들린다. 자연과 문명의 근본적인 불균형을 도외시한 채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향한 조소도 등장한다. 원숭이와 게가 앙숙으로 나오는 전래 동화에 착안해서 거대한 게 모양의 간판을 만들어 원숭이를 퇴치하려 했던 사람들에 관한 일화가 대표적이다.
이 책의 백미는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들다는 대나무 꽃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의 그를 사로잡았다는 이 전설 같은 얘기는 그의 인생을 지배했던 방랑벽의 원천을 암시한다. 수십 년 혹은 백 년에 한 번 잠깐 피고 진다는 대나무 꽃처럼, 평생에 한 번 접하기도 힘든 자연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운 좋게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흥분과 설렘이, 그를 정처 없는 여행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내가 만난 후지와라 신야는 냉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동시에 지닌 세상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신야는 책이 아닌 여행, 그리고 거리의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서 위대한 삶의 드라마를 목격한다고 했다. 철저히 현실에 발을 붙인 그의 글과 사진들은 그래서 활어처럼 펄떡인다. 허공을 맴돌지 않는다. 세상의 위선을 가차 없이 벗겨 내고, 갈기갈기 상처받은 영혼을 낮은 목소리로 위로한다. 죽음에 대한 성찰조차 가슴 두근거리도록 아름답다. 퍼올리고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문장, 문장들. 후지와라 신야를 내 인생의 구루로 받들기로 한 이유다.
-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