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1장 빈곤이란 무엇일까
2장 한국에서 가난한 삶이란
3장 한국에는 빈곤이 얼마나 있나
4장 돈이 없는 것이 빈곤의 전부일까
5장 사람이 가난해지는 까닭
6장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7장 빈곤문화의 실체
8장 노숙인 이야기
9장 하우스푸어와 주거빈곤층
10장 빈곤과 건강불평등
11장 빈곤의 연원, 불안정한 일자리
12장 빈곤을 부추기는 고용불안은 왜 생기는 걸까
13장 세계 제일의 부국, 미국의 빈곤
14장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투표하나
15장 빈곤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빈곤을 보는 눈
신명호
240p

한국 사회 빈곤에 대한 빈곤에 대한 이야기. 빈곤은 항상 동시대 같은 사회의 구성원을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빈곤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볼 때 한국 사회에서는 빈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율)은 15%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1.1%보다 높다. 더 큰 문제는 199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떨어지던 빈곤율이 199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우스푸어 현상이나 만성적인 고용불안의 현실은 이런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우리가 지금 다시 빈곤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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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目次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한국 사회의 깊어지는 빈곤을 이야기하다
한국에서 빈곤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배곯고 옷 못 입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인데, 어디에 빈민이 있냐는 생각에서다. 노동운동가였던 박노해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69억 인구에 비춰보면 국내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다. 아직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빈곤을 너무 협소하게 바라본 것이다. 사람은 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닌데 평균적인 삶의 기준에 한참 미달한 채로 겨우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난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보릿고개를 경험한 노인은 휴대전화가 없어서 괴로워하는 청소년을 보고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말하겠지만, 그런다고 그 청소년의 괴로움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노인 역시 다음 달 방값을 걱정하는 처지라면 결코 자신이 과거에 비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내의 빈곤층에게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배부른 줄 알라고 하는 말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빈곤은 항상 동시대 같은 사회의 구성원을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빈곤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볼 때 한국 사회에서는 빈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율)은 15%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1.1%보다 높다. 더 큰 문제는 199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떨어지던 빈곤율이 199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우스푸어 현상이나 만성적인 고용불안의 현실은 이런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우리가 지금 다시 빈곤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의 빈곤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깨다
이 책의 저자는 대학원 재학 시절, 석사 논문을 쓰러 철거민 정착촌에 들어갔다가 눌러앉아 12년을 살았으며, 거기서 고(故) 제정구 선생 등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도시빈민연구소(한국도시연구소의 전신)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동안 겪어온 빈곤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시각을 이 책에서 일목요연하게 깨고 있다.
먼저 단지 소득이 부족한 것이 빈곤의 전부가 아니라 주거?고용?교육?건강?시민권 및 정치 참여의 기회 등 다양한 차원에서 결핍 상태에 있는 것이 빈곤이라고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에서는 빈곤poverty이라는 용어 대신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수급자가 아니었음에도 불안정한 임금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다 도움을 청할 인적 네트워크도 없어 목숨을 잃고만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이야기는 다차원적인 빈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빈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뿌리 깊은 시각의 역사는 놀랍고 소름끼칠 정도다. “빈민은 그림의 음영과도 같다. 그들은 그림의 대비 효과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다”(필리프 에케), “굶주림은 부드럽고 조용하지만 끊임없는 압력을 가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다”(조지프 타운센드), “다른 방도가 있다면 어느 누구도 가난해지기를 원치 않으며 어느 누구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다. (…) 이러한 결핍이 없다면 어느 누가 고생하면서 노동하려고 할 것인가”(버나드 맨더빌).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18세기 사상가들의 빈곤에 대한 이런 관점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활습관 및 가치체계를 뜻하는 ‘빈곤문화론’에 대한 논쟁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일각을 보여준다. 빈곤문화 연구에 따르면 빈곤층들은 대체로 알코올중독자가 많고,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많다. 이런 특성이 나타나는 것은 이들이 처한 ‘빈곤’이라는 처지 때문인데, 어떤 이들은 이들의 생활습성을 들어 ‘빈곤은 빈민들 자신의 책임이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구조에 있는데, 오히려 사회구조의 희생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저자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빈곤에 대한 이런 편견이 하루 빨리 깨져야 한다고 말하며,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빈곤은 곧 정치의 문제
빈곤은 정의하는 것부터가 정치적 결정이다. 예컨대 어떤 사회에서는 소득이 중위소득의 50% 이하 소득자를 빈곤층으로 분류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회에서는 30% 이하만을 빈곤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지원액(예를 들면 최저생계비)의 액수가 얼마일지도 나라마다 다 다를 것이다. 이렇듯 누구를 빈곤층을 규정하고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지원을 할지 정하는 것은 모두 다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사안이다.
누구를 빈민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얼마만큼을 지원할 것인가에 관한 판단에는 절대 불변의 잣대가 있는 게 아니다. 국정을 맡은 정치 세력이 어떤 계층, 어떤 집단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가, 또 그러한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얼마만큼 의식하는가에 따라 결정은 달라진다. 현재의 최저생계비 제도를 개선해서 선진국처럼 상대적 개념의 빈곤선을 도입하자는 논의가 수년 전부터 있었음에도 이제껏 한발짝도 진전이 없는 건, 결국 ‘빈곤층을 위해 돈을 더 쓰고 싶지 않다’는 정치 세력들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본문 49쪽
빈곤은 더 넓은 차원에서도 정치적인 문제이다. 최저임금이나 실업연금과 같은 사회안전망의 문제, 고용 없는 성장이 진행되고 소득양극화가 발생하는 경제의 문제를 간과하고서는 빈곤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이 책의 후반부에 빈곤을 발생시키는 경제 구조의 문제와 가난한 이들의 정치 참여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룬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이 있듯 빈곤은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체하나
4.0
빈곤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이다. 일차적으로 경제의 체제와 구조에서 비롯되는 경제영역의 문제이지만, 바로 그 경제는 정치의 영향을 받고 정치세력들의 힘겨루기로 좌우된다. 정부는 각종 법령에 의한 규제와 재정 및 조세 지출을 통해서 경제활동을 하고 시장에 개입하는데, 이러한 정부 경제활동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이창현
4.0
하면된다는 희망의 이데올로기는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복돋는 효과가 있는 듯 보여도 동시에 낮은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노력하지 않는자로 단죄하는 낙인이 되기도 한다. 삶의 과정을 놓고 인간에 관한 보편적 설명을 하려면 보다 신중해야 한다.
하느
4.5
아직도 실패한 사람들이 노력 부족, 성공한 자신들이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람.
이혜원
4.5
1 "우와 10조원. 정말 대단하지요? 만약 우리나라에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이 서너 개만 더 있어도 우리 경제가 확 달라질텐데, 그쵸?" 그가 말하는 '우리 경제'란 말의 뉘앙스에는 자신의 살림살이도 포함되는 듯했다.그는 여전히 동네 만석꾼의 집에 쌀이 넘쳐나면 그 일부가 아랫사람들의 품삯이며 남은 잔치음식의 형태로 다른 이들의 입으로 들어가던 옛날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대기업들의 수출이 호황을 누리고 천문학적 규모의 외화가 벌려 와도 어째서 '고용 없는 성장'이 일어나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2 그런데 재미있게도 최저생계비 수준에 매우 만족해하는 참여자가 딱 한 명 있었다. 이 행사에 참여했던 한나라당 국회의원 차명진 씨는 자기 홈페이지에 "하루 체험비 6300원으로 미츠볼 한 봉지 970원, 야채참치 한 캔에 970원, 쌀국수에 970원, 여기에 쌀 한 컵 800원, 다 합해서 3710원에 세 끼를 해결했다"고 적으면서 "점심과 저녁은 미트볼과 참치캔을 얹어서 먹었고 , 아침 식사는 쌀국수로 가뿐하게 때웠다. 밤에 황도를 먹으면서 책까지 읽었으니 이 정도면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러했다. " 최저생계비로 하루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인터넷으로 값이 싼 식자재 정보도 얻었고, 내 발로 몇 번씩 알뜰구매를 위해 돌아다녀 식품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최저생계비로 생활하기의 답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 결국 차 의원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황제'라는 표현을 삭제했지만, "최저생계비로 사는 분들께 좋은 정보를 주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 정답"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알뜰구매가 답'이라는 그의 결론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입증한 사실이라기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바를 주장하기 위해 실험과정을 조작한 황우석 식의 발표에 가깝지 않나 싶다. 3 사실 최저생계비를 산정하는 이른바 전문가들은 전혀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정부 고위공무원과 대학교수 등 학자들이 모여서 결정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난하지 않은 그들이 속속들이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복잡하고 까다로운 논의 과정에 빈민 당사자를 참여시키는 일도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겠으나, 그로 인해 당사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비껴갈 개연성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 그들 전문가가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 원칙이란 게 있을 수 없으니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4 우리는 여기서 현재의 빈곤선 선정방식이 보통 사람들의 평균소득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앞 장에서 얘기했듯이,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를 가난이라 한다면 살림살이가 넉넉한가 여부는 다수를 이루는 보통 사람들의 소득수준을 고려해서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가지고 판단하는 편이 타당하다. 그래서 흔히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일찍이 그 나라 국민의 표준 소득(중위소득)을 조사해서 그것의 50% 내지 60% 수준을 빈곤선으로 정하는 상대적 빈곤 개념을 채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나 유럽연합에 속한 나라들은 빈곤층을 가려내기 위해서 각종 생필품의 구입비용을 계산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나라 국민의 표준소득인 중위소득의 50%를 빈곤 기준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러니까 본인의 소득이 낮아야 하는 동시에, 본인을 부양해줄 부모나 자녀 등이 없어야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다. 이 말은 빈곤에 처한 사람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해줄 책임은 일차적으로 직계가족이나 배우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또,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가격이 5400만 원 이상인 집이나 배기량 2000cc 이상 짜리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으면 아무리 소득이 낮아도 수급자가 될 수 없다.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사람을 전부 가려내면 약300만명 가량(전체 인구의 6%) 되는데, 위와 같이 여러 조건을 붙여서 실제로 생계급여를 받게 되는 사람을 추려내면 약 160만 명 정도다. (...) 생계급여 지원 대상을 추리기 위해 마련된 위의 몇 가지 조건들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예컨대, 수십억 원대 재산을 가진 어떤 패륜아가 늙은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쪽방에서 시름시름 앓도록 방치하고 있다면? 그런 노인에게도 국가가 생계비를 지원해야 옳을까?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정부가 못된 아들을 둔 이 가난한 어머니에게 생계급여를 먼저 주고 나중에 구상권이라는 것을 행사해서 부자 아들로부터 그 돈을 받아내는 제도가 있으니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도덕적 해이를 우려해서 만든 이 제도적 장치가 억울한 피해자들을 양산한다는 데 있다. (...) 사람들은 흔히 '직계혈족이나 배우자면 어떻게든 가난한 가족을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쉽게 말하지만, 가족이면서도 도울 수 없는 딱한 사연들이 구구절절이 존재한다.그래서 오죽하면 한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가 장애인 아들의 수급권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일어났겠는가.(...)또 부양의무자에 대한 재조사 과정에서 자녀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그동안 받던 생계비 지원이 중단되게 되자 이를 비관해서 세상을 하직하는 노인들의 슬픈 사연도 있다.(이 기준은 2021년 현재 변화가 있지 않나 싶은데?-베낀 이) (...)어떤 기준을 먼저 세우고 그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총예산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빈민 지원 예산의 규모를 우선 정해놓고 그것으로 나누어줄 수 있는 대상자의 수를 대략 결정하고서 그만큼의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걸러내야 할까 정하는 방식이다. 몸에 맞춰 옷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먼저 작은 옷을 앞에 놓고 그 옷에 맞춰 몸을 줄이는 격이라고나 할까. (...) 가족들에게 1차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제도를 두고 정부는 우리의 전통적인 효의 윤리에 근거한 불가피한 원칙이라고 강변하지만, 이는 빈곤 예산을 줄여야 하는 정치적 필요에서 나온 구실일 뿐이다. 이미 유교적 가족윤리가 무너지기 시작한 지 오래고, 부양의무자 기준을 없앤다고 충효사상이 더 약해질 것도 없다. 게다가 그런 원칙이 없는 서구 복지국가의 부모-자식 관계가 우리보다 특별히 나빠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경제난으로 돈벌이를 제대로 못하는 부모와 자식들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가족윤리를 들이대며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무리한 정책이 갖가지 비극적인 사건들을 불러오고 있다. 6 이렇듯 어떤 사회에서 빈곤층을 정의하고 그들을 위해 특별한 지원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은 겉으로는 매우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정치 행위에 좌우된다. (...) 누구를 빈민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얼마만큼을 지원할 것인가에 관한 판단에는 절대 불변의 잣대가 있는 게 아니다. 국정을 맡은 정치 세력이 어떤 계층, 어떤 집단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가, 또 그러한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얼마만큼 의식하는가에 따라 결정은 달라진다. 7 분명 당시에도 가난한 이들이 없진 않았지만, 전반적 사회 분위기는 우리나라가 빈곤의 시대를 이미 건너왔고 머지않아 잘사는 나라 대열에 낄 것이라는 낙관이 대세였다. 빈곤층은 자본주의 사회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 소수의 불운한 집단으로 인식되었다.(...)앞으로도 세계경제의 불황은 장기화될 전망이고 가뜩이나 산업구조가 취약한 우리나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좀처럼 찾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경제는 저성장 궤도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인구의 빠른 고령화로 경상수지 역시 악화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현재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빈곤은 운이 나쁜 일부 사람들의 문제라고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중간계층 일부가 서서히 밑으로 떨어지는 하강 현상이 십수 년 전부터 나타나고 있고, 저소득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 취업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 빈곤의 대물림, 이런 단어들은 다음 세대에 대한 전망마저 어둡게 하고 있다. 8 경제적 어려움은 때로 가정불화의 불씨가 돼, 가족이 해체되거나 자녀들이 부모의 보살핌을 못 받고 방치되는 결과를 낳는다. 정서적,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학교 성적은 자꾸 떨어질 수밖에 없다. (...) 빈곤층 아이들은 수업이 잘 이해 안 되는 데다 선생님마저 눈길을 주지 않는 학교가 재미있을 리 없다. 자연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그러다 사고라도 쳐서 이른바 문제 학생이 되면 학교와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그리고 결국 그들 중 일부는 중도에 학업을 중단한다. 우리나라의 교육 관련 통계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가정, 즉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이 부모의 소득과 학력이 낮은 가정의 아이들에 비해서 학업성취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얻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우수한 학력과 학벌은 결국 중산층 아이들의 차지가 되고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소득이 높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는 데 갈수록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9 문득 가난을 몸으로 겪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 생활비의 반만 남기고 나머지를 없앴다.(...) 아무튼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3주를 넘게 버텼는데, 계산이 치밀하지 않았던 탓인지 한 달 기한을 며칠 앞두고 돈이 모두 떨어졌다. 이틀은 물만 마시며 버티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장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전화로 구원을 청했다. 그날 저녁 배불리 포식을 하면서, 내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이 곧 가난을 아님을 깨달았다. 돈이 없는 나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쳐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가난한 게 아니었다. 2011년 1월, 최고은이라는 32살의 시나리오 작가가 숨진 채 이웃 주민에게 발견되었다. (...) 그녀라고 처음부터 도움을 줄 만한 친구와 지인들이 없었을까마는 끼니와 병치레를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곤궁함이 오래동안 지속되면서 아마 도움을 주던 이들과의 관계도 점차 옅어지고 소원해졌을 터이다. 짐작컨대, 지인들의 형편 역시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을 수 있고, 무엇보다 계속 그들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그녀에겐 죽음보다 힘들었을지 모른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도안 신세 지던 이웃에게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밥과 김치 좀 달라고 했을까. (...) 세월이 흐르면서 생활의 어려움이 가중되면 가뜩이나 빈약한, 가난한 사람의 인간관계는 자꾸 줄어든다. 자신이 갑자기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이 되어주고 자원을 변통해줄 인적 네트워크가 약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중산층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두텁고 튼튼하다. 혈연, 학연, 직업 세계의 선후배로 맺어진 이들의 인간관계는 자연히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고학력의 전문직, 관리직 사람들로 구성돼 있으니 온갖 형태의 자원을 끌어 쓸 수가 있다. 서민들이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몹쓸 관행도 결국 권력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끈의 있고 없음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10 어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비열한 인간 말종으로 묘사된다 싶으면, 곧장 의사협회나 변호사협회가 들고 일어나 제작진에게 사과와 시정을 요구한다. 자신들의 직업적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파출부나 청소부의 배역은 흔히 무식하고 남의 물건을 탐하는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그려져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힘이 약하고 조직도 없기 때문이다. 동업자 조직이 없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 개개인의 인적자원을 살펴보더라도 어려울 때 힘이 될 만한 관계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처럼 빈곤은 주거, 건강, 교육, 인적자원 내지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한결같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으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가난한 사람은 단지 소득만 낮은 것이 아니다. (...) 여러 조건들의 결핍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심리적으로도 우울감과 무력감이 내면화되기 쉽다. 한 가지 불행은 다른 종류의 불행을 부르고 한 가지 고통을 겪는 사람이 다른 종류의 고통들도 함께 받는다. 그런 점에서 빈곤은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이다. "가난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장애"라는 드라마 주인공의 말은 삶의 여러 차원을 관통하고 있는 가난이라는 질곡의 속성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빈곤이란 용어 대신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회적 배제(-소셜 익스클루젼 영타생략)라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1 그렇지만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입증된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한 이야기라고 해서 입에 올리기를 삼가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마치 사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인 양 말하기를 좋아한다. 어떤 부유해 보이는 부인이 한 노점상 아줌마의 귀에 걸린 귀걸이를 보면서 혼잣말처럼 하던 말이 기억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악착같이 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웬 놈의 귀걸이인구. 저러니 만날 저 모양으로 살지...."하며 혀를 끌끌 찼다. 사실 노점상 아줌마가 달고 있는 귀걸이는 누가 봐도 기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싸구려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 부인의 생각에는 귀걸이는 생계와 무관한 사치품이고, 그런 데 신경과 돈을 쓴다는 것은 생업에 전심전력하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만약 당사자인 노점상 아줌마가 들었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이야기이다. 귀걸이 =사치품=불성실=가난 이라는 도식은 장사를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 서 있어야 하는 노점상 아줌마로서는 참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편견이다. (...) 특히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위의 부인과 같이 말하는 버릇이 있다. 자신이 만난 몇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빈곤의 원인이 당사자에게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오류라는 자의식도 없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그렇게 쌓인 세속의 담론들은 관습화된 '지식'이 되어 빈곤과 관련된 정책을 다룰 때마다 '여론'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빈곤의 역사를 파헤친 역사학자 브로니슬라프 게레멕은 빈민에게 부정적 측면이 있는가의 문제는 사회적 현실을 분석해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서, 빈곤의 원인이 당사자의 게으른 습관 때문인지 아닌지에 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빈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일종의 집단심성으로서 근대 문명의 특징 중 하나로 깊이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12 "굶주림은 부드럽고 조용하지만 끊임없는 압력을 가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다"(조지프 타운젠트)"이러한 결핍이 없다면 어느 누가 고생하면서 노동하려고 할 것인가"(버나드 맨더빌) 18세기를 살았던 각기 다른 사상가들이 피력한 견해이다. (...) 결핍이 근로의욕을 불러온다는 명제는 분명 논리적으로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따라서 결핍의 상태, 즉 빈곤이 무한정 확대되고 심화되어도 좋은가'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 빈곤이 줄어들기는커녕, 대부분의 현대사회에서 빈곤은 자꾸 확장되거나 구조화되고 있다. 어느 사회건 빈곤이 사라져서 구성원들이 노동 의욕을 상실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누군가는 북유럽의 수준 높은 복지제도가 경쟁적인 삶의 의욕을 낮추고 자살률을 높였다는 식의 주장을 할지 모르나 그것도 사실과 거리가 먼 얘기다. 결국 사람들을 부지런히 노동하게끔 하기 위해서 빈곤이 필요하다는 언설은, '나는 빈곤문제에 관심이 없다'거나 '어차피 해결 불가능한 빈곤문제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거나 혹은 '가난은 당사자들의 잘못 때문이니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할 이유가 없다'는 등의 생각을 포장하기 위한 논리인 셈이다. 13 "사람들은 빈민의 고통보다 그들의 불법 행위를 더 잘 인식한다. 이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을 감소시킨다. 빈민들은 그들과 유사한 다른 사람들처럼 기아와 추위로 죽는다.그러나 부자들은 그들이 구걸하고 훔치거나 약탈하는 것만을 본다." 19세기 파리에서는 빈민들을 도와주는 제도가 결국 노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제도에 기생하게끔 만들고 범죄에 물들게 한다는 주장이 진실처럼 통용되었다. 당시의 통계 자료를 분석해보면 이런 생각이 틀렸음을 명백히 알 수 있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사실로 믿었다. 그리하여 빈관과 가난한 사람에 관해서는 필연적으로 선입관과 편견이 존재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달로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을 일방적 구휼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감금하고 억압하지 않는다. 그러나 빈민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선입관과 편견의 관성은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14 학력이 높은 사람에게 많은 봉급을 주는 것은 능력을 실제로 확인해서가 아니라, 그의 잠재능력이 저학력자보다 높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을 선발하기는 해야겠는데 달리 판단할 기준이 없으니 지원자의 교육수준을 가지고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면 회사 업무에서도 졸업장이나 자격증은 사람을 선발하고 그 사람의 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 어쨌든 노동에 대한 보상이 학력에 의해 좌우되는 한, 더 높은 임금과 선호하는 직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자신들의 학력을 높이려는 경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 빈곤 가정의 자녀가 진정 교육을 통해 가난을 벗어나려면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학력수준의 향상을 꾀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 반대되는 불가능한 가정일 뿐이다. 모든 산업사회에서 학력수준은 빠르게 상승했고, 그중에서도 한국은 그 어떤 사회보다 빠른 속도로 학력의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어왔다. 1960년대 미국은 빈곤 가정 자녀들에 대한 교육과 기술 훈련 프로그램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했지만 결국 빈곤 퇴치에 실패했다. 노동시장의 서열 체계 속에서 가난한 이들의 상대적 위치가 전혀 높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우등생들 가운데 가난한 집 출신이 많았던 것은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의 당연한 확률적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가난했기 때문에 공부를 잘했던 게 아니라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자연히 그중 하나였을 따름이다. 물론 어린 시절의 빈곤이 입신양명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이 간혹 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나 용이 된 일화의 주역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기 위해 공부에 매달렸다"거나 "하늘같은 판사의 모습이 멋져 보여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책을 집어 들었다"는 식의 눈물겨운 체험담을 들려준다. 그리고 이런 출세의 미담들은 눈덩이처럼 구르고 서로 합쳐져 마침내 '아무리 가난해도 열심히 공부하면 반드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신앙의 거탑이 된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희망의 이데올로기는 낮은 곳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는 효과가 있는 듯 보여도, 동시에 낮은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노력하지 않은 자'로 단죄하는 낙인이 되기도 한다. 입신에 성공한 주인공들은 가리키면서 "저들처럼"을 외치는 사람들은, 그 주인공이 동시대의 수많은 가난한 또래집단 가운데 단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냥 불우하다고 표현하는 상황적 조건이 실은 무수하고 다양한 요인들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주인공이 처한 빈곤의 상환은 그의 의욕을 철저히 파괴할 정도로 가혹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성공에 이르는 신화의 방정식은 우리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변수들의 복잡한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가난이 학업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가난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할 만한 다른 조건들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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