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의 대가, 라틴아메리카 붐 소설의 선두
꼬르따사르 환상문학을 망라한 중단편선
빛나는 상상력으로 가르시아 마르께스, 바르가스 요사 등과 함께 라틴아메리카 붐 소설을 주도했으며,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로 꼽히는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중단편선 『드러누운 밤』(창비세계문학39)이 발간되었다. 꼬르따사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세계(multiverse)라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모호한 텍스트, 현실과 비현실의 혼융 등을 특징으로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환상문학을 구축하여 문단은 물론 독자들로부터도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작가 스스로 ‘환상성이 거처하는 집’이라 묘사한 바 있는 단편소설에서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었는데, 모호함과 구멍투성이의 세계를 환상적이고도 견고한 건축물로 축조해내는 그의 단편들을 두고 호르헤 보르헤스는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조차 훌륭하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드러누운 밤』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첫 출간되는 소설집으로, 그간 몇몇 선집에 극히 일부만이 소개되었을 뿐인 꼬르따사르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조망하게 해주는 대표작들을 모두 담았다. 이딸리아 거장 미껠란젤로 안또니오니가 「확대」(Blow-up)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여 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 있는 「악마의 침」, 보르헤스가 주관하던 잡지에 발표하며 단편소설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점거당한 집」, 작가의 유일한 중편소설로 재즈음악가 찰리 파커의 삶을 모티프로 삼은 「추적자」 등 꼬르따사르가 보여준 독보적인 상상력의 힘을 두루 음미하게 하는 15편의 중단편을 수록했다.
환상성이 거처하는 집, 구멍투성이의 세계
“다 거짓말이다. 나는 로드 꿈을 꾸었을 뿐이다. 구태의연한 이미지로 꿈에서 로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로드라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서 누군가 나를 때리는데, 그 사람이 남자인지, 화가 난 엄마인지, 아니면 고독인지 알 길이 없다.”(「먼 곳의 여자」, 42~43면)
꼬르따사르는 당대에 이미 단편소설의 대가로서 동료 문인들이나 평단으로부터 이론 없는 정평을 얻었는데, 그가 달성한 문학적 견고함은 논리와 질서로 빈틈없이 짜인 하나의 정연하고 완결적인 세계를 재현해내는 데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작품들은 우연성과 예외성으로 가득 찬 세계, 즉 우리가 살아가는 그대로의 구멍 난 세계를 묘파하며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부수적인 정보는 물론이고, 작품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정보들마저 모호하게 제시되고 독자는 읽어나갈수록 점점 더 큰 혼란과 불안에 맞닥트리게 된다. 이를테면 「시내버스」에서는 끌라라라는 인물이 시내버스에서 겪는 상황을 그리지만, 정작 끌라라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인물에 대한 설명과 같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실마리들은 물론이고 핵심조차 의도적인 공백으로 남는데, 끌라라는 시내버스 안에서 다른 승객들이 가하는 무언의 압박 아래서 공포에 가까운 불안을 느끼지만, 작중 인물들이 왜 그러는지, 문제 상황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끝끝내 명확히 알 수 없다. 「남부고속도로」에서는 빠리를 향하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초유의 교통 체증에 가로막혀 도로에 머물게 되는데, 대체 얼마 동안 길에 머문 것인지, 과연 빠리를 향하고 있는 것은 맞는지, 끝으로 갈수록 납득할 만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해했다고 믿던 것들마저 흔들리고 마는 아찔한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이같은 의도적인 서술상의 빈틈은 한통의 편지 형식으로 씌어진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빠리로 떠난 한 여성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 편지의 발신인은 내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별 같은 기초적인 정보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악마의 침」을 읽는 이들은 심지어 화자가 누구인지, 작품 속 시공간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도 확신이 있었지. 그래서 내 속이 뒤집어진 거야.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야. 무엇을 확신했을까? (…) 조금만 주목하고 조금만 느끼고 조금만 침묵하면 수많은 구멍을 발견할 수 있는데, 문에도 침대에도 구멍이 나 있고, 손도 신문도 시간도 공기도 그러한데. 모든 것에 구멍이 가득하고, 모든 것이 스펀지 같으며, 모든 게 스스로를 걸러내는 여과기 같은데……”(「추적자」, 294면)
독자는 교묘하게 감춰지고 산발적으로 드러나는 정보들을 나름으로 읽어내며 한가지 답을 찾을 수는 있으나, 정답이라는 확신은 영영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구체적인 정보와 확실한 의미로 이루어진 텍스트에서 벗어나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세계를 받아들여보라고, 스펀지처럼 구멍이 가득한 세계를 주목하고 느끼고 발견해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이것이 꼬르따사르가 독자에게 경험하고 나아가 즐겨보라고 권하고픈 세계의 ‘현실’일 것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는
“그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깨어나지 않을 것이며, 지금 깨어 있으며, 경이로운 꿈은 바로 그 꿈, 꿈이란 게 그러하듯이, 터무니없는 그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드러누운 밤」, 109면)
무엇보다 꼬르따사르 작품에서 환상성의 열쇠는 현실과 비현실의 뒤섞임에 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현실은 점점 약해지고 비현실은 점점 강해진다. 이야기 초반에 모호함은 수용할 수 있거나 뚜렷하지 않은 정도에 그치지만 갈수록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계선은 무너지고, 말도 안되는 일이 시작”된다.(「불 중의 불」, 246면) 문득 내가 수족관 속 아숄로뜰이거나(「아숄로뜰」) 부다뻬스뜨의 매 맞는 여자 거지이거나(「먼 곳의 여자」) “꿈이라는 무한한 거짓말”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이제 그속에서 깨어 있는 채로 희생공물이 되어 제단에 누워 있거나(「드러누운 밤」) 하는 비현실이 표면으로 서서히 올라오며 현실에 틈입한다.
이렇게 현실을 비집고 들어온 비현실은 종국에는 현실을 압도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적 요소들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 꼬르따사르가 보여준 독특한 환상성은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이 혼융되는 상태, 인식론적으로 모호한 상태에서 발생한다. 대개의 소설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개연성에서 출발하여, ‘그럴듯하다’는 개연성으로, 마침내 ‘그래야 한다’는 필연성으로 마무리된다고 할 때, 꼬르따사르의 작품들은 이러한 순서를 거꾸로 밟아나간다. 그리하여 읽는 이에게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세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식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인다.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 너머의 어떤 순간에 있다
“설명은 쉽지만, 사실 진정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쉬운 거야. 진정한 설명이란, 간단히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야.”(「추적자」, 270면)
환상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꼬르따사르 자신은 ‘재미’라고 답했다. 단편소설은 그 안에 본질적인 의도가 있다거나 지적인 탐구라거나 메시지를 전한다거나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평자들은 꼬르따사르의 적극적인 사회참여 활동과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상황에 비추어 그의 작품을 정치사회적 알레고리로 해석하기도 하고, 문학적 실험을 마음껏 펼친 『팔방놀이』 같은 작품들을 보며 형이상학적 탐구나 지적인 모색 과정으로서 접근하기도 한다. 이같은 여러가지 시각은 모두 타당한 면이 있고, 뛰어난 작품들이 으레 그러하듯 꼬르따사르의 환상문학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과 반응이 있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 스스로 말하듯 이들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문학적 재미를 선사한다는 데 있다. 쥘 베른이 들려주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열렬히 좋아하던 내성적인 소년이 푹 빠져 있던 어떤 세계가 “단어도 아니요, 환영도 아니”며 “수많은 단어로 분해된 이미지” 같은 것으로,(「비밀 병기」, 1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