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선禪에 대한 치열한 사유의 기록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 선불교를 말하다!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출간!
철학자 이진경이 선불교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한 기록이다. 지은이는 철학자의 눈으로 본 불법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문을 던진다.
“내가 선사들의 언행을 들어 하고 싶은 것은 선이 갖는 매혹의 힘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 매혹의 이유를 살짝이나마 드러내어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 매혹의 힘에 좀 더 쉽게 말려들게 하고 싶다. 이를 통해 선승들이, 아니 부처가 가르치고자 한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도록 촉발하고 싶다.”
지은이는 그저 짖기만 하는 개는 부처가 아니라 로봇이라고 표현하며 변화된 조건에 맞추어 자신을 바꿀 수 있어야 불성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하물며 인간은 어떠할까.
“자려고 누워서 낮에 싸운 친구 생각을 한다면 아직 불성이 작용한 게 아니다. 무엇을 하다가든 잠잘 때는 잠자고 밥 먹을 땐 밥 먹는 것, 그게 바로 제대로된 불성의 작용이다. 내가 만났다고 믿는 부처는 대부분 부처가 아니다. 그러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가야 한다. 그래도 부처는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끊임없이 죽여야 한다. 죽일 때마다 가능해지는 ‘넘어섬’이, 그 ‘넘어섬’의 경험 자체가 바로 부처와의 만남이다. 그렇게 끝없이 넘어서며 가는 길(道) 자체가 부처이다.”
철학자가 바라본 매혹적인 선禪의 세계
지은이 이진경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글쓰기란 자신을 매혹시켰던 알 수 없는 힘에 대해 쓰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쓰면서 조금이나마 그 힘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벽암록≫으로 촉발된 지은이의 호기심은 다양한 선어록을 접하며 철학하는 길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쉽게 떨칠 수 없다. 강하게 휘말려들 정도로 매력적인 선禪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지은이는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이 ‘경악스런’ 사건이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그건 이 세상을 철학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인연되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이해하고, 쓸 수 없었던 것을 쓰게 되는 일. 그것은 오늘의 내가 어제와는 다른 나이고, 내일의 나는 오늘과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경악스런’ 사건, 동시에 너무나 매혹적인 사건인 것이다.
막연한 정답찾기에 빠진 세상에서
나만의 답을 구하는 경험
“나는 여전히 내가 가진 식견을 알아보고 깨어줄 분을 만나기를 바라지만, 보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던지는 저 ‘일반적인’ 방할에서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그것은 그분들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말들이다. 아니, 나도 하려고만 하면 누구에게든 해줄 수 있는 말이다. 이는 선이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 아닐까. 공안으로 전해오는 선사들의 언행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타당한 ‘일반적인 가르침’의 말씀이 아니다. 만나는 학인들의 그때마다 다른 상태를 포착하여 그의 식견을 깨주기에 적합한 언행을 날리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때문에 선사들의 질문, 이를 테면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하는 말에 상반되는 답이 나온다고 말한다. “똑같은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때론 미혹이 되다가 때론 깨달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던지는 항상 올바른 대답은 누구의 식견도 깨주지 못한다.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이 했던 말조차 ‘사구死句’라는 생각에 뒤엎고 깨부수고 하지 않았던가.”
부처가 말하는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
당신이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
철학자 이진경이 깨달은 것은 선禪의 언행이 당송 시대의 케케묵은 화석이 아니라 지금 21세기 연기적 조건에서 다시 힘을 얻고 작동하게 되는 위대한 경험이다. 각자 처해 있는 조건에서 각자의 언어와 섞여 새로운 언행을 만들며 재탄생하는 엄청난 경험이다. 그러한 경험으로 우리의 세상이 좀 더 평온하고 즐거운 것이 되었으면 하는 지식인의 원願이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정답 같은 행복을 찾기보다는 자신을 바로 보고 세상을 바로 보자는 따뜻한 손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