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실로 부끄러운 고백이어서
저는 단 한 번밖에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가만히 들어주세요”
1983년생 여성인 ‘나’와 1959년생 ‘엄마’의 몸에 얽힌 기억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고백을 다룬 현대문학 핀 소설선 44 『몸과 여자들』이 연작소설집 『몸과 고백들』로 외연과 사유를 확장하여 돌아왔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출간되자마자 “문제적 소설”로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중편소설 「몸과 여자들」을 비롯, 월간 『현대문학』에 실린 세 편의 중·단편과 미공개 단편 「몸과 금기들」을 함께 엮은 이번 신작은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양태의 섹슈얼리티(‘남성도 여성도 선택하고 싶지 않은’ 논-바이너리, 동성애, 양성애, 범성애, 무성애 등)를 다루며,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넘어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에까지 나아간다. 흔들리고 방황하면서도 한 걸음씩 내딛는 ‘몸’의 여정 속에서 비로소 열리는 “해방의 감각”. “오로지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터져 나온 강렬한 고백들이 담긴 소설이다.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조차 기어코 나아가는 굳센 발걸음
공감을 넘어 문제의식으로, 성별을 넘어 ‘나 자신’으로
마침내 ‘몸’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넘어서며 횡단하는 섹슈얼리티의 자유
작가 패티 스미스가 “나는 글을 왜 쓰는가?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라고 말했듯 이서수의 인물들도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고백을 이어간다. 민가경이 작품 해설에서 언급했듯, 이서수는 그동안 남성-여성, 이성애라는 “단순한 도식”이 “강제 점유해온 몸‘들’의 역사”에 “이채로운 생명과 사랑의 고백‘들’을 덧칠”한다.
이 연작소설 탄생의 마중물이기도 한 중편소설 「몸과 여자들」이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어야 했던 곤경의 기억과 폭력의 역사를 반추하며 ‘공감’이라는 익숙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면 『몸과 고백들』은 더 단단하고 깊어진 사유로 여성과 남성, 마지막으로 ‘몸’이라는 최후의 물리적 보루까지 넘어서 자유롭게 횡단하는 섹슈얼리티의 ‘무경계 지대’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무경계 지대에서 이서수의 인물들은 생물학적 성性,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gender를 초월하고, 마침내 ‘인간’이라는 종種의 차원까지 초월하며 한층 더 새롭고 다채로운 빛깔로 피어난다.
“태양의 성별이 무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저에겐 그저 태양이었습니다”(「몸과 무경계 지대」). “성별과 나이 등을 사회적 기준에 맞춰 분류하거나 정의하는 일에서 멀어진 (……) 저는 버섯인간이었고, 그건 혼종의 상태를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몸과 비밀들」) 이렇듯 이서수의 시선은 ‘성별’이라는 단순하고 폭력적인 ‘선 긋기’를 넘어 ‘태양’처럼 모든 것을 비추고 “존재 그 자체를 느끼고 싶다”고 애써 털어놓은 절박한 고백에는 “이미 네 안에 너 같은 사람의 우주가 다 들어 있어. 그걸 알면 되는 거야.”(「몸과 우리들」)라고 다독인다. 마침내 이서수의 인물들은 자연과 하나로 연결되어 ‘혼종’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몸’이라는 거대한 자연과 우주를 자유로이 횡단하며 모든 경계를 지워나가는 것이다.
‘공감’을 넘어서 ‘문제의식’으로 향하는,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조차 기어이 나아가는 발걸음. 그것이 바로 작가 이서수가 가진 저력이다.
단 한 번, 단 하나뿐인 고백을 당신에게 건넵니다
‘나’의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의 이야기를 만드는 고백과 경청의 연대
『몸과 고백들』에 등장하는 ‘고백자’들은 다양한 정체성만큼이나 개성적이고 가지각색이다. 그중 「몸과 우리들」에 등장하는 ‘유미지’는 같은 반 동급생인 ‘류은하’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며 자신은 남자도 여자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영화 <동방불패>의 주인공 임청하를 동경하는 류은하 역시 <동방불패>의 무림기서인 『규화보전』을 언급하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싶다고 응한다. 그들은 내밀한 고백을 통해 친구가 되고 고백을 주고받음으로써 ‘나’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것을 감각한다.
‘고백’이 성립되려면 그것을 들어줄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이서수는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몸과 고백들』은 “실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가만히 들어”달라는 말로 첫 문장을 시작한다. 부끄러움을 딛고 소리 내어 말한 그것을 누군가가 “경청”할 때 ‘나’의 이야기는 물결처럼 번지고 공명하며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고백과 경청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 세계가 “포섭할 수 없”는 “이채로운 생명”들은 새롭고 자유로운 ‘몸’을 얻는다.
이제는 이서수가 기꺼이 열어젖힌 고백의 장에서 ‘단 한 번뿐인 고백’을 “경청”할 시간이다.
★작품해설
모든 형태의 고백‘들’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발화자에 의해 직접 수행됨으로서 발화자 자신을 가장 먼저 위로해왔다. 그것이 애초에 겨냥했던 것은 진실도 아니요, 인정의 쟁취도 아니요, 단일한 지배 기반을 찾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고백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기 ‘안’의 이야기를 자기 ‘바깥’에 스스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니 자꾸만 더듬거리고, 주저하며, 중단되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군가의 고백 앞에 우리의 행위와 소리 일체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니던가. 고백은 결국 누군가와의 연결을, 단지 당신의 상관을 필요로 한다. 특히 잠자코 경청하는 일이 ‘네 말이 맞다’는 신용을 상대에게 보태주는 일이라면, 그리하여 경청되는 사건이 어떤 목소리에 권력을 덧대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이 고백들은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머잖아 정치적인 급진화의 형태로 도래할지 모를─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침묵해온 몸‘들’의 재배치라는 당면 과제 앞에서 이서수는 경청의 장을 여는 일로 자기 몫을 넉넉히 보탰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겐 무엇이 남았을까.
그건 아마 이런 것들이겠다. 네가 그동안 해오지 못한 ‘그 말’을 내게 조금 더 해달라고 말하는 일. 나의 ‘몸’을 그 발화 장소로 내어주는 일. 목소리‘들’의 재분배를 실천하는 ‘몸’-되기. 그러니 다시금 요청건대, 독자여, 단 한 번, 그리고 단 하나뿐인 이 고백에 경청을 요한다.
-민가경 「작품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