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로맹 롤랑의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 국내 초역 부록 수록
오래전 전설이 된 《베토벤의 생애》를 공들여 완전히 새롭게 번역
오늘날 일찌감치 전설의 자리에 오른 이 책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이후 축적된 연구가 반영된 요즘 전기와 비교하자면 옛 전기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고 롤랑이 한 역사적 인물을 지나치게 이상화했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저자 스스로 답을 해두었다.
“《베토벤의 생애》는 학문을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상처 입고 숨 막힌 영혼이 다시 일어나서 숨 쉬며 구세주에게 바치는 감사의 노래다. 이 구세주를 내가 변모시켰음을 잘 안다. 하지만 모든 신앙 고백과 사랑 고백도 이러하다. ... 부족한 책이지만 아무것도 고치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이 책은 위대한 한 세대의 원래 특성과 성스러운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 베토벤 서거 100주년을 맞아 나는 그 세대의 위대한 동반자, 올곧음과 성실함의 대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가르쳐준 사람을 기리는 동시에 이 세대를 기억하고자 한다.” _ 로맹 롤랑
대중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베토벤 전기
로맹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 새 번역판 출간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 국내 초역 부록 수록
이 책은 베토벤을 모델로 삼은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로 널리 알려졌으며 191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이 집필한 《베토벤의 생애》와 그의 또 다른 베토벤 연구서에 실린 글 ‘1800년,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을 우리말로 옮겨 함께 엮은 것이다.
《베토벤의 생애》 원서인 프랑스어 초판은 1903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한국어 번역본은 1950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래 지금까지 판을 거듭하며 베토벤의 평전 중 오랜 시간 많은 이들에게 가장 널리 사랑받은 책이다. 위대한 음악가를 넘어 위대한 인물 중에서도 앞자리에 놓이는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인 올해, 포노 출판사는 클래식 음악 도서를 꾸준히 번역해온 베테랑 번역가 임희근의 새 번역으로 이 책을 선보인다. 이 책은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본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베토벤이 가까운 친구 및 동료와 주고받은 편지들, 베토벤의 예술관과 인생관이 담긴 촌철살인 같은 문장 모음, 참고 문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베토벤의 생애에서 중대한 갈림길이 되었던 서른 살(1800년) 무렵 그의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본 또 다른 글 ‘1800년,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을 국내 최초로 번역하여 함께 실었다.
《베토벤의 생애Vie de Beethoven》는 1927년에 베토벤 서거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서문이 추가된 개정판이 출간된 바 있다. 이번 한국어 번역본은 초판 서문과 함께 이 서문을 함께 수록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아무것도 고치지 않으련다”고 했지만 초판과 개정판은 본문 곳곳에 제법 차이가 있다. 새로운 번역은 저자의 주석이 상당수 추가된 판본(지은이가 사망한 해인 1944년에 출간)을 번역 대본으로 삼아 초판과 꼼꼼히 비교하며 번역했다. ‘1800년,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Mil Huit Cent. Portrait de Beethoven en sa trentième année’은 로맹 롤랑의 또 다른 베토벤 연구서 《베토벤, 위대한 창작의 시대 I: ‘에로이카’에서 ‘아파시오나타’까지Beethoven, les grandes époques créatrices I: de l’Héroïque à l’Appassionata》(Éditions Albin Michel, 1928/1966)》에 수록된 글로, 1966년판을 번역했다.
위대한 음악 작품으로 온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준 베토벤의 일생과 작품에 대한 연구를 담은 책은 그동안 다수 출간되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출간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전 연구자들의 오류와 잘못된 정보도 바로잡힐 것이며 다양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오래된 책은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을 내뿜는다. 1902년 잡지〈르뷔 드 파리Revue de Paris〉에 처음 연재되었던 이 짧은 전기는 이후 소책자로 발간되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그 이후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불행을 관통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 오랜 탐구와 자신만의 통찰을 웅숭깊은 문장으로 그려낸 롤랑의 솜씨와 그가 베토벤의 생애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를 마주한 우리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베토벤의 서른 살, 투쟁의 연속이었던 베토벤의 한평생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본의 “한 초라한 집에 딸린 보잘것없는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네 살 때, 그를 몇 시간씩 하프시코드 앞에 꼼짝 못하게 잡아두거나 바이올린과 함께 방에 가두고 죽도록 많이 연습시키곤 했다. 하마터면 그는 예술에 지레 질려버릴 뻔했다.” 열일곱 살에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를 여의고 술주정뱅이 테너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으로서 두 동생의 교육까지 떠맡아야 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고향인 본을 떠나 음악의 대도시 빈에 정착했다. 스물다섯 살에 피아니스트로서 공식 데뷔했고 첫 작품을 출판했으며 귀족 후원자가 애호가들이 생겨날 정도로 승승장구하며 이후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제는 정복자라 할 위대한 비르투오소요, 명석한 예술가요, 살롱의 사자요,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는 사람이자,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자신을 필요로 하지만 그 자신은 우아하고 감성적이고 세련된 이 세계를 경멸하는 서른 살 베토벤”(195쪽)에게 시련이 닥쳐온다. 다름 아닌 난청. 서른 살이 되던 1800년 무렵, 이 증상은 한층 악화된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전원’ 교향곡〉에 나오는 폭풍처럼 갑자기 밀어닥쳐 그를 괴롭힌 병은 그의 사회생활을, 애정사를, 예술을, 즉 그의 전 존재를 한꺼번에 덮쳤다. 우리는 그가 피워낸 꽃에서 젊은 하늘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이 병의 영향을 받았다. 그 어느 것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2-193쪽
누구나 귀가 들리지 않게 되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물며 명민한 청각을 지녔었고 가슴속에 표현하고 싶은 음악이 가득했던 음악가가 말해 무엇 하리. 여기에다 실연의 아픔이 겹치는데, 서른 무렵부터 결혼하려는 의지가 강했지만 역시 난청으로 파생된 문제—순회 연주자로 활동하여 생계를 꾸리기가 불가능해져—로 결혼도 불가능해진다. 절망에 빠진 베토벤은 이른바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한다.
오! 얼마나 힘들게 내가 가진 장애라는 서글픈 현실에 부딪히고 또 부딪혀 좌절해야 했는지 몰라!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단다. “좀 더 크게 말해 봐요, 소리쳐 봐요. 난 귀가 먹었으니까요!” 아! 남들보다 내게 더 완벽해야 했던, 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소유했던 청각, 나처럼 음악 하는 사람들이 거의 가져보지 못한 완벽성에 장애가 생겼음을 어떻게 밖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겠니? … 난 혼자였지. 완전히 혼자였어. … 그러고 나니 절망에 빠졌단다. 하마터면 자살할 뻔했지. 오직 예술, 그것만이 나를 붙들어 주었어. 아! 내가 맡은 과업을 완수하기 전엔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없을 것 같았단다. -92-95쪽
나중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의 아들인 조카 카를의 양육권 다툼 및 조카의 반발로 크게 상심했고, 만년에는 여러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된 뒤로는 인간관계도 거의 끊어졌다. 이렇듯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57년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베토벤은 깊은 절망과 고통에 여러 차례 맞닥뜨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바닥으로 곤두박질하게 만들려는 운명의 손아귀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내면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