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깊은 자는 사랑도 깊다
<인간실격> 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가 지인들과 나눈 편지글 모음집.
작가의 가장 내밀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일기와 편지글이다. 다자이는 일기를 남기지 않은 반면 640여 통에 이르는 많은 편지를 남겼다. 이 책 <청춘의 착란> 속에는 인간에 고뇌하는 다자이의 깊은 내면을 엿볼 수 있는 편지 203통이 수록되어 있다.
세상에 알려질 것을 전혀 예상치 않고 쓴 그의 편지는 극단적으로 내밀한 것들뿐이며,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드러내는 내용도 있다. 조금도 긴장하거나, 가식적이지 않다.
생활고 때문에 돈을 빌려달라는 비루한 내용의 글, 빨리 죽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고백, 자신의 자의식 과잉을 못 견뎌하며 밤새 소리내어 우는 다자이 오사무의 생생한 육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전적인 소설 <인간실격>을 통해, 독자들이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다자이의 처절한 삶의 분투가 편지글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쓴 편지들이기에, 작가의 방심한 맨얼굴,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다자이가 그의 문학을 통해 추구하려 했던, 고독한 인간에 대한 구원과 인간애에 고뇌하는 벌거벗은 영혼의 모습. 이것은 편지글이라기보다 다자이 오사무의 내면의 고백이자 참회록이다.
“죽고 싶어 견딜 수 없다” ― 네 번의 자살 시도, 그리고 39세의 짧은 생애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6월 19일, 혼슈 북쪽 끝 아오모리현 쓰가루의 대부호의 열한 명 아이 중 열 번째이자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존재감 없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어릴 적부터 소외된 존재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고, 게다가 대지주의 아들이라는 것이 숙명적인 죄의식으로 작용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여 좌익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활동에서도 절망을 느끼고, 긴자 여급과 동반 자살 시도에서 혼자 살아남아 자살방조죄로 심문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으로 다자이는 절망에 빠져들었고, 유서를 남기는 심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35년 <역행>으로 아쿠타가와상 차석에 머무르자, 심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항의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그 일로 실망이 컸던 듯,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자이는 “아쿠타가와 상의 타격, 영문을 몰라, 문의중이네. 참을 수 없는 일이야. 뜨뜻미지근한 문단사람, 미워졌네”라고 적고 있다.(본문 96P)
같은 해, 맹장염을 심하게 앓아, 이때 복용한 진통제 파비날에 중독되어 정신착란적인 문체를 보이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결핵치료라고 속여 그를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했는데, 이때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더구나 입원해 있는 동안, 고교시절부터 사랑하여 게이샤를 그만두게 하고 결혼했던 오야마 하쓰요(小山初代)가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한 사실을 알게 되고, 모든 것에 절망하고 폐인과 같은 상태가 된다. 하쓰요와 함께 미나카미 온천에서 정사(情死)를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1945년 패전 후, 새로운 사상의 출현을 기대했지만 사회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자이는 허무에 빠지게 되었고, 이윽고 ‘무뢰파’ 선언을 하고 자유사상가로서의 입장을 밝혔다. ‘기존의 가치와 도덕에 대한 반역’을 모토로 한 그의 소설들은 당시 패배감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고, 다자이를 일약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47년 다자이는 최고의 걸작 <사양(斜陽)>을 발표하고, 이듬해 결핵이 깊어져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듯 자전적 소설 <인간실격>을 발표했다. 아무리 몸무림쳐도 세상과 타협할 수 없었던 사내,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외치며, 자신의 진실에 충실하려 했지만 결국은 광인 취급을 받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하는 사내의 일생은 다자이의 일생과 오버랩된다.
자신의 깊은 상처를 드러내는 듯한 그의 소설에서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에 투영된 작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최후까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버리지 않으려고 몸무림치며, 세상사람들과 고투하며 살아온 작가에게 동화되어간다.
“죽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던 그의 말대로 다자이는 네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자살로써 생을 마감한다. 1948년 6월 13일 밤,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다마가와 상수(玉川上水)에 몸을 던진 후, 19일에 시체가 발견되었다. 39세의 짧은 생애였다.
서른 번의 이사, 서른 번의 파산
이 책에 수록된 편지들은 년도별, 주소지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 1년 동안에도 주소가 여러 곳으로 바뀌고, 같은 주소에서 연도가 바뀌기도 한다. 실제로 주소지에 따른 분류를 세분화하면 30곳 이상이 된다. 주거지를 자주 바꿨다는 것도 다자이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다자이는 이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금까지, 대체 몇 번이나 이사를 했을까? 그 이사도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부분 전부를 잃고 간신히 몸만 도망치듯 떠났으며 새로이 다른 지방에서 다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마련하는 형편이었다.(…) 이것만 해도 벌써 25번 이사를 했다. 아니 25번의 파산이다. 나는 1년에 두 번씩 파산을 했다가 다시 출발하여 살아온 셈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의 가정생활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감도 잡지 못하겠다. 25군데 중에서 나는 지바 후나바시에 가장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집에서 머물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부탁입니다! 하룻밤만 더 이 집에서 자게 해 주십시오. 협죽도(夾竹桃)도 제가 심은 것입니다, 정원의 벽오동도 제가 심은 것입니다, 라고 어떤 사람에게 부탁하며 엉엉 울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수필 ‘15년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