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인간의 아픔과 기쁨, 그리움을 함께하는 세상의 모든 ‘보리’에게 소설가 김훈이 2005년에 쓴 동명 소설 <개>의 2021년 개정판. 댐 건설로 수몰을 앞두고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진돗개 ‘보리’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개정판에서는 이야기의 뼈대는 유지하면서 내용의 상당 부분을 손보았다. “이번에 글을 고쳐 쓰면서, 큰 낱말을 작은 것으로 바꾸고, 들뜬 기운을 걷어내고, 거칠게 몰아가는 흐름을 가라앉혔다.”(「군말」에서) 지난 몇 년간 작가는 매일 공원을 산책하며 다가오고 지나가는 사람과 개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떠오른 생명의 이야기들이 <개>에 스며들었다. 덕분에 모진 매를 견딘 보리 엄마와 가혹하게 죽어간 흰순이의 삶이 다르게 변주되고, 보리의 눈에 비친 세상엔 온기가 더해졌다. “한 자 한 자 다시 쓴 이야기” 작가 김훈이 2005년에 쓴 동명 소설 <개>를 고쳐 다시 펴냈다. 이야기의 뼈대는 유지하면서 내용의 상당 부분을 손보았다. 이번에 글을 고쳐 쓰면서, 큰 낱말을 작은 것으로 바꾸고, 들뜬 기운을 걷어내고, 거칠게 몰아가는 흐름을 가라앉혔다. 글을 마음에서 떼어놓아서 서늘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야기의 구도도 낮게 잡았다. 가파른 비탈을 깎아내려서 야트막한 언덕 정도로 낮추었다. 편안한 지형 안에 이야기가 자리 잡도록 했다. 2005년의 글보다 안정되고 순해졌기를 바란다. _「군말」에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소설의 주인공은 댐 건설로 수몰을 앞두고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진돗개 ‘보리’이다. 보리는 주인할머니 부부와 살던 곳이 물에 잠기면서 바닷가에 사는 작은아들네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새 주인 가족과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 어부인 주인이 풍랑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가족마저 도시로 떠나면서, 옛 주인할머니와 남아 새날들을 앞둔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다. 초판 출간 당시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개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과 세상의 직접적 관계, 그러니까 ‘생에 대한 직접성’을 설명하고 싶었다. 관능과 직관과 몸의 율동을 보여주면서 삶의 비애나 고통을 바로 들여다보는 존재를 상정하다 보니 개가 인간보다 유리할 거라고 판단했다. 개의 후각은 인간의 200배나 되고, 청각도 더 발달했다. 그처럼 감각이 발달한 개의 내면에는 인간보다 풍요로운 삶의 정서와 인상이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개는 언어가 없기에 짖어댈 뿐이지만, 그 내면은 인간보다 풍요롭고 다양할 것이다.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짖어댄다는 불가능한 일을 해보려고 했다. -2005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작가는 매일 공원을 산책하며 다가오고 지나가는 사람과 개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떠오른 생명의 이야기들이 <개>에 스며들었다. 덕분에 모진 매를 견딘 보리 엄마와 가혹하게 죽어간 흰순이의 삶이 다르게 변주되고, 보리의 눈에 비친 세상엔 온기가 더해졌다. 사랑과 희망, 그리고 싸움 ― ‘보리’의 삶 노부부가 사는 집에서 태어난 수컷 보리는 젖먹이 시절 엄마 품 안에서 따스하고 편안한 날을 맞는다. 하지만 “완벽한 평화 속에는 본래 슬픔이 섞여 있”듯, 그 행복의 시간 속에 태어날 때 다쳐 젖 먹기 경쟁에서 뒤처진 맏형의 죽음이 겹쳐진다. 온몸으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개의 운명을 다리 부러진 맏형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엄마는 따스한 봄볕이 내리던 날, 눈도 뜨지 못한 형을 삼키고 만다. 본능에 가까운 엄마의 행동으로 맏형은 죽지만 보리의 눈에 그것은 한편으로 엄마의 따스하고 축축한 몸속,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런 엄마의 행동을 오해한 노부부는 자식 잡아먹은 재수 없는 개라고 매타작을 해댔다. 하지만 그들이 나쁜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그것이 개이든 고추 모종이든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심성으로 새끼 낳은 엄마에게 미역국을, 보리밥 잘 먹는 새끼들에게는 된장국에 따뜻한 보리밥까지 말아 먹였다. 수몰이 임박해서까지 집을 떠나지 못했던 것도 그런 마음 씀씀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톤짜리 목선으로 서해의 가까운 바다에서 잡아 올린 생선을 팔아 살아가는 주인의 둘째 아들네로 갈 때까지 보리는 신바람 나게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자랐다.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는 동안 그를 이끌었던 것은 “냄새”였고, 자랑거리는 세상을 인식하는 풍향계인 “수염”이었다. 눈 위에, 가슴에, 주둥이와 턱 밑에 난 여러 수염과 그 수염 각각의 역할로 보리는 세상을 자신의 몸처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넉 달 만에 보리가 수몰 직전의 고향을 떠날 때 엄마는 개장수에게 팔려 가고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것 또한 슬픈 일일 테지만 개는 지나간 날들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닥쳐올 날들에 대한 근심도 없다. 바닷가 새 주인네에서 보리는 밤일 마치고 돌아오는 주인 배의 밧줄을 선착장 말뚝에 거는 일을 도왔다. 동네 저학년들을 데리고 아침 등교하는 큰딸 영희를 따라나서 길가의 뱀을 해치우는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기도 한다. 영희의 학교에서 이웃 동네 암캐 흰순이를 만나 마음 설레는 날들도 생겼다. 돼지우리 지키는 사나운 개 악돌이와는 한바탕 싸움도 벌인다. 그런 일상과 사건의 연속이던 보리의 삶을 한순간에 바꿔놓은 건 조업 중 폭풍에 휩쓸린 주인의 죽음이었다. 생계를 잃은 가족은 도시의 아파트를 구해 떠나지만 아파트에서 키울 수 없는 보리는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 집안 뒤처리를 위해 남았던 할머니마저 떠나면 보리는 “어디론가 가야 할” 형편이다. 고향을 떠나올 때도 그랬지만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다. “어디로 가든 거기에는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새벽안개와 저녁노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고 그런 “세상의 온갖 기척들”을 맡으며 “달리고 냄새 맡고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이미 다졌던 발바닥 “굳은살”의 탄력이 있기 때문이다. 돋을새김된 생의 명암 ― ‘보리’가 본 인간 세상 사람들은 오직 제 말만을 해대고, 그나마도 못 알아들어서 지지고 볶으며 싸움판을 벌인다. 늘 그러하니,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_16쪽 전지적 개시점으로 쓰인 이 소설은 개 이야기지만 개의 시선으로 인간사를 반추하는 대목이 여운을 남긴다. 노부부가 엄마 때린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을 치사하고 비겁하게 여기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보리는 생각한다. 개처럼 눈치 보라는 것은 비굴하게 처신하라는 게 아니다. “남들이 슬퍼하고 있는지 분해하고 있는지 배고파하고 있는지 외로워하고 있는지 사랑받고 싶어 하는지 지겨워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척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다. “남의 눈치 전혀 보지 않고 남이야 어찌 되건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고 그야말로 “개수작”이다. 개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벌레 들의 눈치까지도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며 “그게 개의 도리고, 그게 개의 공부”라고 한다. 사람의 경우라고 달라야 할 까닭이 없다. 바닷가 주인네 둘째인 두 돌배기 영수가 싼 똥을 먹어 야단을 맞고도 보리는 그 “똥을 먹은 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똥을 먹는다고 해서 똥개가 아니”라 “도둑이 던져주는 고기를 먹는 개가 똥개”라는 대목은 인간 세상에 던지는 촌철살인이다. “되도록이면 싸우거나 달려들지 않고, 짖어서 쫓아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람들의 동네에서 살아야 하는 개의 도리”다. “쓸데없이 싸우다가 다치지 말고, 기어이 싸워야 할 때를 위해서 몸을 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