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또 언제까지 중요한가
방송, 회계, 건축, 연기 등 엘리트 직종에 존재하는 ‘계급 천장’을 드러내다
2014년 영국 정부는 최대 규모의 고용조사인 노동력조사(LFS)에 처음으로 계급 태생(class origin)에 대한 질문을 도입했다. 그 핵심 내용은 설문조사 대상자가 14세였을 때 부모 가운데 주 소득자인 사람의 직업을 묻는 것이었다. 사회학자 샘 프리드먼과 대니얼 로리슨은 그 결과를 포함한 3년간의 LFS 데이터를 취합하여 10만 8000명의 개인과 1만 8000명의 엘리트 직종 종사자의 대표 표본을 확보했다. 이 표본을 영국 정부의 직업 분류 체계인 국가통계사회경제분류(NS-SEC)에 기초해 크게 세 계급, 즉 ① 전문직 및 경영직(=상위 중간 계급=특권층) 출신, ② 중간직(=하위 중간 계급) 출신, ③ 노동 계급 출신으로 분류했다. 그런 다음 조사 대상자들의 계급 태생(부모의 직업)이 계급 도착지(본인의 직업)로 향하는 흐름을 살펴보았다. 영국 사회에서 출신 계급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예상 혹은 바람과 달리, 특권층 출신이 노동 계급 출신보다 엘리트 직종(의료, 법률, 금융, 회계, 건축, 방송 등)에 종사할 확률이 약 6.5배 높았다. 분야별로 개방성의 정도가 크게 달랐는데, 예를 들어 특권층 출신이 의사가 될 확률은 노동 계급 출신에 비해 12배 더 높은 반면 엔지니어가 될 확률은 2배였다. 더 놀라운 발견은 계급 임금 격차였다. 엘리트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 계급 출신은 같은 일을 하는 특권층 출신 동료보다 평균 16퍼센트 더 적게 번다. 격차가 가장 큰 금융과 법률 분야의 경우 연평균 약 3,000만 원 정도 차이가 난다. 여기에 여성, 장애인, 인종-민족적 소수자 등 다른 불평등의 축이 더해지면 이중, 삼중의 불이익에 직면하게 된다.
두 저자는 나이, 성별, 인종 등 인구통계적 요인, 출신 대학이나 학위 등급 등 교육적 성취, 근무 시간이나 직무 교육 수준, 재직 연수 등 객관적 ‘능력’ 지표를 비롯해 근무 지역, 기업의 규모 등 임금 격차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여러 요인을 차례로 분석한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을 종합해도 계급 임금 격차의 47퍼센트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나머지 절반을 설명하기 위해 이들은 직장 내부로 들어간다. 대규모 설문조사로 확인할 수 없는 직장 내부의 역학, 출신 계급에 따라 임금과 승진에 차이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확인하기 위한 질적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전국 규모의 방송사 6TV, 대형 다국적 회계법인 터너 클라크, 건축 회사 쿠퍼스의 직원들, 그리고 자영업자를 대표하는 연기자들까지 총 175명을 상대로 부모의 직업, 물려받은 경제 및 문화 자본, 본인의 학력과 경력, 소득, 회사 및 업계 특유의 문화나 인재상 등을 포함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결과 엘리트 직종마다 양상이 다르기는 했지만, 중간직이나 노동 계급 출신이 맞닥뜨리는 계급 천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방송사인 6TV는 직원의 67퍼센트가 특권층 출신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외주제작국의 경우 79퍼센트가 특권층 출신이었다. 외주제작국의 고위직만 놓고 본다면 90퍼센트가 특권층 출신이고 노동 계급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회계, 건축, 연기 분야에서도 특권층 출신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능력을 펼쳐 보일 기회와 자리를 얻는 반면, 중간직이나 노동 계급 출신은 자주 야망이 부족하다거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내부의 언어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회를 잃었다. 두 저자는 다양한 계급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구체적 직업 경험, 커리어 진전이나 실패의 결정적 순간, 감정적 난관과 자기성찰의 목소리를 들으며 계급 천장의 동인을 탐색해나간다.
‘능력’은 계급화된 퍼포먼스다
특권이 ‘능력’으로 오인되는 몇 가지 경로
이 책이 공들여 입증하는 것은 직업적 성취의 핵심 요건이라 여겨지는 ‘능력’이 사실상 매우 모호한 개념이며, 많은 직종에서 유리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더 쉽게 획득하고 더 적합해 보이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이 학력이나 기술, 자격의 획득 같은 능력의 객관적 지표나 타고난 재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식별되고 인정받는 방식이 특권층에게 유리한 쪽으로 형성되어 있어 노동 계급이나 중간직 출신은 동일한 역량을 가졌더라도 그것을 수행해 보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즉 ‘능력’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많은 부분이 특정 계급의 문화, 언어, 취향, 행동 규범 등에서 비롯한 계급화된 퍼포먼스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저자들은 특권이 ‘능력’으로 오인되는 몇 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첫째는 ‘엄마 아빠 은행’이다. 특히 방송이나 연기처럼 불안정한 단기 계약과 저임금을 견뎌야 하는 직종에서는 부모의 재력이 커리어 진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런던에서 주거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며 다음 오디션을 기다리는 일, 납작하게 희화화된 캐릭터를 거절하는 일, 무보수에 가까운 크리에이티브한 경력을 쌓아가는 일은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
(163~164쪽) 저는 항상 노동 계급 출신 피해자로 캐스팅되었습니다. (…) 매 맞는 아내, 마약 중독자 또는 자신의 잘못이나 부주의로 인해 아이를 잃은 사람 등의 역할을 했죠. (…) 예외 없이 상층 계급 남성 작가들이 지어낸 (…) 좀 더 용기를 내서 “더 이상 이런 역할은 맡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바라는 만큼 용감하게 행동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런던에서 생계를 유지하려면요. - 미아(강한 스코틀랜드 억양을 가진 노동 계급 출신 여성 연기자)
둘째로 문화적 유사성 혹은 동종 선호에 기초한 비공식적 후원을 들 수 있다. 인맥이나 연줄의 힘 같은 것은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많은 업계에서 ‘인재 발굴’ 같은 중립적인 용어로 포장된 비공식적 후원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후원은 공식적인 승진 절차를 우회하여 임원급 고위 직원들이 ‘유망한’ 후배 직원을 ‘발굴해’ 고속 승진시키거나 진급에 필요한 경험을 집중적으로 제공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의 ‘유망함’은 업무 역량보다는 취향을 공유하고, 말이 통하고, 여가 활동을 함께할 수 있는 계급-문화적 매칭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계급-문화적 매칭은 특권을 ‘능력’으로 보이게 하는 세 번째 경로인 ‘적합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회계법인의 최고위 직급인 파트너에 유독 적합해 보인다. 회계업계에서는 이를 ‘파트너 재질(partner material)’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여기에는 표준 발음과 적절한 옷차림, 자연스러운 유머를 구사하는 ‘세련됨’, 암묵적인 규범과 언어, 스타일을 체화한 ‘학습된 비격식성’ 같은 요소가 포함된다. 특정 계급의 모습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적합성의 이미지는 노동 계급 출신에게 특히 큰 장벽으로 작용한다.
(215쪽) 회의를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언제 발언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고 있어요. (…) 언제 대화에 끼어들고 개인적인 일화를 풀어놓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보면 예외 없이 더 상류층(더 나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더 편하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어떤 얘기를 하는지가 관건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얘기를 어떻게 전달하는지, 어떻게 대화하고 상호 작용하는지, 일종의 언어적 신호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 필립(노동 계급 출신, 회계법인 자문 부서 파트너)
이러한 계급 천장 효과는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더 강력해진다. 엘리트 직종, 그중에서도 임원 환경에서는 ‘고상한 문화’ 혹은 ‘체화된 문화 자본’이라 일컬어지는 예술적 취향, 지적인 태도, 미적 성향 등이 울타리를 형성해 제한된 범위의 사람들에게만 문을 여는 ‘사회적 봉쇄’가 일어난다. 그 결과 각 직업의 최상층에는 특권층 출신만 남게 되고, 결국 이들이 가장 능력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