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궤도를 벗어난 지구, 사라지는 해안선, 폭주하는 AI……
멸망과 혐오에 맞서는 새 시대의 저항문학
《확률의 무덤》,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 《마지막 증명》 등으로 자신만의 세계관과 개성을 구축해온 SF 작가 이하진의 첫 번째 소설집 《우리가 마주할 기적은 무한하기에》가 안온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이하진의 소설의 인물들은 많은 경우 멸망이 목전에 와 있거나 이미 멸망을 맞이해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들은 멸망과 재난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애쓴다. 먼저 떠난 이들을 애도하고, 남은 이들을 위한 일을 찾고, 이 상황을 타개할 기적을 탐색한다. 그러면서 다짐하듯 속삭인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이러한 이하진의 세계는 분명 과학적 상상력에 기반하지만, 독자에게 이 세계는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지구의 온도는 해마다 높아지고 그로 인한 기후 위기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AI 기술은 그것이 언젠가 인간의 제어를 벗어날 것만 같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사람이 그저 혐오와 불신으로 당면한 현실과 불안을 잠시 잊고자 한다. 이하진의 소설은 묻는다. 당신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이냐고.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당신의 선택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불안하고 꺾이고 상처받아도 나아갈 수 있다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만들어낼 무한한 기적이라고.
■ 우리가 마주한 멸망 앞에서
멸망을 마주한 세계에서 어떤 기적이 가능할까? ‘지배’를 금하고 ‘공멸’을 막아내고 ‘자멸’을 피할 수 있을까? 이하진은 우선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를 통해 피할 수 없는 빠른 멸망의 시간을 제시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본래의 공전궤도를 이탈한 지구, 인류는 물론 모든 생명체는 속절없이 멸망을 맞이한다. 외우주로 향해 가는 지구, 중력을 잃고 길게 이어지는 황혼은 어쩌면 아름다운 황홀경처럼 보인다. 이토록 거대한 재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의 의지는 공멸을 불러왔지만, 어떤 사람의 의지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연속성〉은 시간이 정지하는 정체불명의 재난이 닥친 도시에 소중한 사람을 둔 이의 편지이자 기록이다. 접근이 금지된 재난의 도시로 그는 간다. 그곳에 있는 차원실험연구소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친구를 구하러. 이러한 의지는 제3차 세계대전과 이후 다가온 절명의 위기에서도 분명히 존재한다. 〈지오의 의지〉에서 초거대 AI 지오는, 인간의 마지막 의지와 선택을 묻는다. 그 대답이 기적을 불러올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이러한 물음은 〈발로(發露)〉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독자와 마주한다. 가자 지구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학살을 알지 않느냐고. 안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 우리가 만들어낼 기적을 기다리며
멸망 앞에 선 인간의 의지는 사랑과 연대에서 비롯될 것이다. 로맨스 SF라 할 〈마지막 선물〉에서 백영은 앞마당에 떨어진 운석을 분석하며 양서아에게 답신을 기대할 수 없는 이메일을 보낸다. 백영은 운석을 분석하면 할수록 그것이 특정한 메시지를 품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또한 그것이 동경하는 이의 마지막 선물인 것도. 〈저 외로운 궤도 위에서〉는 대전염병 시대에 우주 공간을 넘나드는 물류를 책임지는 택배 기사가 주인공이다. 미래의 노동자도 지금의 노동자와 크게 다름은 없어서, 그들은 저임금과 산업재해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죽기 위해서 연대를 꿈꾼다.
〈표류 공간의 서광〉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기로 작정하고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진다. 시간 여행에서 탈선한 화자가 누군가를 만나서 전하는 이야기, 그리하여 “이 모든 건 한 사람이 믿어가는 이야기”다. 동시에 극악한 확률에서 만난 서로를 구해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주할 기적은 무한하기에〉는 멸망이라 하기에 지나치게 아름다운 도시 자허흐의 이야기이다. 스스로 불러온 멸망을 포악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에 기시감을 느낀다면, 그 멸망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노인에게서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 속 신인류는, 그리고 소설 바깥의 작가는 계속해서 묻는다. 마치 그것이 소설의 역할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