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와 만난 20만 독자의 물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요?”
『어린이라는 세계』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김소영 작가는 국내외의 크고 작은 책방, 도서관, 강연장에서 수많은 독자를 만났다.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잘 지내보고자 강연에 참석한 독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요?”였다. 오늘의 어린이와 어른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어디에서 마주치고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야 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이 책은 지난 4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도착한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작가의 신중하고 성실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준비한 것은 ‘어린이를 존중하는 어른’, ‘다정한 어른’과 같은 명쾌한 답이 아니다. 그 대신 주인 잃은 강아지를 맡기기 위해 들이닥친 어린이들의 수선스러움을 내치지 않는 세탁소 사장님의 정다운 응대, ‘녹색 어머니’ 봉사를 하면서 등교하는 어린이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어른과 그 소리에 기운을 얻는 어린이의 짧은 만남, 어린이의 부탁에도 턱에 걸친 마스크를 올리지 않는 무심한 어른의 모습 등 어린이와 어른이 만나는 구체적인 생활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인물과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작은 일화들을 통해 독자는 어린이의 눈에 어른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린이와 어른이 일상에서 어떻게 만나 영향을 주고받는지 상상하며 자신의 자리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이웃은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어린이에게 이웃은 이 세상에 ‘진짜’ 사람들이 산다는 걸 알려준다. 동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살 때, 모자 달린 외투를 머리에만 걸친 도련님 차림으로 신발주머니를 무릎으로 쳐가면서 학교를 오고 갈 때, 어린이는 실재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웃인 어른들은 알게 모르게 어린이 삶의 배경에 이미 등장한 것이다. 어린이 자신도 이웃으로서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상적으로, 날마다. - 60~62쪽
독자나 청중의 질문이 늘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스쿨 존’에서 일부러 장난을 치는 어린이들 때문에 사고가 나도 어른의 잘못이냐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노 키즈 존’은 어린이에 대한 명백한 차별임을 주장해왔던 작가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예로 들며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소영 작가는 타협할 수 없는 부분과 사정을 헤아리며 조율해갈 수 있는 부분을 단호하게 구분하며, 오래 고민하고 준비한 대답을 내놓는다.
나는 ‘노 키즈 존’이라는 ‘쉬운 말’이 없어지면 좋겠다. 말과 함께 그 개념도 낡은 것이 되어 사라지면 좋겠다. 카페에 식당에 ‘노 키즈 존’이라고 써 붙이는 간단한 해결책보다,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고 조율해가는 번거롭고 불편한 해결책이 더 합리적이다. (…) 깨지기 쉬운 장식품이 많아서 어린이 출입이 어렵다거나, 난간이 위험해서 어린이 출입을 제한한다거나, 음식이 뜨거워서 어린이가 돌아다니면 위험하기 때문에 어린이 동반석을 어디어디로 제한한다거나, 여러 이유를 설명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래 봤자 결론은 똑같다고 하더라도, ‘노 키즈 존’이라는 말로 차별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쉬운 말’은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해야 할 때는 오직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때뿐이다. - 264~268쪽
이처럼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독자와 작가의 직간접적인 대화 속에서 쓰였다. 공감과 지지의 말도, 날 선 비난도, 간절한 질문도 모두 오늘의 어른, 당대 한국 사회의 모습인 만큼 거기서 출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가의 응답에 독자들은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질 것이다.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동안, 이미 어른인 우리는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해 묻고 또 답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린이의 마음이 있다”
어떤 어린이가 어떤 어른이 되기까지
김소영 작가가 어린이 이야기를 힘주어 하는 것은 당연히 어린이만 보호하고 존중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 책의 독자인 우리 어른들이 한때 어린이였듯이, 오늘의 어린이도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에게 보내는 사랑과 지지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에 대한 응원이자 존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한쪽에 어린이, 한쪽에 어른을 두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가는 식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한 사람이 어린이의 마음을 가장 안쪽에 두고 동심원을 그리듯 청소년을 거쳐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흐름을 따르며, 어린이와 어른 ‘사이’와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 모두를 살폈다. 흔히 동심을 잃고 어른이 된다고 하지만, 어린이가 어느 날 갑자기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이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동심 또한 잃어버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자란다는 것은 전 단계의 마음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을 그리는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을 가장 안쪽에 두고, 차차 큰 원을 그려가는 것. 정확히 말하면 원은 아닐 수도 있다.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 어느 부분은 푹 꺼지고 어느 부분은 부풀어 올라 모양이 좀 이상한 도형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 중에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깊은 골짜기들도 있다. 어느 부분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나중에 열심히 메워서 꽤 괜찮은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라는 사람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린이의 마음이 있다. 내내 그 마음만 들여다보고 살아도 곤란하지만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내 삶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93~294쪽
동심에 대한 오해는 어린이와 어른의 세계를 떼어놓는다. 동심을 아름답고 순수한 것으로 찬미하거나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하면서 어른에게는 없는 것, 어린이만 가진 것으로 바라볼 때 어린이는 대상화될 수밖에 없고 삶의 연속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작가는 어린이, 청소년, 어른으로 이어지는 3부 구성을 통해 동심이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모습을 바꾸며 면면히 이어지는지, 활짝 꽃을 피우기도 하고 무참히 깎여 나가기도 하면서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공들여 묘사한다. 흔히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 있다고 여겨지는 청소년기의 경험과 감정을 비중 있게 서술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는 그 언니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데, 언니의 노래가 시작된 순간 우리를 감싼 분위기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누구도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자신은 잊었다고 생각할지라도 몸 한구석에 영원히 새겨져서 못난 것을 덜 미워하거나 고운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드는 일을 부지런히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열일곱 살, 열여덟 살이었으니 그런 기관이 생기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 우리가 그날 느낀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저 ‘감수성 예민한 아이들’의 한때였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월이 오래 흐르고 생각해보니 우리가 느낀 건 예술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너무 아름다우면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적어도 나는 두려울 만큼 놀랐다. - 176~177쪽
어른을 가만히 지켜보며 세상을 배우던 어린이는 몸과 마음에 영원한 아름다움을 새기는 청소년기를 지나 자신만의 빛을 발하는 어른이 된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어린이를 맞이한다. 그 과정은 단절 없이 이어진다. “어린이였던, 청소년이었던, 어른이었던 날들 내내 나는 나였다.”(6쪽) 어떤 어린이가 어떤 어른이 되기까지, 그 여정을 담은 이 책은 인생에 대한 진솔한 탐구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른이 어린이를 보듯이 어린이도 어른을 본다
어른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배운다
어린이를 위하는 방식으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어린이만을 위한 공간, 어린이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어린이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