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만이 유일하게 유지 가능한 체계라는
오늘날의 지배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리얼리즘’
자본주의가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실패한 체계임을 비판하고 체념과 냉소를 넘어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구축하자
독창적인 문화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자본주의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균열을 포착한다
[2판 책소개]
2018년에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에게 마크 피셔라는 비평가를 각인한 『자본주의 리얼리즘』 2판이 출간되었다. 2022년 영국에서 발표된 원서 2판에는 마크 피셔의 부인인 조이 피셔의 「서문」, 동료이자 비평가인 알렉스 니븐의 「서론」, 소설가로 피셔와 함께 제로 북스와 리피터 북스를 설립한 타리크 고더드의 「후기」가 수록되었다. 이번 한국어 2판에서도 이 글들을 번역해 실었고, 그 외에 본문 번역과 디자인을 소폭 손질했다.
피셔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글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애초에 어떻게 구상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출간되었는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출간되었고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는지, 피셔의 사망으로 이들 개개인과 지성계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들의 회고를 통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마크 피셔의 지적 여정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나아가 이 책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21세기 특유의 불만을 분석한 대표적인 선언문으로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까닭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으로 피셔는 21세기 들어 훨씬 만연해진 문화적, 정치적 불모와 고갈의 감각을 해부했다. 이제 자본은 대안과 저항을 흡수할 뿐 아니라 우리의 욕망 자체를 ‘사전 구성’한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체념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무자비한 속도로 모든 영역을 유연화하는 자본주의는 현재적인 것과 즉각적인 것을 특권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극심한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성은 지나치게 향수에 몰두하는 문화를 창출한다. 피셔의 문제 의식을 압축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청년들이 더 이상 놀라움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자본이 우리의 희망과 상상까지 빈틈없이 장악했다는 주장 때문에 피셔에게 비관주의자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읽어 본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실패하는 지점을 간파하고 정치화하려는 노력이 더욱 두드러지게 다가올 것이다. 그가 전략적 요충지로 삼은 생태 재앙, 정신 건강, 관료주의는 지난 10년을 거치며 훨씬 심한 부작용을 노출하면서 우리를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대고 있다. 나아가 피셔가 주된 분석 현장으로 삼은 분야가 교육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한데, 교육이 오늘날 양극화와 차별, 혼란과 무력함의 징후를 가장 뚜렷이 드러내 보이는 영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노동당 집권기의 교육 영역에 몸담았던 경험에 주로 기초하고 있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구체적인 시공간의 산물이지만, 그가 강조했던 문제들은 지금도 시의성을 잃지 않고 새롭고도 예리하게 다가온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매우 간결한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논변들이 피셔가 20여 년간 쌓아 온 문제 의식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한국어판이 출간된 이후 그의 전반적인 면모가 소개된 덕분에 우리는 그의 문장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역사가 담겨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피셔의 다른 작업들이 번역되면서 점차 분명해진 사실은 그의 호소력이 내용뿐 아니라 문장 수준에서도 발휘된다는 것이다. 피셔는 실제로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들을 식별했을 뿐 아니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느끼도록 글을 쓴 사람이다. 그는 블로그라는 짧은 포맷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긴요하다고 믿는 문제에 관해 썼고, 그의 글에는 읽는 사람들도 그 믿음을 공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는 사태를 단순하게 만들고자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에두르지도 않았고, 복잡함을 축소하지 않으면서 명료하고자 했다.
이렇듯 그는 글이 사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믿음이 그의 글에 일종의 진정성과 참여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후 번역된 그의 다른 작업들과 함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다시 읽는 독자들은 이 독특하고도 강력한 힘을 더욱 분명히 감지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앞으로도 우리가 거듭 다시 돌아가는 텍스트로 남을 것이다.
[초판 책소개]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할 수 있다.” 우리 다수는 억압과 착취에 분노하고 불평등과 부정의를 주시하면서 바로잡고자 노력해 왔다. 이처럼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는 투쟁이 여전히 활발히 펼쳐지고 있음에도 이 반란들에는 한 가지 차원이 누락되어 있는 듯 보인다. 자본주의라는 체계 자체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마크 피셔가 주목하는 상황이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삶뿐 아니라 생각의 지평까지 잠식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그런 사회가 오기나 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이처럼 대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할 수 없는 현재의 상태를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특히 문화의 측면에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분석하는 이 책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무의식에까지 스며든 이데올로기적 환경을 진단하고,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균열을 파고들며, 그 균열을 파열로 이끌 수 있는 전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크 피셔는 21세기 들어 영국의 담론 지형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비평가 중 한 명이다. 2000년대 초 블로그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젊은 지식인과 비평가들이 네트워크를 이루며 신선한 담론을 생성하고 있을 때 피셔의 블로그 k-펑크가 그 중심에서 비판적 지식을 활성화시켰다. 동료이자 음악 비평가인 사이먼 레이놀즈는 피셔를 블로그를 두고 “영국의 대부분 잡지보다 뛰어난 일인 잡지”며 대중문화, 음악, 영화, 정치학과 추상적인 이론 등이 저널리스트, 철학자, 친구, 동료 등에 의해 나란히 논의되는 “블로그 성좌”의 중심 허브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2009년 출간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피셔의 첫 저작이며, 세계적인 금융 위기로 고조된 영국의 학생 시위 정국에서 젊은 세대 공중의 지지를 얻으며 그를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대열에 속하게 해 주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후 피셔는 『내 삶의 유령들: 우울증, 유령론, 잃어버린 미래에 관한 글들』과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이라는 두 권의 저서를 출간했고, 그런 뒤 2017년 초에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는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고통받았고, 우울증 등의 정신 건강 문제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핵심 쟁점 중 하나기도 하다. 비록 개인적인 삶은 불안과 우울로 가득했을지언정, 피셔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읽어 내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되살리고자 노력한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다른 사회를 꿈꿀 상상력마저 잠식한 오늘날의 자본주의
2007~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지자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파국이 임박해 보였고 수많은 사람이 타개책을 요구했다. 그 이후 신자유주의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기이하게도 자본주의 자체는 여전히 건재해 보이며, 오히려 더 강하게 우리 상상력의 지평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피셔가 말하
김준모
4.5
오랜만에 머리 터진다ㅋ 거기 당신, 현시대의 창작자가 되려면, 이 책을 통과해야한다!
L.
読書中
아.. 배움 모자라.. 가방끈짧음통 거진 3개월째 읽고 있는데 너무 힘이 듭니다
Hongik Kim
4.0
#자본주의리얼리즘 추천할만하지 않다. 우선 가독성이 굉장히 떨어진다. 애초에 워낙 무거운 개념을 다루는 비평이기도 하고, 함축적이고 현학적인 언어가 박박 눌러담긴 문장들이라 당연히 분량에 비해 잘 안읽히는 건 당연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가독성이 떨어진다. 번역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할 듯. 뭐 한창 이런 글을 많이 읽는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쇼츠와 짤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는 문장 자체가 너무 불친절하다. 가독성보다 더 큰 문제는 이게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계승하'려'는 책이라는 점이다. 굉장히 큰 담론을 다룬다.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를 다루고 그의 모순을 지적한다. 자본주의가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스탈린주의를 배격하며 등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스탈린주의적이라는 점. 이게 뭐랄까.. 너무 거대담론이라 닳아버린 40대 아저씨에겐 좀 아득하다.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지적하는 모순과 문제점이 대안이 없기 때문에 허무주의로 빠지고 만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인류 최초로 '무가치'를 표방하는 주의다. 이데올로기의 탈을 쓴 탈 이데올로기.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견제책도 없다. (견제책을 표방한 이들을 멸망시키고 흡수해버린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 그냥 세상의 멸망이라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은 이 책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자본주의는 봉건주의보다 봉건적이고, 교조주의보다 교조적이고, 스탈린주의보다 더 스탈린적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는 미국의 요즘을 보노라면, 그간 믿어온 진보라는 것 역시 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였나 싶을 지경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기가 빨린다. 일단 이 책의 언어를 읽고 이해하고 감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힘들고,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나와 내 주변에 대입해 생각하는 과정도 버겁고, 그걸 해낸 다음 아 지금 모두가 파국으로 치닫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면 허무해진다. 안그래도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편인데, 이 책을 읽을 때면 더욱 그렇다. 물론 이런 양분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패트릭 드닌의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김규항의 <혁명 노트>,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와 비슷한 선상의 책이다. 그런데 앞의 책들이 비교적 건조한데 반해 이 책들은 이래저래 좀 음울하다. 읽다보면 기분이 썩 좋지않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주기적으로 찾아 읽어야 하는 입에 쓴 약 같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그리고 “청년들이 더 이상 놀라움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제 노동자들의 성과나 실적은 직접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audit를 통해 가시화되는 성과와 실적의 표상이 평가된다. 불가피하게 어떤 단락短絡이 일어나고, 노동은 그 자체의 공식적인 목표보다는 표상을 생산하고 조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게 된다. 실제로 영국의 지방 정부에 대한 어느 인류학적 연구는 “지방 정부의 서비스들을 진정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보다 그 서비스들을 정확하게 표상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순위의 이러한 전도는 과장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시장 스탈린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 체계의 징표 중 하나다. 후기 자본주의는 이처럼 실제적인 성취보다 성취의 상징들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를 반복한다. 이 상태는 쾌락을 얻지 못하는 무능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생들은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느끼지만 오직 쾌락 원칙 너머에서만 이 누락된 불가사의한 향유에 접근할 수 있음을 감지하지는 못한다. 대개의 경우에 이는 학생들이 처한 모호한 구조적 위치의 결과로, 이들은 훈육 제도의 주체라는 옛 역할과 서비스 소비자라는 새로운 지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 학생들은 몇 주간 계속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도 혹은 과제를 전혀 내지 않아도 특별한 제재를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들은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적 (혹은 무쾌락적) 나른함에 빠져드는 식으로, 가령 기분 좋게 약에 취하거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밤샘 텔레비전 시청, 마리화나 등이 제공하는 안락한 미몽에 빠져드는 식으로 이러한 자유에 반응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격언은 오히려 한층 적절해졌다. 외부성을 완전히 성공적으로 통합한 자본주의는 식민화하고 전유할 수 있는 외부 없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스무 살 이하의 청소년 대부분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의 결여는 더 이상 쟁점조차 아니다.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의 지평을 빈틈없이 장악하고 있다. 제임슨은 자본주의가 무의식에 스며드는 방식을 두려움 속에서 전하곤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식민화해 왔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 이상 논평할 가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프로파간다와 달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옹호하지 않으며, 자본의 작동이 어떤 주관적인 믿음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프로파간다 없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누군가가 옹호하지 않더라도 완벽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야 더 잘 굴러갈 수 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할 수 있다. 지젝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이러한 부인 구조에 의존한다. 우리는 화폐가 아무런 내재적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징표일 뿐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화폐가 신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라도 한 듯이 행한다. 더욱이 이러한 행동은 정확히 앞서의 그 부인에 의존하고 있다. 즉 이미 머릿속에서 화폐와 아이러니한 거리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행동에서 화폐를 물신화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의 “끊임없이 시장을 확장해야 할 필요”, 자본의 “성장이라는 물신”은 자본주의가 바로 그 본성상 지속 가능성에 관한 어떤 통념과도 대립한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학생들에게 두 문장 이상을 읽도록 해 보면 대부분—A 레벨 과정의 학생조차도—이 못 하겠다고 항의할 것이다. 교사들이 가장 빈번하게 듣는 불평은 따분하다는 것이다. 쟁점은 글의 내용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따분하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여기서 마주하는 것은 단순히 저 유서 깊은 10대의 귀차니즘torpor이 아니라 ‘너무 자극받아 집중할 수 없는’ 문자 문화 이후의 ‘새로운 육체’New Flesh3와 퇴조하고 있는 훈육 체계의 제한과 집중 논리가 이루는 부조화다. 따분하다는 것은 문자 메시지, 유튜브, 패스트 푸드 등으로 구성된 소통의 감각-자극 매트릭스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것, 언제든 달콤한 만족감을 주는 부단한 흐름에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의 삶이 기대는 가치인 의무, 신뢰, 헌신 등은 정확히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철 지났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다. 하지만 공적 영역이 공격받고 ‘보모 국가’ Nanny State1가 제공하던 안전망들이 분해됨에 따라 가족은 항구적인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압력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상황은 정확히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예상했던 그 방식으로 모순에 처해 있다. 즉 자본주의는 가족을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돌보는 본질적인 수단으로, 무정부적인 사회경제 상황이 야기한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책으로) 요구하고 있다. 자신이 (부모가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만들고, 부부를 서로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그들에게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부과하면서) 가족을 침식해 가는 그 순간에 말이다. 웰빙에 가장 유해한 이기적 자본주의의 독소는 그것이 물질적인 풍요가 성취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부유한 자만이 승자고 열심히 일할 의지만 있으면 가족, 인종, 사회적 배경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성공하지 못한 이가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조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성과를 평가하고 애초에 정량화하기 힘든 노동 형태를 측정하려는 충동은 불가피하게 추가적인 관리 및 관료주의를 요구했다. 이제 노동자들의 성과나 실적은 직접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audit를 통해 가시화되는 성과와 실적의 표상이 평가된다. 불가피하게 어떤 단락短絡이 일어나고, 노동은 그 자체의 공식적인 목표보다는 표상을 생산하고 조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게 된다. 실제로 영국의 지방 정부에 대한 어느 인류학적 연구는 “지방 정부의 서비스들을 진정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보다 그 서비스들을 정확하게 표상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표면상 반스탈린주의를 내세운 신자유주의적 신노동당 정부는 이상한 반복 강박 속에서 동일한 경향을 드러냈다. 정부는 실제 세계의 결과들이 오직 외양(홍보)의 층위에 등록되는 한에서만 중요시되는 그런 계획들을 수행하곤 했다. 신노동당 정부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도입했던 악명 높은 ‘목표치’가 이를 잘 보여 주는 사례다. 프로세스가 확립되어 있고 강철 같은 확실성을 지니고서 반복되면 목표치는 곧바로 성과를 평가하는 방법이기를 그치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학교 시험에서 기준에 미달할까 봐 느끼는 불안은 이제 영국의 여름철마다 볼 수 있는 규칙적인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선배들보다 실력이나 식견이 떨어진다면 이는 시험을 치르는 자질 자체가 퇴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교수법이 시험을 통과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협소하게 초점이 맞춰진 ‘시험용 반복 연습’이 여러 과목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대체한다. 이와 유사하게 병원은 심각하고 긴급한 수술 대신 수많은 일상적 절차를 먼저 실행하는데, 그래야 (수술률, 성공률, 대기 시간의 축소 등) 평가 기준상의 목표치를 더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찰될지 아닐지를 모른다는 사실이 감시 장치를 내면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관찰되고 있는 듯이 처신하게 된다. 그리고 학교나 대학 심사의 경우 우리를 평가하는 일차적인 요소는 교사로서 우리가 발휘하는 능력이 아니라 관료로서 우리가 보이는 성실함이다. 다른 기이한 효과들도 있다. 교육 표준 행정청이 이제 대학의 자기 평가 체계들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대학은 실제로 받을 만한 등급보다 더 낮게 자체의 제도 및 수업을 평가함으로써 혜택을 받으려 한다. 그 결과는 마오주의적 고해 성사의 포스트모던 자본주의 판본으로, 여기서 노동자들은 항상적인 상징적 자기 폄하에 가담하도록 요구받는다. https://ridibooks.com/books/852002085
도사장
예시로 나오는 영화 다봤는데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여기 코멘트들 보니 또또 나만 뭔말인지 모르는거 같군...
루루즈
4.0
탁월한 글이다! 포스트자본주의 라는 용어를 고안해낸게 맘에 들었고 여기서 인용되는 영화들도 궁금해지게 만드는. 보통은 모르는 영화 인용하면 급 집중력하락하기 마련인데 피셔의 글은 그렇지 않았음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도 물론이고요. 아숩다 피셔를 이제야 알게돼서
BB
4.5
그 일반 의지라는 개념 자체를 소생시킬 필요를, 개인 및 그들 이해 관계의 총합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공적 공간이라는 관념을 되살리고 현대화할 필요를 수반한다. -299p-
아차차
3.0
매력적인 문제의식 근데 저서 속 인용된 영화들이 죄다 안 보거나 처음 들어본 작품이라 영화 내용에 빗댄 설명이 나올 때마다 😴 <<< 상태가 됨 알폰소 쿠아론 <칠드런 오브 맨> 제임스 맥티그 <브이 포 벤데타> 존 카펜터 <괴물> 마틴 스코세이지 <좋은 친구들> 쿠엔틴 타란티노 <펄프 픽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비디오드롬> 마이클 만 <히트> 폴 슈레이더 <블루 칼라> 앨런 파큘라 <패럴랙스 뷰>
갑수
4.5
날카로운 지적 그래서 대안은? 쉬운 걸로 공부 더하고 읽고 싶음 배경지식이 너무 부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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