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인간의 만남을 꿈꾸며
물질 가치가 최(最)우선시되는 오늘날, 우리는 각기 나름의 성취와 성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세속화되고, 또 경쟁의 고삐를 조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 한 발짝만 물러나 보자. 그리고 경쟁하기보다는 부쟁(不爭)하고, 나아가기보다는 물러나며,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무위자연의 순리를 일깨웠던 노자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삶의 여유를 되찾고, 심신의 힐링(healing)을 도모하자. 장차 언젠간 문득, 다투지 않음으로써 이기고, 물러남으로써 나아가며, 비움으로써 채울 수 있는 이치와 지혜를 감오(感悟)하며 놀라워하리라.
이것이 바로 노자가 꿈꿨고, 우리 또한 그 꿈을 꿔야 할, ‘우주와 인간의 만남’을 통해 이룩되는 아름다운 삶의 환희요, 이상이다.
출판사 서평
노자 <도덕경>, 얼마나 쉽고 바르게 읽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인문학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문학의 핵심인 고전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아무래도 고전을 읽고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국내 동양 고전 번역서의 학문적 신뢰도는 어느 정도일까?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존 <노자> 번역의 왜곡과 오류는 특히 심하다. 공자 사상의 핵심이 인(仁)이라면, 노자 사상의 핵심은 도(道)다. 따라서 노자 철학의 풀이는 반드시 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바탕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노자가 말하는 도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학자들마다 나름의 논리로 <노자>를 번역하면서, 너나없이 ‘기시인비(己是人非,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름)’를 외치며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어렵다는 이유로 <노자> 읽기를 마다하는 사람들만 탓할 수 있겠는가?
박삼수 교수의 <노자> 번역과 해설은 기존의 왜곡과 오류를 일일이 바로잡았고, 또한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책 전편에서 그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 한 가지만 보자.
제1장 “고상무, 욕이관기묘; 상유, 욕이관기요(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에서, ‘상무(常無)’와 ‘상유(常有)’의 ‘상’을 기존 번역서들은 대개 ‘항상’.‘언제나’의 뜻으로 옮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문법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무’와 ‘유’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형용사)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곧 ‘상도(常道)’의 ‘상’과 같은 의미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은 「천하편(天下篇)」에서 “노담(노자)이 그 유풍(遺風)을 듣고 아주 좋아하여 ‘상무’와 ‘상유’의 사상을 건립하였다.(老聃聞其風而悅之, 建之以常無有)”라고 한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왕필(王弼)이 ‘무’와 ‘유’를 각기 그 다음 ‘욕(欲)’ 자(字)와 잇대어 ‘무욕(無欲)’과 ‘유욕(有欲)’으로 풀이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그 견해를 따르고 있으나, 그 또한 <장자>의 이 말을 보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왕필의 풀이는 또 문법적으로는 ‘고(故, 그러므로)’ 자(字)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논리 사상적으로는 ‘무욕’은 강조하되 ‘유욕’을 반대한 노자의 기본 사상에도 맞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제56장)
이는 진실로 도(道)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도를 말하지 않고, 함부로 도를 말하는 사람은 진실로 도를 알지 못한다는, 노자의 말이다.
고전을 ‘쉽게’ 읽고 이해하는 지름길은 뭐니 뭐니 해도 ‘바르게’ 읽는 것이다. 박삼수 교수의 <노자> 번역과 해설이 과연 얼마나 ‘쉽고 바르게’ 다가오는지, 독자 여러분의 철저한 확인과 엄정한 평가가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