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국과 미국의 물리학회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여성, 그것도 한국 여성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2024년에 125주년을 맞은 미국 물리학회 회장으로 임기를 시작한 김영기 교수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아시아인(여성)으로서는 우젠슝에 이어 두 번째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2024년 7월 한국 물리학회 차기 회장으로 선출되어 2025년 1월 임기를 시작하는 윤진희 교수는 한국 물리학회 72년 역사상 첫 여성 회장이다.
21세기도 1/4이 지나간 지금에서야 미국과 한국에서 물리학의 수장으로 여성이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화학, 생물학 등의 다른 과학 분과와 비교해도, 물리학은 특히 여성의 비율도 낮을뿐더러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도 여성이 수상한 사례가 적다. 극히 최근(2018년 이후)에서야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전의 100여 년 동안 마리 퀴리와 마리아 괴페르트메이어 단 두 명의 여성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왜 물리학에서는 이토록 여성을 보기가 어려운 걸까?
『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의 저자이자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한 마거릿 워트하임은 이 질문에 대해 도발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2500년 동안의 물리학 역사를 훑으며, 그는 여성이 배제되어 온 이유가 서구 물리학 문화 자체의 문제, 즉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학파에서부터 21세기 물리학계까지 이어져 온 뿌리 깊은 성차별적 편견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물리학이 다른 과학보다도 여성의 진출이 적었다는 것이다.
마거릿 워트하임은 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에서 시작해 서구의 대표적 과학자인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브루노,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등이 남긴 발언, 편지, 문헌, 당시 과학계와 종교계의 사료 원문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과학계가 만들어낸 ‘신화’와 ‘이야기’가 아닌 실제의 역사에서 길어 올린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로 과학과 종교가 대립했다는 ‘신화’에 관해 엄밀한 검토 후 반박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말로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그의 생애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원문 표현을 그대로 인용해가며 고증하고, 갈릴레이 재판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상황과 당시 갈릴레이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며, 과학의 순교자로 알려진 브루노 또한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종교개혁에 관한 주장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당대 물리학자들도 그의 과학적 견해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짚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종교가 어떻게 저 유명한 과학자들이 이끈 과학의 발전과 깊이 연루되어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여성이 체계적으로 배제되었으며 결국 어떻게 물리학이 여성을 잃어버렸는지를 입증한다. 종교가 처음에 수도원을 세울 때는 여성을 받아들였다가 ‘개혁’을 거치면서 여성의 참여와 대학 입학을 금지하게 되는 과정, 그럼으로써 르네상스 이후 각국에서 학회를 세울 때부터 여성의 참여를 막는 전통이 형성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현대물리학계의 여전히 종교적이고 여성 배제적인 경향이 어떻게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까지 이어지는지를 치밀하게 밝힌다.
저자는 수리-물리학이 태동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남녀 이원론과 여성혐오적 문화가 형성되었고, 중세의 종교 및 철학, 근대과학과 계몽주의를 거치며 이러한 세계관이 더욱 공고해졌다고 말한다. 이로써 우주와 그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 및 섭리는 남성들만이 연구하고 결정하는 것이 되었으며, 여성은 교육받을 수도, 학계에 입회할 수도, 실험실에 들어갈 수도, 마땅히 받아야 할 노벨상을 받을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학 역사를 통해, 저자는 여성이 물리학(계)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물리학이 여성을 ‘잃어버린’ 것이며, 과학(계) 그 자체가 여성 배제의 ‘적극적 기여자’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토록 남성 편향적 물리학이 학계와 사회의 별다른 제동 없이, 만물이론과 같은 유사 종교적 목표를 위해, 인류와 지구 생태계 존속에 쓰일 수 있을 수백억 달러의 예산을 쏟아붓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성이 화학과 생물학 등의 다른 과학계에 더 많이 진출함으로써 생긴 변화를 나열하며, 물리학계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물리학 ‘문화’가 바뀌어야 함을 역설한다. 물리학 문화의 변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사안들, 즉 교육에서의 차별 문제, 남성 위주의 학계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여성 배제, 미국 대학 정교수의 여성 비율이 여전히 13%밖에 되지 않는 현실 등을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조한다. 이는 21세기 전 세계 물리학계 모두와 사회 전체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저자는 명확하게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