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에 따랐을 뿐인데 왜 점점 불평등해질까?
불평등을 만들고 유지하는 ‘게임의 규칙’을 밝힌다!
― 미국 대학에서 불평등 관련 과목의 교재로 사용되는 최고의 입문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소득 및 자산 불평등이 극대화되고 중간계층이 사라지는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이미 ‘10 대 90’ 혹은 ‘1 대 99’ 사회는 친숙한 말이 되었고 심지어 ‘0.1 대 99.9’, ‘0.01 대 99.99’라는 수치까지 세간에 오르내린다. 이른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졌다는 건 공공연하거니와, 노동 유연화와 비정규직 착취에 기댄 산업 구조의 공고화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위험하지 않은 일자리를 구하는 일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사실 오늘날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이런 분석 자체가 이미 너무나 진부해져버렸다는 게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마이클 슈월비는 《야바위 게임: 불평등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재생산되는가》를 통해 불평등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해 묻는 것이다. 즉 ‘어떻게 이토록 불평등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불평등이 유지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토대가 되는 ‘사회학적 분석’과, 그에 대한 이해를 돕고 분석에는 담기지 못한 진실까지 드러내는 ‘허구의 이야기’를 오가면서, 다양한 시점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슈월비는 법, 정책, 관행, 일상을 규정짓는 ‘게임의 법칙’이 차별이 만들어내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밝혀낸다. 그렇게 결국 그것이 ‘있는 자’들을 위해 조작된 ‘야바위 게임’임이 드러난다. 또한 성별과 인종에 따른 차별을 통해 게임을 유지하고, 우리 스스로 이러한 불평등을 승인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밝혀낸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현 체제의 ‘대안은 없다’는 무기력한 세계관을 넘어, 연대를 통해 새로운 대안과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력의 해방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출발점: 이 불평등을 보라!
슈월비는 독특한 강의를 통해 불평등의 현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강단 앞에 10명의 학생을 앉힌다. 각각이 미국 인구의 10퍼센트를 상징한다. 다시 종이 접시 10개를 꺼낸다. 각각은 미국의 부의 10퍼센트에 해당한다. 그리고 가장 부유한 10퍼센트부터 가장 가난한 10퍼센트까지, 미국 인구가 소유한 부의 양과 동일하게 접시를 나눠준다. 가장 부유한 10퍼센트에게는 무려 접시 7개, 즉 부의 70퍼센트가 돌아가지만, 가장 가난한 60퍼센트에게는 각각 6분의 1조각만이 돌아간다. 학생들의 탄식이 나온다. 슈월비는 마지막 몇 조각은 정말 작아져야 하지만, 종이 접시를 그렇게 자르기 힘들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부의 분배에 있어서 극단적인 불평등은 사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리고 슈월비는 딱딱한 도표와 수치 대신, 종이 접시를 통해 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실태가 생각의 출발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불평등이 얼마나 심한지에 대해 전하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나아가 불평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재생산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질문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불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부의 기원: 절도·약탈·착취
자원의 불평등은 자연현상 같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슈월비는 평등한 사회를 먼저 상정하고, 어떻게 그 사회가 불평등해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답은 세 가지이다. 같은 집단 내의 자원을 ‘절도’하거나, 집단 밖의 외부자를 ‘약탈’하거나, 보호비를 뜯어내거나 노동의 결과물을 부당하게 가져가는 식의 ‘착취’를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사유실험이지만, 실제 역사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인류는 약 15만 년 전에 출현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평등하게 살아왔다. 이것이 뒤바뀐 건 1만 2,000년 전 정착된 농경 생활의 출현 이후이다. 잉여생산물이 생겨나자, 소수가 불평등하게 자원을 분배하고 더 차지하게 되었으며, 결국 계층화된 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현대로 올수록 불평등의 기원으로서의 절도·약탈·착취에 대해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절도·약탈·착취가 계속해서 이루어져왔음이 드러난다. 슈월비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약탈과 착취와 학살, 아프리카인을 노예화한 일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든다. 한국의 경우에도 일제 아래에서의 피식민지 역사와 이후 가혹한 노동조건에 의한 경제발전은 절도·약탈·착취가 근현대까지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불평등을 유지하는 방법
① 게임을 조작하라!
부의 기원만으로는 왜 불평등이 계속 유지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지배계층은 약탈적이거나 착취적인 관계를 장기간에 걸쳐 안정화시켜야만 한다. 슈월비는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규정하는 ‘게임의 규칙’을 조작함으로써 불평등의 재생산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물론 속임수나 매수 같은 방식도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규칙 자체를 불공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이런 조작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지 않고 따르는 것만으로도 불평등이 자동적으로 발생하고 재생산된다.
예컨대 자본주의라는 게임이 참여한 관리자는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임금은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없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게임판 바깥으로 쫓겨날 테니 말이다. 나아가 슈월비는 ‘소유권이 인권에 우선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말한다. 자산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굶어죽든 말든, 자신의 농장과 공장을 늘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법을 통해 뒷받침된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게임의 규칙이지만, 슈월비는 이러한 통념이야말로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지배계층은 국가를 차지하고자 애쓴다. 물론 경제적 착취자가 곧 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속한 경제적 계급이 국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경제활동에 적용되고 부의 분배를 결정짓는 규칙들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회복지의 수준을 정하고, 이민 정책을 만들고, 최저임금을 설정하고, 무역협정을 맺고,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것 모두를 결정할 권한을 갖는 것이다. 게다가 경찰과 군대를 통제하여, 불평등한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 드는 이들을 통제하는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다.
슈월비는 ‘게임의 규칙’의 조작을 통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체적인 사례 역시 제시한다. ‘노동법’을 그대로 따르면 노동자들의 단결이 어려워진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판결이 자연스레 돈 있는 자가 선거 과정에 개입할 길을 열어준다. ‘법인’의 이름 뒤에 숨어 자본가들을 책임을 회피한다. ‘세법’에 착실하게 따르는 것만으로 양극화가 심화된다. 계층에 따라 시작점이 다른 모든 수험생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함으로써 계층의 세습이 강화된다. 우리가 시스템을 움직이는 규칙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② 상상력을 억압하라!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규칙이 정당할뿐더러,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보인다. 슈월비는 이러한 인식이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념 체제’로서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현실을 보면,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그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상상력마저 제약하고 만다.
예컨대 인간이 본래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띤다는 현실의 정의를 받아들이면, 경쟁과 불평등은 당연하며 협동과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월한 혹은 평범한 ‘인간’과 착취하거나 폭격해도 마땅한 ‘타자’를 구분함으로써 차별을 정당화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