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으로

이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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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융과 라깡에 의한 정신분석의 발전과 밀턴 에릭슨에 의한 현대 최면의 성립을 탐구한다. 이 두 조건 자체에 대한 탐구는 라깡, 융, 밀턴 에릭슨에 대한 일종의 비교 연구의 형태를 취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적 짜임새에 대한 일종의 전체상(全體像)을 가설적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가설적 전체상들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보다는 그들의 문제틀을 추적한다. 그래야만 오히려 그들의 가설적 전체상들의 이유(理由)가 보다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교 연구를 통해 저자는 인간의 내면적 짜임새의 기본 구조를 사고한다. 그러한 비교 연구가 라깡, 융, 밀턴 에릭슨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닌 논리적 순서에 따른 것이다. 즉, 저자는 라깡이나 융 자신의 주관적 판단과는 무관하게, 라깡의 이론적 노동이 봉착한 난관의 출구는 융에게 있고, 융이 맞부딪친 이론적 궁지의 출구는 밀턴 에릭슨에게 있다고 설정한다. 중요한 것은 라깡, 융, 밀턴 에릭슨 모두가 진정한 주체성을 탐색하면서 무의식을 넘어서는 그 무엇, 다시 말해 영혼의 문제에 부딪힌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숙고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영혼의 이론사(史)를 재해석하고, 과학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영혼의 엄밀한 내재적 개념을 확립하기 위한 작업이 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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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머리말 _ 7 1. 라깡: 최종적 주체성을 찾아서 _ 23 열정의 궤적과 동요 _ 25 단계 1, '우리 존재의 핵심'으로서의 욕망 _ 29 단계 2, 남근에의 욕망 _ 38 단계 3, 향유에 대한 방어로서의 욕망 _ 63 단계 4, 주체성으로서의 무의식적 사고 _ 84 단계 5, 주체성으로서 판타즘의 논리 _ 100 단계 6, 상블랑으로서 남근 _ 116 예외적 시점, 구원으로서의 영혼 _ 125 2. 융: 자기, 육체를 껴안는 영성 _ 135 영적 현실에 대한 확신 _ 137 기독교 비판 _ 140 인식론적 입장 (1): 경험과학과 형이상학 사이 _ 147 인식론적 입장 (2): 연금술의 심리학적 가치? _ 156 영혼의 용례들 _ 163 무의식에서부터 _ 176 원형을 거쳐 _ 206 자기로 _ 217 3. 밀턴 에릭슨: 자아와 비(非)자아적 주체 _ 241 무의식에의 직접적 통로 _ 243 최면의 정세(情勢)와 에릭슨의 입장 _ 248 의식과 또 다른 의식 _ 254 트랜스의 단계들 _ 267 최면유도와 자아의 해제 _ 275 자아에 대한 최면과학적 인식 _ 286 자아의 해제와 탈(脫)인격화 _ 310 최면사란 누구인가? _ 316 무의식적 관념의 힘 _ 325 퇴행과 과거의 존재 _ 334 비자아적 주체에 대한 몇 가지 덧붙임 _ 342 새 한 가지 개념적 노동·영혼에 대하여 _ 349 실재의 새로운 지표 _ 351 영혼의 과학적 용법에 대하여 _ 355 육체와 영혼의 대립에서 자아와 영혼의 대립으로 _ 363 영혼의 수동성에 대하여 _ 371 동경에 대하여 _ 380 영혼의 소통에 대하여 _ 394 선(善)의 문제와 영혼의 질식 _ 403 영혼의 차별성과 동일성 _ 414 영혼의 순례에 대하여 _ 431 영혼의 개념 _ 442 결론을 대신해서 _ 453 후기 _ 459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책에 대하여 이 책은 다음 두 조건에 입각한다. 1) 융과 라깡에 의한 정신분석의 발전 2) 밀턴 에릭슨에 의한 현대 최면의 성립 1)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에 대해 융과 라깡이 새로운 개념적 노동을 행했음을 뜻한다. 2)는 최면 현상들의 규칙적 재생산이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우리가 무의식 속으로 직접 들어가 무의식과 함께 노동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 책은 먼저 이 두 조건 자체를 탐구한다. 그와 동시에 이 두 조건으로부터 인간 내면의 기본적 짜임새를 탐색한다. 이 두 조건 자체에 대한 탐구는 라깡, 융, 밀턴 에릭슨에 대한 일종의 비교 연구의 형태를 취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적 짜임새에 대한 일종의 전체상(全體像)을 가설적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가설적 전체상들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보다는 그들의 문제틀을 추적한다. 그래야만 오히려 그들의 가설적 전체상들의 이유(理由)가 보다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교 연구를 통해 저자는 인간의 내면적 짜임새의 기본 구조를 사고한다. 그러한 비교 연구가 라깡, 융, 밀턴 에릭슨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닌 논리적 순서에 따른 것이다. 즉, 저자는 라깡이나 융 자신의 주관적 판단과는 무관하게, 라깡의 이론적 노동이 봉착한 난관의 출구는 융에게 있고, 융이 맞부딪친 이론적 궁지의 출구는 밀턴 에릭슨에게 있다고 설정한다. 중요한 것은 라깡, 융, 밀턴 에릭슨 모두가 진정한 주체성을 탐색하면서 무의식을 넘어서는 그 무엇, 다시 말해 영혼의 문제에 부딪힌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숙고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영혼의 이론사(史)를 재해석하고, 과학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영혼의 엄밀한 내재적 개념을 확립하기 위한 작업이 행해진다. 제1장에서는 최종적 주체성을 확인하려는 라깡의 여정을 추적한다. 라깡은 개인적 이론사(史)의 여러 시기에 서로 다른 최종적 주체성들을 설정한다. 저자는 주체성을 사고하는 라깡의 단계들을 다음과 같은 일곱 단계로 구분한다. 1) 우선 라깡은 욕망 속에서 주체성을 본다. 이것은 1957년까지의 시기이다. 2) 1958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남근(男根, phallus)으로 존재하려는 욕망을 존재론적인 욕망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최종적 주체성으로 여긴다. 3) 그러나 1959년 말부터는 입장이 달라진다. 이제 그는 욕망을 거세에 의해 제약된 것으로 간주한다. 금지에 의해 각인된 욕망은 향유에 맞서는 방어가 되고, 그래서 온전히 주체적 성격을 가질 수 없게 된다. 4) 라깡은 1964년부터 무의식적 사고를 말하기 시작한다. 무의식적 사고가 무의식적 코기토(cogito)로서의 주체성이라는 것이다. 5) 그는 1966년 말부터는 판타즘의 논리를 무의식적 사고의 핵심, 즉 최종적 주체성으로 간주한다. 6) 마침내 1971년부터 라깡은 남근에의 욕망을 ‘거짓된 흉내(semblant)’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7) 1973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하나의 예외적 시점이 도래한다. 라깡은 남근적 향유에 대립하는 여성적 향유를 초월적인 향유로 제시하고, 최종적 주체성이 영혼일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하지만 그는 동요를 드러내고 머뭇거린다. 저자는 이 일곱 단계를 하나씩 세밀하게 다룬다. 이 일곱 단계 가운데 중요한 것은 4), 5), 6), 7)의 단계다. 셋째 단계에서부터 입장의 반전이 시작된다. 그 뒤 라깡은 무의식적 사고(넷째 단계)와 판타즘의 논리(다섯째 단계)에서 최종적 주체성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라깡의 접근방법은 한계를 노출한다. 즉 그의 형식주의적 접근은 다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것에 그칠 뿐, 무의식적 사고와 판타즘의 논리 내부로 침투하지는 못한다. 여섯째 단계에서는, 둘째 단계에서 ‘우리 존재의 핵심’으로 제시되었던 남근에의 욕망이 ‘거짓된 흉내’로 전락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남근에의 욕망을 사고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즉, 그는 여전히 인간의 욕망이 남근에의 욕망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일면적인 것으로 만들고, 다른 측면들을 놓친다. 일곱째 단계에서 라깡은 영혼에 대한 사고를 제대로 밀고나가지 못한다. 타자들의 평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라깡이 이렇게 멈춰선 지점에서 융을 새롭게 읽는다. 제2장에서는 ‘무의식’으로부터 ‘원형’을 거쳐 ‘자기’에 이르는 융의 개념적 노동을 다룬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융의 고유한 문제틀 속에 위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깡과 달리 융은 영적 현실의 실재를 확신한다. 융은 어떤 종교도 신봉하지 않지만, 그의 평생의 이론적 노동은 영성적 실체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포이어바흐와는 달리 종교를 인간적 투사의 구성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종교를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제한된 표상들로 여긴다. 경험과학자로서의 융은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적 표상들인 신화, 종교, 연금술 등을 연구한다. 하지만 그의 인식틀이 일정한 형이상학적 전제를 내포하는 것도 틀림없다. 융은 저술들에서 영혼이란 단어를 애용한다. 하지만 그 용례들은 다양하고 혼란스럽다. 그 용례들은 심리와의 동의어, 아니마와 아니무스, 내면의 어떤 정신적인 힘, 신과 접점을 이루는 우리 내면의 영적 실체 등등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혼란스런 용례의 원인은 융이 영혼을 엄밀한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영혼의 개념은 융의 과학적 관심이 아니다. 융은 영혼 개념을 포괄할 수 있는 다른 개념을 사용한다. 그 개념은 ‘자기’다. 저자는 이 제2장에서 융의 고유한 문제틀과 영혼의 용례를 소개한 뒤, 무의식, 원형, 자기로 이어지는 그의 개념들을 다룬다. 융은 인간 심리의 층위들을 의식, 개인적 무의식, 집합무의식으로 제시한다. 이 가운데 융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집합무의식이다. 집합무의식은 인류에게 공통되는 보편적 무의식으로, 융은 그 원천을 다음과 같이 사고한다. 1) 동물적 단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 2) 역사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성립한 것, 3) 인간의 두뇌구조에서부터 비롯된 것. 결국 집합무의식은 종(種)으로서의 인류의 자연적 소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융은 점점 후기로 가면서 초월적 원천을 갖는 집합무의식을 말한다. 그 결과 집합무의식은 동물적 원천과 초월적 원천이라는 두 원천을 갖게 된다. 우리는 초월적 원천을 갖는 집합무의식을 ‘영적 무의식’이라고 별도로 개념화할 수 있다. 원천이 다른 실체들은 상이한 명칭으로 불러줘야 하기 때문이다. 원형은 기본적으로 집합무의식 속에 내재한다. 그 역할은 우리를 감정적으로 사로잡아 특정한 심리적 상(像) 또는 형식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형은 뚜렷한 목적을 갖는 주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원형의 주체성 → 목적성 → 운명’이라는 연결고리가 성립한다. 후기에 융은 원형의 주체성의 원천을 ‘신성한 어떤 것’으로 설정한다. 그 결과 원형은 ‘자기’ 개념과 일정하게 겹쳐진다. ‘자기(自己)’ 개념은 융의 이론적 목표다. 융에게서 ‘자기’의 속성은 의식과 무의식의 전체성을 이끄는 중심, 개인적이자 보편적인 것, 대극의 통일, 4원적 구조, 순수한 완전성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성, 우리 내면의 신 등등이다. 이러한 ‘자기’는 원인이자 결과이고, 출발점이자 목표이며, 새로운 총체성을 향한 과정이다. 융은 새로운 총체성을 향한 과정으로서의 ‘자기’를 정신과 결합한 영혼이 지상의 육체 속에 편입되어 육체의 악(惡) 또는 어둠을 껴안은 뒤, 정신의 원천인 일자(一者)를 향해 되돌아가는 과정으로 제시한다. 지상의 악을 껴안아야만 영혼이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융은 영혼을 정신 및 육체와의 관계와 일자에 가닿는 과정 속에서 사고한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그러한 관계와 과정을 표현하려고 ‘자기’ 개념을 사용한다. 하지만 융이 사고하는 영혼의 관계는, 특히 그것이 정신과 일자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과학적으로 수용되기 어렵다. 저자는 이 한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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