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시대에 꼭 맞는 우화! 브레히트의 풍자 산문, ‘코이너 씨 이야기’|
구 동독 출신의 학자 미텐바이츠는 브레히트의 작품 중 특히 산문 부분의 연구 성과가 미약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브레히트는 충분하게 평가되지 못했다. 이 산문의 매력과 개인적인 특별함이 이제라도 발견되어야 한다.”(김길웅, 성신여대.) 우리에게도 이 말은 똑같이 적용된다. 희곡 작가나 서정시인으로서의 브레히트에 대해서는 그나마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산문작가 브레히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고,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세가 어떠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브레히트만의 방식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코이너 씨’ 혹은 ‘K 씨’를 주인공으로 한 브레히트의 산문들은 한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현실을 비틀고 변화를 갈망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그것은 ‘코이너 씨 이야기’가 브레히트 작품 세계가 중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창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깊이 빠져 문학과 예술을 통한 사회변혁을 꿈꾸던 시기였다. 이런 포부를 작품으로 옮기는 데 열중했던 브레히트는 이 무렵 시 ‘도시 거주민을 위한 독본’, 희곡 ‘예스맨과 노맨’ 등을 발표하는데 ‘코이너 씨 이야기’ 또한 이들 작품과 맥락을 같이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고,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깊이 고민했던 브레히트의 낭만적 세계관이 물씬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 연작 산문인 것이다.
‘코이너 씨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산문이면서 동시에 변증법적 사고를 익힐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라 하겠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코이너 씨|
‘코이너 씨 이야기’ 연작은 전적으로 서민적이고, 반反영웅적이며, 확립된 질서에 굴종하지 않는 인물의 삶을 보여 준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감동이 있으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공감을 담고 있는가 하면, 체제에 대한 결연한 비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거의 30년에 걸쳐 쓰여진 이 산문들은 1쪽을 채 넘지 않거나, 몇 줄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다. 놀라운 것은 그 짧은 한 편의 산문에 엄청난 은유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만들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지 않는 법을 훈련시키며, 동시에 해학과 웃음을 잃지 않는 작품들이 가득하다. 그러면서 “신발보다 나라를 더 많이 바꿔 치우던” 시대에 경계인으로 살면서 망명을 꿈꾸었던 자신의 처지를 빗대고 있기도 하다.
수많은 아포리즘의 향연을 눈앞에 둔 독자는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왜 다시 브레히트인가?|
브레히트의 작품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자의적이라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작품을 이용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는가, 문제 제기하는 것도 당연하다. 브레히트는 변증법이 ‘굳어진 관점들을 해체하고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서 실제를 관철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브레히트를 소비하는 지점이 딱 거기에 있다고 보여진다. 지배자의 허위의식을 비웃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태도다. 브레히트는 결론을 내려놓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혹은 무대 아래 관객)에게 스스로 답을 찾도록 안내하는 안내자에 가깝다.
이데올로기와 현실은 모순을 이룰 수밖에 없고, 그런 모순이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주장을 문학으로 풀려 했던 브레히트. 그 고민이 가장 순화되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작품이 바로 ‘코이너 씨 이야기’라 하겠다. K 씨를 주인공으로 한 갖가지 이야기들은 이 사회가 지닌 모순을 해학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작품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 모순을 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여러 K 씨를 탄생시키고자 했던 브레히트의 소망을 즐겁게 만나 보자. 낡지 않은 문제의식, 혹독한 비판을 누그러뜨린 놀라운 풍자들에서 ‘문학의 힘’을 새삼스레 깨닫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