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 문학의 대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사탄탱고》《저항의 멜랑콜리》《전쟁과 전쟁》에 이은
라슬로 4부작의 마지막 작품
작가가 인정한 인생 단 한 권의 소설!
평생 하나뿐인 사랑을 품은 벵크하임 남작, 사랑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 죽다
“파멸의 공포 속에서도 예술의 힘을 다시 일깨운 작가”
신작 《헤르쉬트 07769》로 한국 독자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헝가리 현대문학의 거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20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위원회는 “파멸의 공포 속에서도 예술의 힘을 다시 일깨우는 강렬하고 비전적인 작품”을 수상 이유로 밝히며, 그가 현대 문학이 잃어버린 ‘예언적 언어’의 가능성을 다시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파멸과 구원 사이, 언어의 경계 위를 걷는 문학의 예언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1985년 데뷔작 《사탄탱고》를 통해 문단에 등장한 이후 인간 존재의 불안과 세계의 붕괴를 압도적인 문장으로 형상화해온 작가다.그는 끝없이 이어지는 긴 문장과 강렬한 서사적 긴장으로, ‘읽는 수행’이라 불릴 만큼 독보적인 문체로 독자를 몰입시킨다.
알마출판사는 작가의 대표작 여섯 권,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 《라스트 울프》 《세계는 계속된다》 《서왕모의 강림》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을 국내에 소개해왔으며, 2026년 1월에는 신작 《헤르쉬트 07769》(Herscht 07769)를 출간할 예정이다.
《헤르쉬트 07769》은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는 남자 ‘헤르쉬트’가 문명 붕괴 이후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언어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숫자와 기호로만 소통하는 사회에서, 그는 더 이상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인간들의 세계를 마주한다.이 작품은 작가가 일관되게 탐구해온 ‘존재의 불안’과 ‘언어의 종말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가장 밀도 높게 구현한 후기작으로 평가받는다.
전 세계로 확장되는 그의 문학 작품은 오랫동안 조용한 반향 속에서도 깊은 독자층을 형성해왔다.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인간과 예술의 근원을 향한 그의 끝없는 탐구가 다시 한 번 세계의 언어로 되살아난 순간으로, 독자들에게 강렬한 울림을 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읽기》(가제) 및 벨라 타르 영화 상영회 추진
알마출판사는 이번 수상을 기념하여, 결코 쉽지 않지만 반드시 읽어야 할 문학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전하기 위한 소책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읽기》(가제)를 선보일 예정이다.필진으로는 한경민 교수, 조원규 시인, 정성일 영화평론가, 장은수 문학평론가, 금정연 평론가, 김유태 시인 등이 참여해 각자의 시선으로 작가의 세계를 해석할 예정이다.
또한 작가의 문학 세계를 영상으로 확장해 조명하기 위해, 또 한 명의 세계적인 거장 타르 벨라 감독의 영화 《사탄탱고》와 《저항의 멜랑콜리》를 원작으로 한 《베이크마이스터 하모니즈》(Werckmeister Harmonies) 상영회를 추진하고 있다.
라슬로 작품의 정점에 있는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은 길고도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어 아직 번역되지 않은 《전쟁과 전쟁》까지, “현대 아포칼립스 문학의 대가”라는 수전 손택의 평가대로 곧 멸망할 것만 같은 암울한 세상을 담아내는 데는 어쩌면 라슬로의 문장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은 라슬로 4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엄청난 분량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 특유의 세계관으로 라슬로 작품의 정점을 찍는다. 길고, 마침표 대신 쉼표로 연결되며, 복잡하면서도 모호한 의식 상태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라슬로 특유의 표현 방식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이 라슬로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품인지는 라슬로의 말에서 드러난다. 그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한 권의 책만 쓰고 싶다고 천 번을 말했다. 첫 번째 책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래서 두 번째 책을 썼다. 두 번째 책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래서 세 번째 책을 썼다. 이제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실패에 대한 고백이자, 수십 년에 걸친 작가 인생에서 해온 모든 시도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은 단 한 권의 소설인 것이다.
수십 년에 걸친 라슬로 작품의 정점에 있는 소설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이전 소설의 카덴차”,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말의 리듬으로 악보를 쓰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이전 소설의 카덴차”라고 말한다. 카덴차는 악곡이나 악장을 마치기 직전에 연주자가 기교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구성된 화려하고 자유스러운 무반주 부분을 가리키는 음악 용어다. 원래는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연주했지만, 관습이나 작품의 본질에서 벗어나기 쉬워서 작곡자가 직접 악보에 표시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이 소설가로서 살아오는 동안 낙서한 것을 묶은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즉흥적이면서도, 라슬로의 기교를 최대한 발휘한 작품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차례는 악보와 같다. 다소 낯설고, 꼭지마다 붙은 제목은 가사 같으며, 악기 소리와 합창단의 목소리를 배열해놓은 것 같다.
라슬로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저장용으로만 활용한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게 1만 년의 살아온 결과라고요? 마이크, 노트북, 기술 사회가 전부인가요? 정말 슬프고도 실망스럽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 아인슈타인, 부처에서 안드레 세레메디에 이르기까지, 인간 역사에 그토록 많은 천재가 있었는데 말이죠.”
라슬로는 길디긴 문장을, 쉼표와 말이음표로만 연결되어 마침표도 없이 이어지는 문장의 굽이굽이를 머릿속에서만 다듬어낸다. 라슬로야말로 말의 리듬을 고스란히 살려내고 그 호흡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놓을 줄 아는 진정한 천재가 아닐까.
귀향, 인간의 영원한 그리움
라슬로는 어린 시절 이후로 어느 곳에서든 집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집은 불안정한 공간이고, 집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환상이다. 이 느낌은 원시적이고도 오래된 감정이다. 그렇기에 이런 느낌을 평생 유지하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자 행운이며 능력이다. 집에 있는 것처럼 느끼려면, 많은 것에 눈이 멀고, 많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집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애정은 안전의 문제다. 나를 보호해줄 가족이, 친척이, 친구가 없는 집은 안전하지 않다. 그런데도 벵크하임 남작은 집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더 이상 친숙하지도, 안전하게 보호해줄 대상도 없는 그곳으로, 다만 애정을 갈구하면서. 오래되고 잊힌 첫사랑이자 단 하나의 기억을 좇아, 그 또한 원시적이고 오래된 감정을 따라 다시 귀향한다.
귀향은 문학에서 거듭 되풀이된 아주 오래된 주제다. 이 소설은 가장 ‘헝가리적’인 문체로 가장 친숙하고도 오래된 가치가 사라져가는 것을 담았다. 라슬로는 귀향을 다룬 선구적 작품들이 지닌 고전적 클리셰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벵크하임 남작은 평생 단 하나의 사랑을 품고 살아갔고, 그 사랑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 죽는다. 마치 오래된 발라드처럼, 기사도의 노래처럼 말이다. 그래서 벵크하임 남작은 변함없는 가치와 그것의 종말을 귀향과 죽음으로 보여준다. 오래된 것에 경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