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모든 사유는 《구토》에서 흘러나왔고, 《구토》로 흘러든다”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사르트르 사상의 출발점!
-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한 국내 완역본
-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는 《구토》
“사르트르는 그 모든 비통한 역겨움을 표현하기 위해 광대짓도 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자주 그렇게 했다. 그는 일종의 어릿광대, 형이상학적 궁정의 어릿광대였다.”
_헤이든 카루스
“사르트르의 철학 저작 중 단연 가장 중요한 책!”
_한나 아렌트
“다행히 우리에게는 사르트르가 있었다. 후텁지근한 좁은 방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그는 신선한 공기였으며, 시원한 뒷마당의 상큼한 바람이었다.”
_질 들뢰즈
전쟁과 경제공황 이후 ‘신’이 부재한 세계,
인간 실존의 조건은 무엇인가
사르트르의 대표작 《구토》가 역자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매끄러운 번역으로 20세기 걸작 《구토》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준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해 출간하는 국내 완역본이다.
《구토》는 마치 탐정소설처럼 시작된다. 소설 첫 부분 〈편집자의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앙투안 로캉탱의 서류 가운데에서 발견”된 노트들을 “전혀 손대지 않고 발행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 노트들은 로캉탱의 일기이며 1932년 1월 초 무렵부터 쓰였다는 것, 로캉탱은 중부 유럽, 북아프리카, 극동지역을 여행한 후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구를 마치기 위해 3년 전부터 부빌이라는 도시에 정착해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 추가 단서로 주어진다. 이후 독자는 앙투안 로캉탱의 일기를 은밀히 들여다보며 자연스레 그의 탐험에 동행한다. 그리고 곧 로캉탱과 우리의 공동 탐사 대상이 로캉탱이 체험한 구토 현상임을 알게 된다.
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34쪽)
이렇게 시작된 로캉탱의 구토 체험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 문손잡이를 잡으면서,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보면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면서, 나이프 손잡이를 잡으면서…… 또한 로캉탱 자신, 그가 자주 들르던 카페, 부빌 시의 공원, 급기야 이 세계 전체가 구토로 체험된다. 이렇게 로캉탱의 삶 전체가 되어버린 ‘구토’의 의미는 무엇일까?
로캉탱은 철학교사로 일하며 작가를 꿈꾸던 사르트르의 분신이며 《구토》는 사르트르가 그의 철학적 사유와 체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곧 작품 속 구토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 실존의 조건을 묻는 사르트르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르트르의 철학 체계에서는 ‘신’이 부재한다는 가정하에 이 세계의 존재들은 신의 섭리, 즉 필연성의 논리에서 벗어나 우연성의 지배 아래 놓인다. 어떤 필연성의 논리에 의해서도 포획되지 않은 채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거기에 있는, 쓸데없는, 남아도는, 잉여적 존재들의 모습. 그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낯설고 부조리한 감정이 바로 ‘구토’다. 인류 역사상 가장 낙관적인 세기로 규정되는 19세기를 뒤로하고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 대공황을 경험했던 인간들의 위기의식, 특히 ‘신’의 부재로 인해 직면한 이런 위기의식을 사르트르 역시 고스란히 공감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그 위기의식과 무력감을 ‘구토’ 현상으로 포착해낸다.
왜,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문학을 통한 구토의 극복,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르트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토》에 대해 언급하며 이 작품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자 가장 잘 쓰인 작품으로 꼽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들 앞에서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참여문학론’을 주창한 사르트르는 문학비평론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어째서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세 가지 물음에 자문자답하며 문학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통찰한 바 있다. 《구토》는 사르트르가 주장해온 “문학은 이웃의 구원, 특히 억압과 폭력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자들의 구원을 겨냥해야 한다”는 것에는 부합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구토》는 작가 사르트르 자신의 구원 문제를 다룬 작품이며 나아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력감에 방황하는 현대인의 고뇌에 공명하는, 오늘날까지 유의미한 보편성을 띠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되고자 하지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실존에 대한 고뇌, 불안을 다룬 이 작품에서 사르트르는 자신을 투사한 주인공 로캉탱이 다름 아닌 문학을 통해 ‘구토’를 극복하고 진정한 삶으로 ‘구원’받는 모습을 그려낸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러면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이 이 책을 썼어. 카페에서 빈둥대던 빨간 머리 친구지.” 그리고 내가 이 흑인 여자의 삶을 생각하듯 내 삶을 생각할 것이다. 귀중하면서도 반쯤은 전설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410쪽)
《구토》는 인간의 극복 불가능한 삶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절망과 체념보다는 오히려 희망과 용기의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토》가 20세기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프레보, 스탕달과 플로베르, 지드와 프루스트, 포크너와 헤밍웨이까지
18, 19, 20세기를 잇는 ‘문학 창작의 교차로’에 놓인 작품
21세기에도 여전히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사르트르의 ‘글쓰기의 모험’
평범한 철학자이자 풋내기 작가에 불과했던 사르트르를 단번에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로 급부상시킨 《구토》는 수많은 소설 기법들을 망라한 작품이다. 사르트르는 1931년부터 약 7년에 걸쳐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18, 19, 20세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두루 섭렵했고, 그로부터 수많은 소설 기법들을 원용했다. 18세기 작가로는 프레보 등을, 19세기 작가로는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등을, 20세기 작가로는 지드, 프루스트, 말로, 셀린 등과 같은 프랑스 작가들과 카프카, 더스패서스, 포크너, 헤밍웨이 등과 같은 외국 작가들을 섭렵했다.
앙투안 로캉탱이 쓴 일기 형식을 취하는 《구토》에는 내적 독백,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환상소설 기법, 상호텍스트성, 패스티시, 패러디, 콜라주, 대화체와 구어체의 활용, 신체감각에 관련된 어휘의 확대 등 사르트르가 익히고 응용한 수많은 기법이 녹아 있다. 특히 신문 기사, 재즈곡 가사, 역사책, 식당 메뉴판, 백과사전, 포스터 등에 쓰인 글귀 또한 이 작품의 한 부분을 이루는데, 이러한 ‘콜라주’ 기법은 《구토》에 나타난 서술기법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렇듯 《구토》는 작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내딛는 사르트르에게 그 자체로 ‘글쓰기의 모험’이었으며 18, 19, 20세기를 잇는 ‘문학 창작의 교차로’에 놓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구토》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1960년대에 등장한 ‘누보로망(Nouveau roman, 새로운 소설)’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진다. 기존 소설의 형식을 부정하고(anti-roman, 앙티로망)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누보로망의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 인물의 해체, 이야기의 분절화, 전통적 시간관의 파괴, 일인칭 시점과 주관적 사실
siwon.hage
3.5
무한한 자유를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고독과 존재란 무엇인가’란 이름의 거창한 ‘사치’ 그놈의 뇌는 도대체 무슨 기능을 하는 건지, 회색빛이 계속 머릿속에 그려지는 소설. 아이러니하게도 삶과 존재에 대한 이 건조한 이야기가 사람들이 왜 종교와 신앙심에 기대어 극복을 하는지 그리고 구원을 바라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사회적으론 타인의 눈에는 지극히 정상인처럼 보일 것이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타인에 대해 항상 구분하고 쉽게 단정 짓는다. 나는 저런 행태들에 대해 참으로 답답함을 느끼는데, 타인에 비취지는 모습들이 어떻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한단 말인가. 광대처럼 보인다고 내면까지 광대일까? 겉으론 사람이 가벼워 보인다고 그 사람이 진지하고 진중한 면은 없는 것인가? 겉으론 멀쩡하게 보여도 속도 멀쩡할까? 그 누가 감히 타인에 대해 마음대로 낙인찍고 정의해버리는가.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부끄러운 내 과거를 반성하면서) 그건 그렇고 로캉탱이 제멋대로 살 수 있는 재력 을 젊은 나이에 갖추고 직업도 필요 없고 떠나고 싶으면 그냥 떠나면 그만이고 사회적 관계에도 관심 없고 부양해야 될 가족도 없는, 저 무한한 자유를 가진 상황에서 혼자 고독이니 구토니 책이나 써야겠다느니 존재가 머니 나불 거리는 게 꼴 보기 싫은 건 사실이다.
자드낌
4.0
모든 존재자는 이유 없이 탄생하고, 약하므로 연장되며, 우연히 죽음을 맞이한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자칫 삶이 허무해질지 모르지만 이를 모르고 사는 것은 더욱 의미가 없다. 이 사실을 알고나서 존재이유를 끊임없이 찾고 확인하는 것이 곧 삶의 이유다. 나는 나의 존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 이 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로 하여금 삶의 의지를 다지게 한다.
최일섭
4.5
우리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세상에 던져졌으니 자유롭고, 그래서 구토가 나온다. 결국 각자가 믿는 자신의 이야기가 스스로를 구원할 것이다.
이랑
1.5
정말 구토나오게 재미없다…제발 그냥 철학자로만 살지
hsiaokang
4.5
존재를 감각한다는 것이, 그럼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역겨운지 모른다. 전제는 너무나 옳은데 결말이 이러니 실존주의가 기만적 낭만주의처럼 느껴지지.
Alex
4.0
구토 유발 소설
밍슥
4.0
그저 태어난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토록 연약하고 유약한 존재는 어 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것은, 확실한 것은, 오직 스스로라는 사실을. 살아있음을.
Heung
4.5
삶의, 아니 만사의 부조리를 느낀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 모든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고, 쓸데없이 더해진 것이다. 이러한 우연성을 한껏 느끼고,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는 바로 그때, 구토가 밀려온다. 소설 초반부터 수사적이지 않고, 담백한 문장으로 주변을 관찰한다. 의심하기 위해선,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짧은 호흡의 문장으로 속도감을 더 한다. 앙투안 로캉탱은 왜 구토감을 느끼는 것인가? 로캉탱은 해석학을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모험'에 대해서 마치 '살면서 한 번도 모험을 해보지 않은 것처럼' 느낀다. 모험의 느낌은 어떤 사건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순간들이 서로 이어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순간은 다른 순간으로 이어지고, 또 이 다른 순간은 또 다른 순간으로, 계속 이렇게 이어지면서 각 순간은 소멸되고, 그것을 붙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속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 느낌이 바로 모험의 느낌이다. 또한 '모험'과 같은 관념적인 것들 말고, 현재가 아닌 것에 대해 의심한다. 로캉탱의 현재는 로캉탱의 육체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등으로. 반면 감각하지 못하는 것은 현재가 아니고, 로캉탱에게 있어 불명확해지는 것이다. 파스켈씨의 죽음 파스켈씨가 예정된 시간에도 바에 내려오지 않는다. 로캉탱은 어떤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 세상은 오늘도 내일도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 세상은 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면서 불안해 하기 시작한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파스켈씨를 볼 필요가 있다. ‘현재는 존재하는 것이었고,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들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내 생각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또한 사물들도 이름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 의심의 결론은, 존재의 쓸데없음이다. ‘나는 고민거리가 없다...(중략)...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 존재한다는 고민은 너무나 애매하고 형이상학적인 것이라서 부끄러울 정도다.’ ‘왜 웃었냐면 말이죠......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존재를 보전하기 위해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있지만, 우리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전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수많은 사물들이 이름을 잃는다. 사물들이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자신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여기 있을 뿐이다.’ ‘우리는 존재를 막론하고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각 존재자는 당황해하고 막연하게 불안해하면서 스스로가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 쓸데없이 더해진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다. 쓸데없이 더해짐, 이것은 그 나무들, 그 철책들, 그 자갈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존재는 필연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우연이다. 완전한 무상. 간혹 이 사실을 알아채게 될 때, 속이 뒤집어지고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구토다. 그러니까, 존재의 한없이 가벼움을 체감할 때 구토가 밀려오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에 의해서만 한정된다. 나는 이 근원 없는 존재들의 넘쳐흐름 앞에서 깜짝 놀라고 멍해져서 벤치 위에 널브러졌다. 사방에서 존재들이 개화하고, 만개하고 있었고, 내 귀에 존재가 윙윙대고 있었으며, 내 살도 펄떡이며 열리면서 이 우주적인 발아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역겨웠다.‘하지만 왜?’ 나는 자문했다. ‘왜 이 똑같은 존재들이 필요한 거지? 모두 다 똑같지 않아?’비슷비슷한 이 많은 나무들이 대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실패하고, 고집스럽게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실패하는 이 많은 존재들이 말이다. 이 풍부함은 넉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들) 그들은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모든 존재자는 이유 없이 탄생하고, 약하므로 연장되며, 우연히 죽음을 맞이한다.’ ‘난 자유다. 이제 살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시도해본 이유들은 다 실패했고, 더 이상 다른 이유들을 상상할 수 없다.’ 로캉탱은 이 삶의 비밀과 구토의 열쇠를 깨달았지만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그저 버티는 것이고, 먹고 사는 것이고, 글을 씀으로써 구토를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1년 후, 나는 추억 하나 없이 오늘만큼이나 텅 비어 있고, 죽음 앞에서 비겁하게 빌빌 기고 있으리라.’ ‘사실을 말하자면, 난 지금 펜을 놓을 수가 없다. 지금 구토가 올 것 같고, 이렇게 글을 씀으로써 그걸 지연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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