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다다른 종착역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쓴 마지막 작품이다. 작가 본인의 삶 가운데 일부를 떼어 내 형상화한 두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둘은 기존의 작품들에 등장한 (리스펙토르를 닮은) 인물들에 비해 작가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지성의 이해를 불허하는 인물인 마카베아는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신비 속에 있다. 마카베아의 비극적인 삶은 이상하리만치 강렬하고 선명해서 마치 서사가 아닌 사진처럼, 단숨에 치고 들어왔다 사라지는 강렬한 빛-순간처럼 다가온다.
스물세 살에 쓴 데뷔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 언어와 사고를 통해 가장 멀리까지 다다르겠다고 선언했던 리스펙토르가 마지막으로 당도한 지점이 여기다. 언어적 사고를 무효로 만드는 순정한 비극 혹은 세계. 이 공허하고 투명한 황무지에 세워진 『별의 시간』은 마치 후대를 위해 지어진 오두막처럼 느껴진다. 여기가 내가 다다른 가장 먼 곳이니, 미래는 이제 여기서 출발하라. 이 슬픈(어쩌면 리스펙토르의 작품 가운데 가장 슬픈)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상하리만치 활짝 열려 있다.
리스펙토르의 마지막 작품,
작은 수수께끼로 시작하다
리스펙토르가 마지막으로 쓴 이 작품의 앞에는 헌사가 달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 달려 있다. “이 헌사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작성함.” 작성자를 명확히 하려는 이 문장은 오히려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이 헌사를 쓸 수도 있었을 ‘저자’가 또 있다는 걸까? 마치 데이빗 린치의 영화 같은 이 도입부 설정은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이 헌사에서 작가가 자신을 지칭하며 쓴 단어 homem은 ‘남자’ 또는 ‘인간’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를 남자로 해석할 경우, 이 헌사는 작중 일인칭 화자이자 남성 작가인 호드리구가 쓴 것이 되며, 따라서 헌사는 소설의 일부로 편입된다. 반면에 homem을 인간으로 해석할 경우, 본문보다 앞서 등장하는 헌사의 관례적인 특성에 따라 이 헌사는 ‘진짜 작가’인 리스펙토르가 ‘소설 밖-현실 속’에서 쓴 것으로 인식된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가능하다. 따라서 이 헌사는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아니라 현실과 픽션의 지분이 공존하는, 혹은 ‘현실이면서 픽션인’ 독특한 공간 속에 있다. 저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벽을 흐리면서 현실 감각을 흐트러트리는 이 공간은 『별의 시간』 전체를 감싸게 된다.
작가와 피조물 A, 리스펙토르와 호드리구
비록 그 성별과 독백하는 말투가 달라서 겉보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리스펙토르와 호드리구는 공통된 정체성을 갖고 있다. 기묘한 지성과 화려한 문장을 지녔으며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성공한 작가. 호드리구는 리스펙토르라는 ‘작가’의 ‘현재’와 닮은 인물이다. 심지어 (설정상 호드리구가 썼다고 간주되는) 『별의 시간』의 도입부 역시 전형적인 리스펙토르풍 전개를 보여 준다. 스스로의 내면을 끝없이 파고들어 가면서 문장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러나 『별의 시간』은 그간 호드리구(와 리스펙토르)가 즐겨 몸담았던 세계에서 벗어나려 한다. 호드리구는 자기 내면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과 아주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고, 삼십여 페이지를 자신의 세계 속에서 망설인 끝에 힘겹게 발을 내디딘다. 그렇게 당도한 낯선 세계는 그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곳이다. 그곳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가난하고 젊은 여자의 세상이다.
작가와 피조물 B, 호드리구와 마카베아
지식인 계급에 속하는 남성 작가 호드리구와 그가 창조한 ‘가난한 여성’ 마카베아는 그 배경과 성격 모두 대조되는 인물처럼 보인다. 마카베아는 가난 속에서 자랐고, 지적으로 뛰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반성적인 고찰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호드리구는 문학 속에서 가장 멀리 나아가기 위해 자신과 가장 다른 인물을 창조했지만, 그 순진하고 무지한 세계를 비추는 강렬한 빛은 언어, 즉 “그림자들로부터 주입받은 소리(29쪽)”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한 것이었다. 호드리구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며 당혹해한다.
그러나 호드리구와 마카베아 역시 연결돼 있다. 호드리구가 독백으로 내뱉은 몇몇 말들은 시간이 지나 마카베아에 관한 묘사나 그녀가 내뱉은 대사로 재탄생된다. 또한 마카베아가 거울을 보는 어느 순간, 그 거울에 비치는 것은 호드리구 자신의 얼굴이다. 이런 순간들은 애초에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 작가의 세계 바깥에서 기적처럼 날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호드리구가 마카베아를 통해 발견한 것은 외계에서 온 신비가 아니라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자기 내면의 일부였던 셈이다(리스펙토르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에게는 초현실적인 몰아의 힘 같은 건 없으며, 오직 엄밀한 내면 관찰을 통해서만 글을 쓴다고 말이다).
결국 호드리구는 마카베아에 관한 소설을 쓰면서 자기 자신이 그 소설에 연동돼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소설은 일종의 에세이 혹은 고해일까? 아니, 어쩌면 모든 글이 에세이이자 고해이며, 글을 쓰는 사람은 결국 예기치 못했던 자기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글쓰기일까?
문학을 통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다다른 종착역
리스펙토르와 호드리구와 마카베아. 이들은 창조자와 피조물로서 엄격한 위계를 형성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 모두가 리스펙토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전적 문학을 뜻하지는 않는다. 리스펙토르가 자신을 소재로 삼은 것은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가장 큰 수수께끼가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낯선 인물을 창조했으나 그 인물이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이었을 때, 가장 멀리 나아감으로써 처음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에, 리스펙토르의 마지막 작품은 끝을 맺는다. 언어적 사고를 무효로 만드는 순정한 비극, 이 공허하고 투명한 황무지에 세워진 『별의 시간』은 마치 후대를 위해 지어진 오두막처럼 느껴진다. 여기가 내가 다다른 가장 먼 곳이니, 미래는 이제-다시 여기서 출발하라. 이 아무렇지 않게 슬픈(어쩌면 리스펙토르의 작품 가운데 가장 슬픈)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상하리만치 활짝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