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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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상적인 삶의 양태들 안에서 길어올린 가장 지성적이고 절실한 문학의 형체 이청준 전집 13권 『눈길』(문학과지성사, 2012)은 이청준의 대표작이자 교과서에 수록되고 각종 영상매체의 텍스트로 채택되는 등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20세기 한국소설사의 명작, 단편 「눈길」을 비롯해 작가가 가장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펼쳤던 1977년과 1978년 무렵에 씌어지고 발표된 총 8편의 중, 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청준의 문학 세계는 주제나 소재, 형식면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는 장편이나 중, 단편 등의 다양한 서사 형식을 두루 활용하는가 하면, 여러 가지 서사 기법들을 구사하면서 자신의 체험의 절실성과 진실성에 기반한 정한의 세계는 물론이려니와, 한국 근현대사라는 시대현실 속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개별자의 사유와 궤적을 형이상학적이고도 지적인 탐구와 철학적 물음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청준의 작품집 『예언자』는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이 작가의 관심의 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작가가 왜 글을 쓰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예술가가 이 시대를 어떻게 예언하고 그것을 수행하는가 하는 핵심적인 주제를 제기하면서 小說美學이 가능한 한의 抒情까지 획득하고 있다. 그의 이 작품집은 따라서 오늘의 한국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준을 가늠해주는 것이다.” _문학평론가, 김현(1977) 이번에 나온 중단편집 『눈길』은 전자에 속하면서 문자화된 서사가 이 세계를 재현해낼 때 문학적으로 아름답고도 ‘극적인 장면 묘사’뿐만 아니라, 참혹한 가난 속에서도 수치와 모멸감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허물지 않는 등장인물의 ‘인간적 품위’까지 짧은 서사 속에 드러내는 수작인 「눈길」을 표제작으로 삼고 있다. 또한 도시 문명 혹은 현대적 삶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문제 삼고 있는 단편 「거룩한 밤」과 「잔인한 도시」는 유신시대의 억압 속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순응주의에 함몰되어가던 당시 사회현실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삶의 불가사의에 대한 소설적 탐구로 읽히는 중편 「예언자」와 단편 「얼굴 없는 방문객」 역시 이청준의 문학 세계를 연구할 때 평자들의 주요하고도 꼼꼼한 해석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일명 ‘예술가 소설’로 불리면서 가마에 불을 때는 정성과 요령 그리고 장인의 혼에 대한 집중 조명뿐만 아니라 장인의 완벽주의에 대한 예찬에 머물지 않고 이청준 특유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완벽과 비완벽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를 요구하는 「불 머금은 항아리」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임권택의 연출로 영화사에 길이 남는 영화 「서편제」의 원작소설인 「소리의 빛―남도 사람 2」도 이번 작품집에 실려 있다. 특히 「소리의 빛」은 ‘남도 사람’ 연작의 두 번째 이야기로 소리 세계의 독특한 공간인 판소리의 미학을 문자 세계의 서사로 훌륭하게 옮겨왔을 뿐만 아니라 그 단순한 이야기 구성에도 불구하고 하룻밤 새, 오래도록 한 맺힌 삶과 그리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의 물결을 마치 판소리의 가락처럼 유장하고 처연한 문체로 완성해낸 이청준 문체 미학의 절정에 값한다.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주요 작품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최초의 단행본 『예언자』(1977)에 수록된 작가의 후기를 통해 그가 당시에 고민하고 또한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적 고뇌와 작가의식을 함께 밝히고자 한다. ■ 중단편집 『예언자』(문학과지성사, 1977) 작가 후기 얻은 이, 또는 얻지 못한 이의 밤을 위하여 ― 후기를 대신하여 김 형. 얻은 자의 잠자리를 위해서는 글을 쓰지 않노라는 김 형의 말은 저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군요. 한 줄의 글이 당신에게 기분 좋은 잠자리를 마련하리라―김 형의 주장은 아마도 이런 따위 독서철의 공리적 유행어에 대한 자기 모멸감이나 역겨움에서가 아니었는지요.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얻은 자로서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고, 얻은 자의 잠자리를 위해서는 그러므로 쓰려는 욕망도 능력도 지녀본 일이 없었던 것처럼 생각이 되고 있으니까요. 세상에 나서 얻어 누리고 싶은 것들―돈이든 지위든 명예든 그가 원하는 만큼 그것을 이미 얻어 누리고 있는 자들에게 우리는 과연 그들의 달콤한 잠자리를 위한 글을 쓸 수가 있을까요. 그들이 그것들을 얻는 동안 아무것도 얻음이 없이 오직 글로써 지켜온 우리들의 피나는 삶을, 그 삶에 대한 우리들의 확신과 사랑을 그들의 잠자리를 위한 달콤한 자장가로 바칠 수는 없겠지요. 그리하여 그들에겐 잠자리마저 편해져서, 그들의 삶이 그 안일한 일상성 속에 스스로 완성되고 닫혀져버리는 것을 도울 수는 없겠지요. 얻은 것이 적더라도 세상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 그 정직과 성실성 때문에 세상을 몇 배로 더 힘들게만 살아온 사람들, 그들의 희망과 용기가 꺾이지 않고 내일의 삶을 힘차게 다시 기약할 수 있도록, 오히려 그 사람들의 지친 잠자리를 위한 작은 위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글을 쓰노라는 김 형의 고백은 그러므로 저이게 커다란 감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 형, 다만 한 가지 김 형의 그런 충정과 고마운 확신에 대하여 저로서도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는 듯싶군요. 김 형은 이미 그 얻을 것을 얻고 있는 자들일수록 더욱더 뻔뻔스럽고 탐욕스럽게 김 형을 요구하고, 김 형의 글을 간섭하고, 김 형의 삶과 문학의 책임을 따지고 들더라 하셨지요. 그 김 형의 삶과 문학을 아무것도 치름이 없이 약탈하려고 들더라 하셨지요. 그래서 김 형은 그들의 몰염치와 탐욕을 나무랐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요? 우리에게 그들을 원망하고 힐책할 권리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의 삶과 문학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요? 김 형! 잠깐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봅시다. 얻은 것이 없는 자로서 우리는 애초에 무엇 때문에 이 문학이라는 걸 시작했습니까.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삶을, 그 내일의 삶에 대한 꿈과 사랑으로 우리의 문학을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그 고된 삶에의 고행을 되풀이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뜻에서 우리는 또한 숙명(宿命)의 이상주의(理想主義)가 되지 않을 수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진정한 이상주의자로서 숙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참담스런 삶에의 순례에서 찾아 얻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시대를 자신의 권리로만 살고 있는 만인(萬人)의 것이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도달한 새로운 삶의 터전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편안히 안주시켜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고행으로 찾아 얻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들 자신의 삶을 위해서는 그것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도달하고 찾아 얻은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타인의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어떤 새로운 세계를 문 열어 맞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새로이 찾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에 우리는 다시 그것들을 빼앗기고 쫓겨나서 또 다른 내일에의 고행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글쟁이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늘 현실의 패배자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영원한 신인, 영원한 삶의 순례자로서 언제나 새로운 고행 앞에 다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김 형! 어쩔 수가 없는 일 갔습니다. 저들이 비록 얻은 자로서 우리들의 작은 것을 탐내고 우리의 삶과 글을 간섭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치름도 없는 무거운 책임만을 물어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저들의 당연한 권리이며, 영원한 패배자, 숙명의 이상주의자들에 대한 저들의 당연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김 형! 이제 얻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늘 외면만 하려들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고 좀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