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식인문화의 수수께끼󰡕(Cannibals and Kings: The Origins of Cultures, Random House)는 문화생태학자 마빈 해리스가 인류의 가장 비밀스러운 문화, 즉 식인풍습의 비밀을 밝힌다. 해리스는 이 책에서 자신이 고안한 유물론적 접근법을 바탕으로 식인풍습이 생겨난 원인과 결과를 추적한다. 기존 학자들은 식인풍습을 프로이트학파의 정신분석학이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영적 충동 등으로 설명하려 했다. 반면 해리스는 식인풍습이 만연했던 지역의 지형, 기후, 동식물의 생태계, 농업활동 여부, 경제규모 등을 바탕으로 인간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또는 ‘먹게 된’ 이유를 규명해낸다. 이처럼 물질적·객관적 조건을 바탕으로 논의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상당히 설득력 있다. 무엇보다 식인풍습의 기원을 쫓으면, 현대 자본주의의 한계를 파악하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식인문화의 수수께끼󰡕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의 제2권으로 지난 1995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꾸준히 사랑받았다. 이 책은 번역을 다듬고 화보를 추가한 개정판이다. 영미 인류학의 거장 마빈 해리스 마빈 해리스. 영미 인류학의 거장인 그는 유물론에 바탕을 둔 문화인류학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문화인류학 3부작’은 해리스식 문화인류학의 정수다. 해리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다. 그는 문화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 ‘생식압력→생산증강 과정→생태환경의 파괴·고갈→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라는 도식을 제시한다. 이러한 생태학적 적응양식을 통해 가족제도와 재산관계, 정치적·경제적 제도, 종교, 음식문화 등의 진화와 발전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해리스는 브라질, 에콰도르 등지에서 현지조사를 했고 문화생태학적 측면에서 식민지주의의 영향, 저개발국가의 문제, 인종과 민족적 상호관계에 대한 비교문화를 연구했다. 1953년부터 1981년까지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다가 이후 플로리다 대학으로 옯겼다. 미국 인류학협회 인류학분과 회장도 맡았다. 그는 2001년 사망하기 전까지 문화인류학이라는 넓은 지평을 문화유물론의 관점으로 횡단했다.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 관점은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외에도 그의 저서 󰡔떠오르는 인류학이론󰡕(The Rise of Anthropological Theory), 󰡔문화유물론: 문화과학을 위한 투쟁󰡕(Cultural Materialism: The Struggle for a Science of Culture), 󰡔문화의 수수께끼󰡕(Cows, Pigs, Wars and Witches: The Riddles of Culture), 󰡔음식문화의 수수께끼󰡕(The Sacred Cow and the Abominable Pig: Riddles of Food and Culture)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식인문화의 수수께끼󰡕는 인류학 전공자를 위한 전문서라기보다는 일반 대중을 위한 에세이 형식의 교양서로 초심자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해리스의 문화이론의 정수이자 핵심도 잘 담겨 있다. 빙하시대의 비극에서 비롯된 잔혹한 식인풍습 식인풍습이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바로 ‘아스테카왕국’이다. 13세기경 아즈텍족이 멕시코고원에 세운 이 왕국은 16세기 초 에스파냐군에 멸망하기 전까지 살아 있는 인간을 신에게 바치고, 인간고기를 먹어대는 식인풍습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고도로 발전시켰다. 비슷한 시기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사람을 고문하고, 누군가를 마녀로 몰아 산 채로 태워 죽이며,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에서 무참하게 적군을 살육하던 유럽인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이 1519년 아스테카왕국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놀란 것은, 식인풍습의 잔혹함 자체라기보다는 그처럼 철두철미한 ‘국가종교’적 성격 때문이었다. 그렇게도 철두철미하게 폭력과 타락, 죽음과 질병이 예술과 건축, 종교의식을 지배하는 나라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었다. 또 사람의 턱뼈, 이, 손톱, 발톱, 두 눈과 입 부분이 비어 있는 해골 등을 그토록 집중적으로 전시하기 위해 큰 신전과 궁궐의 벽과 광장을 사용한 곳도 없었다. _ 199쪽 그렇다면 아스테카왕국은 어째서 이토록 집요하게 식인풍습을 발전시켰을까? 프로이트학파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아스테카왕국의 식인풍습을 인간 무의식의 극적 발현으로 보았다. 그들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근거로 아버지를 향했던 공격성이 사회화를 거쳐 다른 곳을 향하게 된다면서 그 좋은 예가 바로 아즈텍족이라고 설명했다. 해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유물론적 접근에 거부감을 느끼는 많은 인류학자도 이 주장에 동조했다. 하지만 해리스는 철저하게 고고학이 밝혀낸 물질적 조건으로 식인풍습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는 놀랍게도 1만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는 마지막 빙하시대의 말기로 지구온난화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기후가 좋아지며 인간이 사냥하는 동물의 양도 급증한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지구의 생태환경은 급격히 변하는데, 우선 구대륙은 말과 소를 제외한 대형동물이 대부분 멸종했다. 이후 발전한 중석기시대에 북유럽인들은 말과 소, 사슴과 양(염소)을 수렵하거나 키우며 살아남았다. 신대륙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 문제는 메소아메리카(중남미)였다. 아스테카왕국이 자리 잡은 멕시코고원에서는 말과 양이 멸종했다. 토끼도 멸종했다. 심지어 거북이까지 멸종했다. 라마와 알파카 정도가 남았으나 이 짐승들은 훨씬 남쪽에 살았기 때문에 메소아메리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메소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게 고기는 굉장한 사치품이 되어 그들은 식물을 기르는 일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식용작물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밀, 보리, 호밀 등은 아예 없었고 옥수수 정도를 기를 수 있었다. 그나마 작은 동물이라도 잡아먹으려면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딘가에 정착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메소아메리카에서 촌락생활이 늦게 시작된 이유다. 한마디로 메소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먹을 게 부족했던 것이다. 아즈텍족은 왜 적군을 죽이지 않았을까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인구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증가했다. 수렵, 채집만으로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어렵게 되자 드디어 아즈텍족도 정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화전농법으로 먹을 것을 얻었으나, 휴경기간이 길고 삼림이 급격히 황폐해진다는 단점 때문에 곧 한계에 부딪혔다. 이를 극복하고자 관개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멕시코계곡은 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생산성이 좋은 이모작에 성공했고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테오티우아칸의 도시는 기원후 100년 이후 급속히 성장해 8세기에는 한때 인구가 12만 5,000명으로 절정에 달했다. 로체스터 대학의 밀런이 상세하게 그린 지도에 따르면 시가지는 도시계획에 따라 구획되어 특화된 공장지구, 특정 인종 집중 거주구역, 신전, 시장 그리고 부자나 권세가들이 사는 궁궐 같은 석조주택, 일반 주민이 사는 시커먼 다가구 아파트—아파트는 통틀어 2,200채나 되었다—를 갖추었다. ……도시의 중앙부에 우뚝 선 건조물, 이른바 ‘태양 피라미드’—잡석을 쌓아 올리고 그 표면에 돌을 붙였다—는 측면이 213미터, 높이는 61미터로 치솟아 있었다._ 193~194쪽 하지만 이마저도 한계에 다다랐다. 계속해서 인구는 늘고 도시는 커졌다. 지하수가 마르고 집을 지을 나무를 베느라 숲이 사라졌다. 농사지으려면 어쩔 수 없이 염분이 많은 호수의 물까지 길어와야 했다. 관개시설은 점점 커졌고 촌락은 곧 왕국이 되었다. 아스테카왕국이 탄생한 것이다. 13세기가 되면 아스테카왕국의 인구는 200만 명까지 치솟는다. 급격히 발전하는 가운데 아주 상식적인 문제가 아즈텍족을 괴롭혔다. ‘사람은 옥수수만으로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