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백범일지

김구
4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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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의 사전적 의미는 "고전의 여러 이본 가운데, 검토하고 교정하여 원본과 가장 가깝다고 판단한, 표준이 될 만한 책"이다. 1994년에 <백범일지> 친필 원본이 공개되고 동시에 이 원본을 영인한 책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원본에 최소한의 교정을 한 직해본이 1995년에 출간되었고, 2002년에는 이 원본을 탈초한 책이 출간되었으며, 이후 각주가 있는 주해본 등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정본이라 부르는 이유는 친필 원본 자체가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고 오탈자가 심한데, 최초 탈초한 책은 이들 오탈자와 판독이 불분명한 부분을 교감하지 않은 채 탈초만 하였고, 이후 직해본과 주해본이 이 잘못 탈초된 책을 바탕으로 집필되고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백범일지>는 원본 이외에 등사본과 필사본, 그리고 백범 생전에 출간된 국사원본을 주요 판본으로 들 수 있다. 원본은 등사본이 만들어지고 필사본이 만들어지는 와중에도 백범 스스로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하고 보완하고 삭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최초 원본과 이후 보완되면서 변화한 과정은 등사본과 필사본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본들을 활용하면 그동안 오독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던 부분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이 책의 탈초.교감자인 도진순 교수는 1994년에 백범 선생의 영식 고 김신 장군으로부터 <백범일지>의 원본 사본을 기증받았고, 당시 한 차례 탈초한 바 있다. 하지만 연구가 미진하다고 판한하여 우선 주해본을 1997년에 출간하고, 이후 20년 가까이 <백범일지> 연구에 매진했으며, 이제 결정판이라 부를 만한 '정본' <백범일지>를 세상에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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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目次

『정본 백범일지』를 펴내며 - 일자천금의 삼매경과 두려움 권두 사진 해제 - 『백범일지』 조직 검사: 기억과 망각, 오독과 정독 일러두기 상권 與仁信兩兒書 / 祖先과 家庭 / 出生 及 幼年 時代 / 學童 時代 / 學究 時代 / 東學 接主 / 淸國 視察 / 國母報讎 / 投獄 / 受死刑宣告 / 大君主 親電停刑 / 破獄 / 緇徒 / 耶蘇敎와 敎育者 / 再次投獄哈爾濱事件 / 三次投獄, 十五年役 / 獄中 生活 / 農夫 / 出國 / 警務局長 / 喪妻 / 國務領, 國務委員 하권 白凡逸志 下卷 自引言 / 上海 到着 / 警務局長 / 사상 갈등과 좌우 분열 / 國務領, 國務委員 / 李奉昌 東京의거 / 尹奉吉 上海의거 / 嘉興 海鹽 海寧: 피신과 유랑 / 南京: 蔣介石 면담과 민족운동 / 長沙로 이동과 어머님에 대한 추억 / 南木廳 사건 / 重慶: 臨政의 확대와 韓獨黨 / 光復軍 / 大家族 참고문헌 찾아보기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백범 탄생 140주년, 그의 숨결까지 구현하다! “백범은 자식에게 물려줄 유일한 유산으로 『백범일지』를 생각했고, 피난 중에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수정하고 보완했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글자를 등사본이나 필사본으로 보완하는 작업은 마치 떨어진 살점을 찾아 꿰매는 것 같았다. ‘겨자씨 안에 수미산이 있다’ 했던가. 한 글자의 수정이나 보완이 때로는 백범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비밀 열쇠와 같았다.” 광복 71주년, 우리는 여태껏 『백범일지』 정본(定本)이 없었다. 정본(定本)의 사전적 의미는 “고전의 여러 이본 가운데, 검토하고 교정하여 원본과 가장 가깝다고 판단한, 표준이 될 만한 책”이다. 이 책에 ‘정본’이라는 명칭을 감히 붙인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온 숱한 『백범일지』는 뭐란 말인가? 1994년에 『백범일지』 친필 원본이 공개되고 동시에 이 원본을 영인한 책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원본에 최소한의 교정을 한 직해본이 1995년에 출간되었고, 2002년에는 이 원본을 탈초한 책이 출간되었으며, 이후 각주가 있는 주해본 등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정본이라 부르는 이유는 친필 원본 자체가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고 오탈자가 심한데, 최초 탈초한 책은 이들 오탈자와 판독이 불분명한 부분을 교감하지 않은 채 탈초만 하였고, 이후 직해본과 주해본이 이 잘못 탈초된 책을 바탕으로 집필되고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백범일지』는 원본 이외에 등사본과 필사본, 그리고 백범 생전에 출간된 국사원본을 주요 판본으로 들 수 있다. 등사본은 1929년에 엄항섭이 등사하여 미국으로 보낸 것으로 현재 미국 콜롬비아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은 1948년 초 백범의 측근이 상·하권을 필사한 것으로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국사원본은 백범 생전인 1947년에 국사원에서 출간된 최초 출간본으로 한글판으로 윤문한 것인데 이광수가 윤문 작업에 참여했다. 『백범일지』 원본은 등사본이 만들어지고 필사본이 만들어지는 와중에도 백범 스스로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하고 보완하고 삭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최초 원본과 이후 보완되면서 변화한 과정은 등사본과 필사본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본들을 활용하면 그동안 오독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던 부분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이 책의 탈초·교감자인 도진순 교수는 1994년에 백범 선생의 영식 고(故) 김신(金信) 장군으로부터 『백범일지』의 원본 사본을 기증받았고, 당시 한 차례 탈초한 바 있다. 하지만 연구가 미진하다고 판한하여 우선 주해본을 1997년에 출간하고, 이후 20년 가까이 『백범일지』 연구에 매진했으며, 이제 결정판이라 부를 만한 ‘정본’ 『백범일지』를 세상에 내놓는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올해로 71주년, 백범 선생이 탄생하신 지 140년이 흘렀다. 어쩌면 이제야 내놓는 『정본定本 백범일지』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일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항간에서 벌어지는 건국절 논란을 지켜보며, 백범의 정신과 『백범일지』가 말하는 우리 민족의 길이 여전히 유효함을 느낀다. 아마도 백범 선생이라면 이념적 논리, 경제적 논리 등 어떠한 이유를 대더라도 민족의 분열, 국민의 분열만은 결코 원치 않으셨을 것이다. 『정본定本 백범일지』는 다르다! 수고(手槁)로 이루어진 『백범일지』는 숙독하지 않으면 맥락을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문장의 전후 비교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그것을 백범의 심중(心中)과 연결해 보아야 비로소 글이 온전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백범일지』 원본에는 군데군데 지워진 부분이 있고, 4면 여백을 이용해 추가한 글들, 따로 별지를 써서 보완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부분들이 탈초되고 번역되는 과정에서 빠지거나 잘못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탈초 과정에서 빠트린 부분을 제자리에 집어넣고, 번역의 오류를 문맥에 맞게 바로잡았으며, 백범의 집필 당시 오류 또한 주석을 통해 바로잡았다. 관련 내용은 이 책의 해제인 ‘『백범일지』 조직 검사: 기억과 망각, 오독과 정독’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도진순 교수는 이미 주해본 『백범일지』(1997, 돌베개)에서 상당 부분의 오역과 오독을 지적하고 주석으로 설명했지만, 이 책을 통해 주해본 출간 이후의 연구 성과까지 모두 반영하였다. ★ 백범은 어떤 부분을 수정하고, 삭제했을까? 『백범일지』 상권은 대부분 녹색선 450자(30×15) 원고지에 펜으로 쓰고 펜 혹은 붓으로 수정·보완했다. 상권 마지막 줄에는 1년 2개월 걸려 1929년 5월 3일에 상권 글쓰기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1929년은 54세의 백범이 한창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1년 남짓 걸려 출생부터 당시까지의 소경력을 급하게 써내려간 글들에는 어그러진 문맥과 사실 기록의 오류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탈고 이후에도 백범은 수시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삭제했다. 집필하고 바로 수정한 부분도 있지만, 특히 상권에서 붓으로 수정한 부분은 대부분 해방 이후의 수정이라 탈고 직후 만들어진 등사본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가령 펜으로 쓴 1차 원본의 ‘아부님’은 해방 이후 붓으로 ‘父親’으로 수정됐다. 백범의 시초 집필에서 출발하여 수정·삭제·보완한 것을 추적하는 작업은 마치 백범의 뇌를 시기별 단층사진으로 보는 것과 같다. ― 백범은 유독 어머님에 대해서 각별하게 내용을 보완했는데, 해방 이후 수정한 상권에서는 어머님과 관련하여 1차 원본에서 오히려 삭제한 부분이 있다. “母親 年歲가 겨우 十七이라, 恒常 내가 죽어시면 조켓다는 苦歎을 하섯다 한다.” 여기서 ‘연세(年歲)가 겨우 십칠(十七)’과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고탄(苦歎)’ 사이에 인과관계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 ‘내가’가 아들인 백범을 가리키는지 어머님 자신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런데 등사본을 살펴보면 이 사이에 “子女 養育에 職責感이 不足하야”가 들어 있다. 그리하여 전문을 현대어로 풀면 ‘어머님의 나이 17세 때라, 자녀 양육에 직책감이 부족하여, 항상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고탄(苦歎)을 하였다고 한다’로 전체의 문맥과 인과관계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것이 1차 집필 당시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어머님에 대한 불효라고 생각하셨는지 해방 이후 원본에서는 이 부분을 삭제하였다. ― 『백범일지』 하권은 상권에 비해 수정과 보완이 거의 없지만, 대대적으로 절삭된 부분이 특별하게 한 군데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본뿐 아니라 필사본에서도 해당 부분을 찾아 일일이 지웠다. 하권에서 대대적으로 절삭된 부분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 관련 기록이다. 『백범일지』에 백범과 안공근의 관계가 서로 어긋나는 것을 짐작케 하는 구절은 남아 있지만, 삭제된 부분처럼 노골적인 대립이 서술된 부분은 없다. 그래서 이 절삭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895년 2월, 20세의 동학 접주 백범(김창수)은 황해도 신천의 안태훈 진사에게 몸을 의탁함으로써 안중근 의사 집안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안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딸 안미생은 백범의 큰며느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인연도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 핵심에 안 의사의 막내동생인 안공근 문제가 있었다. 1932년 백범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할 때까지만 해도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의 단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가 남경을 떠날 즈음부터 서로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여, 중경 도착 직후는 거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런 중에 안공근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는데, 바로 안공근의 실종 사건 관련 대목이 대폭 절삭된 것이다(삭제 부분에 대한 해독은 이 책 ‘해제’ 참조). ★ 백범의 오류를 바로잡다 『백범일지』는 일기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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