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통화, 이메일, 신용카드 기록, CCTV…
왜 세상은 우리를 감시하는가?
왜 우리는 감시사회에 침묵하고 협조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밝히는 감시사회의 본질
빅브라더, 우리를 감시하는 권력
#1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2013년 미 국가안보국(NSA)이 지구의 모든 데이터를 쓸어 모아 개인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의 60%는 스노든이 “국가안보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응답했다. 국가안보를 위해 NSA의 감시활동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2 한 지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CCTV 설치를 확대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중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이든 감시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150쪽)
#3 사람들은 주목을 받고자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올려놓는다. 사적인 것은 이미 가벼운 관계의 ‘사용자들’과 무수히 많은 ‘친구들’이 찬양하고 소비할 수 있는 공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4 한 무인비행체가 2011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투하했다. 죽은 사람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22명의 결혼식 하객. 희생자 중에는 아이들도 있었다. 단추를 누른 조종자들은 ‘수많은 정보로 범벅이 된’ 화면 때문에 판단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130쪽)
#5 국민카드 등 카드 3사의 고객 정보가 유출되었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신용카드를 사용해야 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카드사가 요구한 개인 정보 제공에 동의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려면 이렇게 자발적 감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을 ‘빅브라더’라고 불렀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NSA의 ‘지구적 정보감시 체제’를 폭로하자 세계 각국의 언론은 ‘빅브라더’의 존재 자체를 다시금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감시 권력은 우리 주위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학교 생활기록부, 건강보험 정보, 은행 거래 내역 등 각종 정보와 인터넷 게시판에 쓴 글까지 알아낼 수 있는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태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민간인 불법 사찰, 국정원의 감시체제, 경찰의 시위자 감시, 카드 3사의 고객 정보 유출 사태, 각 기업들의 노동자 감시 등. 그리고 ‘주민등록번호 체제를 재고하자’ 등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요즘 뉴스에서 감시에 대한 기사는 이처럼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감시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영역에서 급격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현상을 반영한다. 오늘날의 시민들, 노동자들, 소비자들 그리고 여행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모니터되고, 추적되고, 조사당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감시’가 그 자신들의 협조 덕분에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명석한 사회 사상가 중 한 명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런 ‘감시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감시사회 전문가인 데이비드 라이언 캐나다 퀸즈 대학 교수와 대담한 책이다. 퀸즈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0년대부터 감시 연구에 집중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위의 예시에서처럼 현대의 감시사회가 ‘빅브라더’로 상징되는 감시권력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는 하나 현대인들의 ‘자발적 복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어판 제목을 <친애하는 빅브라더>(원제는 <유동하는 감시Liquid Surveillance>)라고 붙이게 되었다. 현대인들이 빅브라더로 대표되는 감시사회를 의식하고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빅브라더를 용인하고 오히려 이에 충성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현대적 감시에서 전면으로 내세우는 이데올로기, 감시에 순응하고 그것에 약간의 의혹을 제기하지만 감시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감시 게임에 가담하겠다고 결심하는 보통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우리는 시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서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점검과 감시, 시험을 받고, 평가되며, 값이 매겨지고, 판정을 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바우만은 묻는다.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감시가 오늘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인들이 이런 감시사회의 의미를 제대로 감지하고 있을까? 그러면서 감시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감시가 확장되는 것에 따른 정치적 물음들뿐만 아니라 윤리적 물음들도 제기하고 있다.
소수가 다수를 주시하는 파놉티콘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 개념으로 유명하다. 즉 오늘날 현대사회는 너무나 가변적이어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고 움직이는 ‘유동’하는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권력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이 흘러 다닌다. 그러면서 장벽, 울타리, 국경 등을 초월하여 움직이고,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단단한 결속’이나 연대를 깨뜨려버린다. 감시도 마찬가지로 유동하고 있다(‘유동하는 감시’). “수많은 이론가들은 한때는 단단하고 고정된 것이었던 감시가 점점 더 신축성을 가지고 쉽게 변하며 잘 스며드는 현상, 나아가 삶의 중심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주변부 영역으로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이전의 감시는 ‘고정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감시권력이 누구인지 파악이 가능했다. 그러나 ‘유동하는 현대’에 와서는 감시가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 정보를 담아내는 그릇조차 없이 도처에 퍼져가고 있다. 특히 소비 영역에 이르면 감시가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제러미 벤담이 기안한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을 생각해보자. 그리스어를 꿰맞춰서 만든 이 용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장소’(‘pan’은 ‘모두’, ‘optic’은 ‘본다’를 뜻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파놉티콘 감옥은 감방을 반원형으로 배열함으로써 통제력을 강화하도록 설계되었고, 중앙부의 ‘교도관’은 수감자들 쪽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감방을 감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우만에 따르면 오늘날의 세계는 탈파놉티콘적이다. 오늘날의 감시자들은 과거의 파놉티콘적 감시자들과는 달리 자리를 지키고 앉아 감시를 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감시가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빠져나감으로써 홀연히 사라질 수 있다. 현대의 감시 권력은 장벽, 울타리, 국경 등을 초월해버린다. 이런 현상은 다른 얼굴을 한 통제 형식을 가능케 했다. 이제 디지털 기술과 통계적 추론을 활용한 감시는 노동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측정하고, 노동자와 소비자가 스스로 감시받고, 감시하게 만든다.
다수가 소수를 주시하는 시놉티콘과 소셜미디어
유동하는 현대세계는 소비자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현대세계에서 감시는 색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제 파놉티콘 방식에서 시놉티콘 방식으로 이동했다. 노르웨이 출신의 사회학자 토마스 마티센이 말한 시놉티콘은 ‘소수가 다수를 주시’하던 파놉티콘과 달리 ‘다수가 소수를 주시’하는 오늘날의 매스미디어를 대비시키면서 만든 말이다. 즉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터넷의 익명성을 통해 다수가 소수를 주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시놉티콘이 ‘DIY식 파놉티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유동하는 현대를 구성하고 있는 소비자가 스스로 감시사회를 만들어간다고 것이다. 이전의 감시 권력은 많은 비용을 들여 다수를 감시했지만, 이제는 그 감시를 소비자 자신에게 전가시켜 스스로를 감시사회에 협조하고 충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활용하는 이들은 고백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 감시는 공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지 않고, 무시받지 않고, 방치되지 않고, 가입이 거부되지 않는 희망을 재구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