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움푹함이 필요해.”
서로를 둘러싸고 있는 움푹함의 세계
윤해서가 만들어내는 특별한 시공간
“움푹한 곳에서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돌아오잖아.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고. 마음이 머물 공간이 필요했어. 계속 흩어지니까.”
독창적인 세계관, 시적인 문체로 문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고 있는 윤해서의 새 장편소설『움푹한』이 출간되었다. 시간의흐름 출판사에서 선보이는 첫 번째 소설이다. 『움푹한』은 한 존재의 소멸이 상대방의 기억 속에 생성하는 움푹한 시공간의 단면을 살핀 작품이다. 우리 삶에서 소중했던 공통의 존재가 떨어져나갈 때, 당신의 가슴에 생긴 상처의 단면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가, 조약돌처럼 매끄러운가. 대상이 무엇이든 애정하는 어떤 존재를 상실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오감으로 감각되는 그에 관한 기억을 ‘윤해서적인’ 소설의 순간들을 통과하면서 문학적으로 복원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재회하게 될 것이다.
“자꾸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라진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
네 사람이 있다. 운, 현우, 이영, 마태오. 소설 속 시간은 분절되어 있고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네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그러나 독자는 읽어나가는 동안 점점 알아차리게 된다. 빈 공간, 누군가의 부재를.
한 사람이 사라졌다. 여름내 울던 매미가 갑자기 뚝, 울음을 그치듯이. 사람은 그렇게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은 떠날 때가 되면 떠난다.” 사라진 사람이 있고, 남겨진 사람들이 있다. 사라진 사람은,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들의 기억과 시간 속에 목소리로, 모습으로, 어떤 말로, 어떤 한 순간으로 계속 존재한다. 남겨진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라진 사람을 기억한다.
마태오는 이영이 되어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운은 자신이 알고 있던 이영이 되어보았다.
주현우는 이영이라면, 매일 가정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바닥에 가라앉았다. (p.73~74)
한 사람은 모든 말을 들여다보는 사람. 계속해서 같은 것을 들여다보는 사람. 그의 눈은 언제나 그곳에 머문다. 한 사람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무엇이든 되기 위해 매일 쓰는 사람. 남겨지기 전에도, 남겨진 후에도 매일 쓴다. “아침마다 다른 마음으로 일기를” 쓰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한 사람은 느리게 숨을 쉬는 사람. 무감하고 욕망도 없는 사람. 그래서 매일 달리는 사람. 동생이 사라지기 전에도, 사라진 후에도 매일 달린다. 그리고, 자꾸만 기다리는 사람. 다음 해 봄에 다시 올라올 수선화를 기다리듯이. 죽은 듯이 사라졌다가도 봄만 되면 꽃을 피워 올릴 수선화를 기다리듯이. “수선화의 구근이 땅속 깊이 뿌리 내리고 있을 것을 상상”한다.
“죽음이 삶을 둘러싸고 둘러싸여 있다.”
움푹하고 따뜻한 슬픔의 세계
상실은 마음에 움푹한 시공간을 만들고, 그 시공간 속에서 메아리가 돌아오듯이 기억이 반복된다. 마음이 머물며 맴을 돈다. 한 사람은 한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고, 매일 뛰던 사람은 어느 날 뛰고 싶지 않아지고, 무엇이든 되기 위해 매일 쓰던 사람은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날을 겪는다. 한마디로 표현되지 않는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윤해서는 몽환적인 사유와 시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소설 속 ‘사일런스 파크’는 도시 한가운데 조성된 공원이지만 반대로 공원이 도시를 감쌀 수 있도록 설계된다. “건물의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건물 내부를 감싸듯이.” “음악이 영혼을 감싸”고 “영혼이 음악을 감싸듯이.” 남겨진 사람은 사라진 사람을 감싸고, 사라진 사람은 남겨진 사람을 감싼다. 남겨진 사람은 남겨진 사람을 감싼다. 그렇게 서로를 둘러싸고 있는 움푹함의 세계는 따뜻한 슬픔을 품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둘러싸고 둘러싸여 있다. 죽음이 삶을 둘러싸고 둘러싸여 있다. 삶이 죽음을 둘러싸고 둘러싸여 있다. (p.186)
서로가 서로를 둘러싸고 둘러싸여 있기에, 우리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잃었을 때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상실은 몸의 모든 감각으로 그의 부재를 겪어내는 일이다. 동시에 우리가 품고 있던 그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는 일이며, “사랑은 필요도 아름다움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