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탄생 100주년 기념 전집
“부모를 죽인 살인자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남은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이 언어 발굴의 구덩이를 보라,
발설이 곧 침묵이 되게 하는 힘을 견뎌보라, 허수경의 첼란을 견뎌보라.”
김혜순(시인)
“모든 시는 자전적이지.
나는 내 존재와 무관한 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어.
나는, 자네도 알다시피, 내 방식대로 리얼리스트라네.”
_ 파울 첼란, 1962년 6월 23일, 어린 시절의 친구 에리히 아인호른에게 보낸 편지 中
● 1920 / 1970 / 2020
: ‘상처 입은 생존자’ ‘아우슈비츠 이후 독일어권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
파울 첼란 탄생 100주년 & 사망 50주기
2020년 한 해 동안 독일 문학출판계는 물론,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사용 국가들 주요 매체의 문화 관련 키워드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파울 첼란’이라는 이름이었다. 1920년 11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태어나 1970년 4월 파리의 센강에 투신하기까지, 오로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간 파울 첼란의 탄생 100주년이자 사망 50주기가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1952년 첼란의 첫 시집 『양귀비와 기억』을 펴낸 이래 오늘날까지 출간해오고 있는 안슈탈트 출판사는, 『양귀비와 기억』 수록작이자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비견되는 ‘세기의 시’로 일컬어지는 「죽음의 푸가」를 통해 첼란의 생애를 돌아보는 책 『죽음의 푸가: 어느 시의 전기』(2020년 3월)를 출간했으며, 첼란 생전에 그의 후기 시집에 해당하는 『숨전환』(1967)과 『실낱태양들』(1968)을 펴낸 데 이어 센강에 투신하기 전까지 준비중이던 시집 『빛의 압박』(1970)을 비롯한 유작들을 차례로 정리해 펴내온 주어캄프 출판사는, 2003년 초판을 출간했던 『주석판 첼란 시집』의 두번째 개정증보판을 내놓았고, 『파울 첼란: 1934-1970 사적 편지들』을 시작으로 전기와 회고록, 연구서 등 2020년 한 해에만 10여 종 가까이 첼란 관련 기획을 선보였음은 물론, 2021년과 2022년에도 첼란 관련 연구서 2~3종의 출간을 예고하고 있다. 2000년에 이미 첼란 생전의 시집과 사후의 시집은 물론 산문과 연설문, 첼란이 동경하고 높이 평가했던 해외문학작품들에 대한 그의 독일어 번역, 유고로 남은 미출간 원고, 육필 원고 사진 등을 총망라해 일곱 권짜리 ‘파울 첼란 전집’으로 펴냄으로써 첼란 작품 이해와 연구의 출발이 될 텍스트 정리 작업의 기반을 다진 것은 물론, 2003년 첫 권을 시작으로 2017년까지 총 열여섯 권으로 완간되어 첼란 작품사와 생애사 연구의 결정판으로 자리매김한 ‘보너 아우스가베(Die Bonner Ausgabe)’를 보유하고 있는 주어캄프 출판사로서는 당연한 행보일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의 역사를 지닌 땅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읽고 쓰기 시작해 독문학과 언어학을 공부하기에 이른 유대인. 나치 독일에 의해 집단학살수용소로 끌려가 수용소에서 병사한 아버지와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 “부모를 죽인 살인자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남은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시를 쓰고 남긴 유대인 시인. 그는 네번째 시집을 낼 즈음에 이르러서야 브레멘 문학상과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라는 ‘독일문학계’의 주요한 두 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그럼에도 전후 독일 사회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와 보수주의 분위기는 유대인 수용소의 참상을 직접 겪고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은 유대인 시인에게 한편으론 실존의 불안을 야기하는 근원이 되었으며, 실제로 전후 독일문학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주요 비평가들로부터 그는 ‘현실과 거리가 먼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그릇된 평가까지 받게 된다. 유대인 시인으로서 독일어로 시를 쓰며 독일문학계에 수용되어 인정받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또하나의 실존적 전쟁이나 다름없었던 그가, 50여 년의 짧은 생애 동안 한 번도 독일에 ‘거주’한 적이 없는 그가, 사후 50년을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상처 입은 생존자’ ‘아우슈비츠 이후, 독일어권 전후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쉼없이 호명된다. 시인은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곳”에 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머물고 있다.
내 손에서 너는 커다란 꽃을 집어든다:
꽃은 희지도, 붉지도, 파랗지도 않다?그럼에도 너는 꽃을 집어든다.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곳, 그곳에 꽃은 언제나 머물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있었던 적이 없어서, 그렇게 우리는 꽃의 곁에 머문다.
_ 「가장 하얀 비둘기가」 中 / 『양귀비와 기억』
● 故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전집’
: 100년의 시간을 넘어 뭍에 다다른 “유리병에 든 편지”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한 뒤 이십대 후반에 독일로 떠나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며 쉼없이 모국어로 시와 산문과 동화와 소설을 발표해왔던 시인 허수경. 2018년 가을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역시 생의 절반 이상을 ‘실향’의 상태로 지내온 그가, 체르노비츠에서 태어나 투르와 부쿠레슈티와 빈을 거쳐 파리에 정착해 독일어로 시를 쓰다 생을 마감한 첼란의 세계를 우리말로 옮겼다.
흔히 ‘수수께끼 같은 시어’ 혹은 ‘비의(悲意)의 서정시’로 일컬어지는 첼란의 세계이지만, 시인 허수경은 첼란의 ‘언어’ 그 자체에 있는 그대로 집중한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오도된 혹평처럼 결코 ‘현실과 거리가 먼 시’였던 적이 없는 그의 세계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리얼리스트’였던 첼란의 시선을 꾸밈없이 우리말로 옮겼다.
“잃어버린 것들 한가운데에 다다를 수 있게, 가깝고도 안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이 한 가지였습니다: 언어. (…)
이 언어로 저는, 그 세월들 속에서 그리고 그 세월 이후로도, 시 쓰기를 시도해왔습니다: 말하기 위해, 저 스스로 방향을 잡기 위해,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현실의 윤곽을 그리려는 제가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지 탐색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은 (…) 사건이었고, 움직임이었고, 길 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방향을 얻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
왜냐하면 시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시는, 일종의 언어의 형상이고 그 점에서 본질적으로 대화이기 때문에, 유리병에 든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항상 커다랗지만은 않은―믿음 속에서 보내진, 그 편지는 언제고 어느 곳이든 뭍에 닿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심장의 나라에. 시들은 이런 식으로 길 위에 있습니다: 시들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향해서일까요? 열려 있는 그 무엇, 차지할 수 있는 것,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러한 현실들이, 제 생각에는, 시의 핵심입니다.”
_ 파울 첼란, 1958년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문 中
허수경 시인의 유고로 남은 한국어판 ‘파울 첼란 전집’은 총 다섯 권으로 꾸려진다. 2000년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총 일곱 권으로 펴낸 전집(Paul Celan: Gesammelte Werke in sieben Bänden) 중 첼란이 동경하고 높이 평가했던 해외문학작품들에 대한 그의 독일어 번역저작물을 묶은 두 권을 제외한 전작을 저본으로 삼아, 한국어판 ‘파울 첼란 전집’이 완성되었다.
첼란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이자 나치 수용소에 대해 출판된 최초의 시들 중 하나인 「죽음의 푸가」가 실린 공식적인 첫 시집 『양귀비와 기억』을 비롯해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 『언어격자』 『누구도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