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우리나라 법의학계에 문국진 교수가 있다면,
미국에는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가 있다.”
★★★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 추천 ★★★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과학수사관은 장갑을 끼고 핀셋으로 증거물을 수집하고,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지 모를 지문을 채취한다. 법의학자는 죽은 자의 몸에 남겨진 죽음의 흔적을 하나씩 살핀다. 과학수사를 빼놓고는 오늘날 살인사건 수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중심에는 법의학이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퍼블리셔스 위클리〉 등 해외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아주 작은 죽음들》은 미국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Frances Glessner Lee(1878~1962)의 삶을 통해 법의학이라는 학문이 시작된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여자가 대학에 가는 일이 흔치 않았던 시절, 당시 검시관이었던 조지 버지스 매그래스의 한마디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학 학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프랜시스를 법의학으로 이끌었다. 부패한 코로너 제도를 검시관 제도로 바꾸고, 대학에 법의학과를 개설해 전문가를 배출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프랜시스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그 첫걸음은 하버드 의대에 법의학과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랜시스는 학과를 이끌 교수진을 구성하고 매그래스 도서관을 만드는 등 하버드대에 경제적·물리적·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아가 법의학은 법학, 의학, 경찰 세 분야가 모두 탄탄해야 한다고 생각해 경찰을 위한 살인사건 세미나를 여는 등 어느 하나 프랜시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프랜시스의 노력이 모두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실제 하버드대에 법의학과가 생겼고 살인사건 수사에 대한 경찰들의 인식 개선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남아 있는 프랜시스의 기록처럼 ‘그 삶은 외롭고 겁나는’ 것이었고, 학위가 없다는 것과 여자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기도 했다.
일련의 시련에도 법의학을 향한 프랜시스의 지성, 강인함, 재력, 영향력은 살아남아 현대 법의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프랜시스가 남긴 업적 중 이 책에서도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살인사건 현장을 미니어처로 만든 디오라마다. 살인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이 디오라마는 주로 경찰 살인사건 세미나에 활용됨으로써 과학수사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18개의 디오라마 중 6개의 사진과 함께 프랜시스의 생전 모습이 책에 함께 실려 있다. 동시에 《아주 작은 죽음들》이라는 제목은 프랜시스가 만든 죽음의 미니어처들을 뜻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가장 신망받는 법의학자인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가 이 책을 추천했다. “우리나라 법의학의 태두 문국진 교수와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에게서 공통점을 본다”고 썼듯, 유성호 교수의 추천사는 국내외 법의학을 같이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볼 수 있을 만큼
간단명료한 진실만을 찾아야 한다.”
폭력과 죽음이 깃든 디오라마, 과학수사의 얼굴을 바꾸다
법의학을 생각했을 때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이름을 떠올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프랜시스의 경찰 살인사건 세미나와 디오라마는 ‘살인과 인형의 집’이라는 특집기사를 내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언론에서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의 사교계 여성, 돈 많은 페미니스트, 무시무시한 인형의 집을 만든 노부인…… 프랜시스는 그 배후에 있는 돈 많은 여성 정도로만 축소되어 보도되었다. 이는 프랜시스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프랜시스는 자신의 이름이 법의학에 앞서 언급되기를 원치 않았고, 이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프랜시스가 세상을 떠나고 50년도 더 지난 뒤,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 작업을 완성한 이는 메릴랜드주 수석검시관실 공공정보원으로, 디오라마 관리인이자 프랜시스의 전기 작가인 이 책의 저자 브루스 골드파브다. 골드파브는 디오라마와 관련된 그림, 미술품, 서류들을 모았고 70년 된 이 디오라마의 보존 작업을 위해 전문가들과 함께 모든 작업 과정에 참여했다. 마침내 ‘의문사에 관한 손바닥 연구’라 불리는 이 디오라마들은 2017년 말에서 2018년 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그녀의 취미는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공개 전시되었다.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의 손에서 디오라마는 이에 걸맞은 대접을 받았고, 이 책을 통해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이름도 재조명되었다.
의문사를 다루는 방식: 코로너 제도와 검시관 제도
법의학 분야에서 프랜시스가 이룩한 개척자로서의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지난 수백 년간 죽음, 특히 의문사를 어떻게 다루어왔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1944년 미국에서 일어난 약 28만 3000건의 의문사 중 1~2퍼센트 정도가 자격을 갖춘 검시관의 조사를 받았다. 당시 보스턴, 뉴욕, 볼티모어 등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코로너 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코로너 제도는 중세 영국에서의 매장물 조사관 제도로, 코로너의 임무에는 세금 등 왕실이 받아야 할 돈을 받는 것을 포함해 갑작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사망 사건을 조사하는 일까지 포함돼 있었다. 코로너는 사망 원인과 사망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밝혀야 했는데, 사실 의학도 법학도 알 필요가 없었고 대부분 글도 모르는 농부였다. 이들은 배심원과 함께 조사와 재판이 뒤섞인 사인 심문을 했는데, 시신을 보고 목격자 진술을 들은 뒤 투표로 평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 전문지식도, 과학적인 증거도 없이 모든 것이 그들의 판결로 결정되었다.
코로너 제도의 결함은 도시 지역의 인구가 팽창하면서 두드러졌다. 범죄는 증가했고 죽음에 대한 수사는 점점 어려워졌다. 코로너 제도는 부패하고 무능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코로너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위기감이 절정에 달한 사건은 시카고에서 일어났다. 신생아의 시신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고 이후 네 번이나 다른 관할 구역에 다시 버려졌다. 사인 심문 배심원은 각자 2달러를, 코로너는 10달러를 벌었다.
바로 이 세상이 프랜시스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반면 검시관 제도를 도입하면 특수 훈련을 받은 유능한 의사가 사인을 판단하고 형법적 측면은 경찰, 검찰, 법원이 수행한다. 미국 법의학을 중세에서 빼내 코로너를 검시관으로 대체하고 의문사에 대한 조사를 현대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랜시스의 목표였다.
마음 맞는 영혼, 프랜시스와 조지 버지스 매그래스
프랜시스는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프랜시스는 환자들을 왕진하러 다니는 리틀턴과 베들레헴의 지역 의사들을 따라다니며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당시 의학은 여성이 선택하지 않는 분야였으나 1800년대 말이 되면서 몇몇 여자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 여자들이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는 마음만 먹으면 의대에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랜시스가 다니고 싶은 대학은 오직 하버드 의대뿐이었고 하버드 의대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이후 프랜시스는 변호사인 블레잇 리와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를 둔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51세가 된 프랜시스에게 혼란의 시기가 닥쳤다. 병에 걸린 프랜시스는 1929년 개인 치료 시설인 필립스 하우스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이때 우연히 검시관이었던 조지 버지스 매그래스도 필립스 하우스에 입원했다. 이때 매그래스와 함께 보낸 시간이 프랜시스의 인생 축을 흔들어놓는 사건이 되어 법의학에서의 업적으로 이어졌지만 당시로서는 이를 예견할 수 없었다. 매그래스는 프랜시스의 오빠 조지의 하버드대 동창으로 어린 시절부터 봐온 사이였다.
다시 만난 프랜시스와 매그래스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특히 프랜시스는 검시관이라는 매그래스의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매그래스는 프랜시스에게 자신이 담당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