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

김선호
1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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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오즈 야스지로의 공과 사 서문: 오즈 야스지로의 공과 사 5 인간 오즈 야스지로에 관한 단상 인간 오즈 야스지로에 관한 단상 11 오즈는 무엇을 잊었는가 26 오즈 영화 속의 류 치슈 38 오즈 영화 속의 연결 50 오즈 영화 속의 차이와 반복 66 오즈 영화 속의 결별 78 오즈 영화 속의 침묵 98 오즈 영화 속의 아버지 114 오즈 영화 속의 계절 127 오마주 투 오즈 오즈라는 이름의 열차 148 오즈의 현대를 그려본다는 것 159 오즈의 흔적을 기억한다는 것 171 오즈를 오마주하기 179 오즈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후기: 오즈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187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오즈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오즈 사단'으로 불리는 자신의 스태프들을 몹시 챙겼다. 오즈의 스태프들은 촬영장이 마치 자신의 집에 놀러 오듯 편안했다고 증언한다. 마치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오즈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았다. 오즈는 삶은 곧 드라마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그의 말처럼 그에게 영화란 삶 그 자체였다. 즉 오즈의 영화는 삶을 포착한 것이지 허구로 창작해낸 게 아니다. 어쩌면 오즈가 가족 영화를 만드는 만큼 가족같은 분위기가 나온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에 관한 증언들은 오즈가 살아생전 따스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오즈는 이렇게 공과 사의 구분을 짓지 않는 분위기로 가족 영화를 찍는다. 이런 소재는 직장이나 군대처럼 경직된 조직을 풀어나갈 때 더 극적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즈는 가장 가깝고도 내밀한 집단인 가족을 택한다. 가족이라 함은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것일 텐데 왜 오즈는 가족을 소재로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었을까? 그 이유는 오즈 본인에게 물어야겠지만, 오즈의 삶을 되짚어 보면 전쟁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공과 사의 경계는 국가에 헌신하는 국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자연스레 허물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오즈가 전쟁을 긍정했던 것은 아니다. 오즈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세 번이나 군대에 끌려갔다. 이 중 두 번은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역할이 아니었지만, 단 한 번 중일 전쟁에 끌려갔을 때 오즈는 화학무기를 퍼뜨리는 부대에 징집되었다. 그리고 이때 오즈는 전쟁의 참혹함에 가장 근접했다. 오즈는 중일전쟁 동안 가장 친했던 친구를 잃는 등의 슬픔이 있었지만 오히려 전쟁에 관해서는 어떠한 가치 판단도 내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오즈는 참전부대로서 한국인 위안부를 건조한 시선으로 서술한다. 또한 자신이 군인으로서 하는 일을 서술하기보다는 편지나 식사 등의 소소한 일상을 서술하면서 가족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했다. 그런 성찰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오즈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종전 이후의 오즈 영화는 본격적으로 가족을 소재로 촬영을 시작한다. 그 시작이 바로 <나가야의 신사록>(1947)이다. <나가야의 신사록>은 무척 단촐한 이야기다. 어느 여인이 고아로 보이는 소년을 거둔다는 이야기다. 시기적 맥락을 보았을 때 이 꼬마는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다. 그런 아이를 매몰차게 대하던 여인은 마침내 아이에 정을 붙인다. 이제 두 사람은 가족이 된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이른바 '유사가족'인 셈인데, 오즈는 이 영화를 통해 국가가 국민을 그렇게 보듬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이라는 게 국가의 축소라고 말할 수 있다면, 국가는 홀로 남겨진 국민을 거두어 가족의 품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이다. 전후 오즈 영화에서 나타나는 가족의 양상은 사실상 전쟁을 겪은 국가가 슬픈 국민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관한 묘사라 할 수 있다. 오즈는 전쟁의 몇몇 문제보다 홀로 남아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더 관심이 있었다. 즉 오즈에게 전쟁이란 영화 속의 사물처럼 그저 인물의 삶을 위해 소모되는 배경에만 불과했던 셈이다. 가령 오즈의 영화 <꽁치의 맛>에는 전쟁 때의 해군가를 부르면서도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 특이한 인물이 나온다. 그는 전쟁을 추억하지만 감정이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전쟁은 일종의 추상으로 남는다. 이처럼 오즈는 공과 사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삶은 드라마다'라는 단일한 공식을 세운다. 어쩌면 무책임하기도 해 보이는 이 태도는 오즈의 인물들이 왜 흘러가는 대로 사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즈의 영화 <부초>에서 그 부분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영화는 어렸을 때 자식을 버린 부모가 불현듯 자식 앞에 나타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아버지는 떠돌이 유랑극단이어서 아이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며 분노한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단지 이름뿐이었으며 그래서 두 사람은 가족이지만 공적인 관계였다. 그런데도 오즈는 두 사람을 애써 화해시키려 하지 않고 그저 내버려둔다. 그건 공과 사가 아니라, 그것 또한 가족의 형태 즉 삶의 일부라고 말이다. 당대 쇼치쿠 누벨바그의 일원들은 오즈의 이런 태도를 '소극적'이라거나 '보수적'이라는 말로 비판했다. 삶은 드라마가 아니라 투쟁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시대를 바꾸는 것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인인 우리로서는 전후 문제에서 쇼치쿠 누벨바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오즈의 영화는 그러한 시대상이 아니라 그런 시대가 낳은 인물을 다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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