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사는 사람만 돈을 벌고 돈 없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해준 게 뭐가 있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희망이라는 것이 없다. 내일도 없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자식 낳지 말라고 말한다”
- 신용 불량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2005년 4월, 공식적으로 신용 불량자는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대출 권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신용불량자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과다 채무자 혹은 금융 채무 불이행자로 불리는 신용 불량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대출을 받은 것일까?
이들은 남의 돈으로 사치와 과소비를 하고도 이를 갚지 않으려는 부도덕한 사람들인가?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김대중 정부에서 수백만 명의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신용카드 정책이 만들어진이유는 무엇인가?
왜 신용 불량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는가?
신용카드 정책을 통해 나타난 민주화 이후 정부의 경제정책 결정 구조의 특징은 무엇인가?
‘대출 권하는 사회’의 기원과 구조를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을 중심으로정부?기업?개인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다룬 본격적인 연구서
2002년 1억487만 장, 그리고 다시 2010년 1억1,187만 장
최근 공식 통계(한국은행 2010/8)로 신용카드 발급 장수는 전년보다 11.6% 늘었다. 총 발급 장수가 다시 1억 장을 넘어선 것은 지난해 중순으로 7년 만이었다. 신용카드 발급률을 높이려는 신용카드사의 과당경쟁이 여전하고, 신용카드를 통한 대출로 가계 부담을 돌파해 보려는 양상은 카드대란이 일어났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처음 문제가 만들어진 때로 돌아가 그 기원과 구조를 살핀다.
1. 2010년, 아직 끝나지 않은 ‘대출 권하는 사회’의 문제
2000년 대 초, 정부가 전 사회적으로 신용카드 사용을 적극 권장하면서 신용카드 광고가 TV를 도배한 적이 있다. 유명 배우들이 모델로 등장했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부자 되세요”와 같은 광고 문구가 유행어가 되었다. 하지만 신용카드는 능력이 없는, 열심히 일해도 떠날 수 없는 저소득층에게 무분별하게 발급되었고, 부자가 되겠다는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용카드 대란이 일어났다. 신용 불량자로 불리는 4백만 명가량의 과다 채무자들이 발생했고, 신용카드 연체가 누적되면서 업계 수위를 달리던 신용카드사가 유동성 위기로 쓰러질 위험에 처했다.
2010년 현재, 무이자와 이자 할인을 강조하며 손쉬운 대출을 권하는 대부 업체 광고들이 케이블 방송을 도배하고 있다. 휴대전화와 이메일은 매일같이 들어오는 대출 상담 홍보 문구로 넘쳐 나고 있으며 당장 대출이 가능하다는 광고 역시 공해 수준에 이르렀다. 2010년 6월 말 현재 정부에 등록된 대부 업체만 1만5,380개, 거래자는 189만3,535명에 이른다. 이런 수치는 공식적인 대부 업체 이용 실태일 뿐 불법 사채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2~3배 이상 되는 것으로 예측된다. 사채 공화국이라고 할 만하다.
2. 신용 불량자 문제의 기원
2000년대 초 신용카드는 물건을 사고 대금을 나중에 지불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신용판매 용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신용카드사들은 주업무인 신용판매에서 전체 매출의 30퍼센트를, 이른바 부대 업무라 불리는 현금 서비스와 카드론에서 매출의 70퍼센트 이상을 올리는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다. 대출이 필요한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를 매겨 엄청난 수익을 올린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고비를 써가며 경쟁적으로 신용카드 발급을 확대하려 했던 것은 현금 서비스와 카드론을 이용하는 저소득층 고객들의 대출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출을 권하는 사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용 불량자 문제는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금융에 대한 규제완화가 이루어지면서 신용의 상품화와 더불어 약탈적 대출시장이 만들어진 결과로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으로 신용카드가 쉽게 발급되었다는 문제는 인정하지만,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사용한 끝에 신용 불량자로 전락한 것은 결국 개인의 탓이라고 말한다. 대다수의 여론과 보수 언론도 정부의 신용 회복 정책이나 개인 파산 문제에 대해서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이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용 불량자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넘어 대출을 받고 그렇게 대출받은 돈으로 사치와 과소비를 했던,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일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음에도 이득을 얻었던 주체는 따로 있었다. 신용카드를 손에 쥐어 주며 소비가 미덕이고 국가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신용카드 사용을 독려했던 것은 정부, 더 정확히는 김대중 정부였다. 그런 정부 정책으로 신용카드를 통한 대출에 30퍼센트에 이르는 고금리를 적용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긴 것은 신용카드 업체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재벌 대기업들이었다.
민주 정부가 경제 위기로 끝없이 추락하는 내수 소비를 활성화하고자 신용카드 규제들을 풀자 새로운 재벌 대기업들이 신용카드 업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신용카드사들 간의 과당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정부?기업, 개인이 모두 신용카드 대출 광풍에 휩쓸려 들어간 결과, 불과 몇 년 만에 경제활동인구의 16퍼센트에 육박하는 4백만 명의 신용 불량자가 양산되었다. 신용카드사들 역시 무분별한 대출을 제공한 결과 부실 채권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이른바 카드 대란을 맞았다. 김대중 정부에서 만들어진 신용 불량자 문제가 노무현 정부에서 폭발했고, 노무현 정부는 2004년 말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2005년 4월 신용 불량자 등록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신용 불량자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3. ‘대출 권하는 사회’의 문제와 한국 사회
지난 16일 서울 상계동에 미소금융 100호 지점 개소식이 열렸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친서민 행보의 대표적인 정책으로 2009년 12월에는 미소금융, 2010년 7월에는 정부와 서민 금융회사가 공동으로 출자한 햇살론을 출시한 바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저신용?저소득 서민에게 10퍼센트대의 저금리로 대출을 해준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정작 저신용?저소득 서민에게는 대출의 문턱이 지나치게 높아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정부 정책의 모델이자 대표적인 마이크로 크레디트 기관인 그라민 은행과 관련해 최근 고위층의 횡령, 고금리, 강제 상환 등의 문제가 불거진 것도 이런 대응 방식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이미 수천만 원의 빚을 진 신용 불량자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는 방식’은 빚을 늘릴 뿐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대출 서비스만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무분별하게 전개되는 대부 업체들의 공격으로부터 저소득 서민층을 보호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전에는 보통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통해 거액의 현금 대출을 받는 것은 물론 신용카드를 발급받기도 쉽지 않았다. 대출 시장 나아가 금융시장의 조건을 크게 변화시켰던 신용카드 관련 정부 정책과 과당 경쟁에 뛰어들었던 신용카드사의 정책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거액의 대출도, 대출에 따른 연체도, 따라서 신용 불량자 문제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경제 위기 이후 대량 실업과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면서 실질소득 감소를 경험하고 낙후한 사회복지 체계로 고통 받던 저소득층에게 신용카드를 통한 손쉬운 현금 대출이 가능해졌다. 경제 위기로 생활비·병원비·교육비가 필요했던 서민들에게 신용카드를 쥐어 주며 소비가 미덕이고 그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