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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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기독교계에 파문을 일으킨 명저, 수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게 한 『예수는 없다』 전면 개정판 출간! 출간 이후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한국의 대표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가 출간 15주년을 맞아 새롭게 태어났다. 2001년 처음 출간된 이래 40쇄를 찍는 동안 이 책은 근본주의 교단이 대부분인 한국 기독교계를 통렬히 비판함으로써 수없는 찬반 논쟁을 낳았다. 저자는 우리 교회의 교리만이 진리라고 여기는 유아기적 태도와,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현대의 가치에 맞지 않게 그 내용을 고수하려는 문자적, 율법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상업주의에 찌든 교회에 얽매이기보다 성경과 예수가 진정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자기 종교를 되돌아보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은 비단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잘 모르고, 심지어 일부 교인의 배타적 태도에 반감을 느껴오던 비기독교인에게도 서양 문명의 근간인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기독교인이 아닌 이에게는 잔인하게만 느껴지던 구약성서 속 신의 모습, 예수는 과연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 예수는 정말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는지 등 여러모로 의문스럽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근거와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하여, 인문학적 호기심을 가진 일반 독자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이번 개정판에는 종교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21세기 사회에서 분쟁과 갈등, 심지어 전쟁을 조장한다는 오명을 쓴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최신 글 <탈종교화 시대에 종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와 예수의 114개 어록을 만날 수 있는 「도마복음」을 소개한 <또 다른 예수> 등이 새로 실렸고, 최근 신학계에서 주요하게 논의되는 저서들을 참고문헌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예수는 없다』, 더욱 친절하고 상세해진 개정판은 더 많은 독자들이 성경과 예수와 신을 제대로 알고, 새로운 신관을 통해 더 깊은 신앙, 혹은 더 지혜로운 삶의 혜안을 갖게 할 것이다. ‘예수에 관한’ 믿음에서 예수가 가졌던 것과 같은 ‘예수의 믿음’으로 이 책은 “과연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었던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출간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공격받았지만, 지은이는 사실 어느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평생을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연구해온 비교종교학자로서, 그는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에 얽매여 있는 한국 기독교의 경직되고 근본주의적인 행태를 가차 없이 비판한다. 저자는 성경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으로 여겨, 그 어구 하나하나를 신의 음성으로 떠받드는 유아적 종교관에 매여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성경의 본뜻을 제대로 알고, ‘예수에 관한’ 상업주의 교회의 가르침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졌던 것과 같은 ‘예수의 믿음’을 따르자는 이야기다. 최근 신학계의 동향은, 앞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faith about Jesus)’보다는 ‘예수님의 믿음(faith of Jesus)’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에 대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이런저런 교리나 이론을 무조건 믿기보다는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믿음,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던 마음을 알고 우리도 그런 믿음,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숭배하기 전에 그의 신앙이 어떠했던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본문 222쪽) 이를 위해서는 예수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역사적 예수’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기독교인이 문자주의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문자주의란 성경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인데, 저자는 올바른 기독교인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이 문자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호수아가 해를 보고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수 10:12)라고 하자 해가 정말로 잠시 그 운행을 중단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역사적,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믿는다는 것인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성경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 변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을 열고 우리 속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 우리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이 바뀌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자유스럽게 되는 데 성경이 절대적 힘을 가졌음을 믿는 것, 이것이 성경을 믿는다는 것의 기본 의미가 아닌가. (본문 83쪽) 저자는 성경이 역사적,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일차 목적으로 삼은 책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 안에는 현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깨달음을 주려는 것인지 파악하고, 여러 비유와 상징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새로운 관점의 성경 해석 저자는 개정판 서문에서 “이른바 골수파 근본주의 교단에 속하는 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는 자기 교회의 가르침을 100퍼센트 다 옳은 것이라 수긍하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라고 말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조차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며 속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점들을 저자는 해박한 신학 지식으로 명쾌하게 풀어준다. 예를 들어,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종속물이라는 식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원전을 근거로 들어 반박한다. 아담의 갈빗대에서 하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갈빗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첼라(tsela)’라는 단어다. 그런데 이 말을 반드시 ‘갈빗대’라 번역할 필요는 없다. 기원전 3세기에 나온 그리스어 70인 역에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담의 ‘첼라’에 한해서만은 그것을 ‘갈빗대’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 후 계속 ‘갈빗대’로 이해되어왔을 뿐, 그 단어 자체는 그냥 ‘한쪽(side)’이라는 뜻이었다. 「출애굽기」 26장 20절에 보면 “성막 다른 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다른 쪽’의 원문이 바로 ‘첼라’다. 첼라를 다른 한쪽이라든가 다른 한편으로 번역한다면, 아담의 갈비뼈를 꺼내서 하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한쪽’을 잘라 하와를 만든 것이 된다. 그뿐 아니라 신을 남성으로 여기며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전통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은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도 되고, 또 남성·여성임과 동시에 이 둘을 다 넘어서서 둘 다 아닌 분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신을 절대자로 생각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남녀성을 구유(具有)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신이 반드시 남성으로만 묘사되어 있지 않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성경은 신을 남성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리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신을 남성으로 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하더라도, 신을 남성으로만 볼 수 없었던 고충이 여기저기 충분히 드러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신의 이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의 이름들 중에 히브리어 성경에 2,500번가량 나올 정도로 중요한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어원적으로 따져보면, ‘엘’이라는 남성 신과 ‘엘로아’라는 여성 신의 이름을 합한 복합명사에다가 복수를 나타내는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