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

김용언 · エッセイ
2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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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에서 전혜린까지, 읽고 쓰는 여자들의 수난사. 저자 김용언은 전혜린을 경유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읽기와 쓰기가 폄훼되어온 기나긴 역사를 파헤친다. 1920~30년대 ‘여류 작가’들이 글을 쓴다는 사실만으로 신기한 취급을 받으며 남성 평자들에게 멋대로 논평할 대상이 되곤 했던 풍경을 환기시키고, 1960년대 여학생 대상의 잡지에서 “지나치게 감상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소녀다움을 잃어서도 안 되는” 이중규범을 발견한다. 걸출한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나혜석조차 「이혼고백장」에서 가부장제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격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가족과 사회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채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여성 작가는 작품이 아닌 ‘스캔들’로 소비되기 일쑤였다. 잡지 《신여성》에는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 《신여자》 주간으로 활약했던 김원주 등 여성 문인들의 온갖 사생활과 뜬소문을 폭로하며 깎아내리는 코너 ‘색상자’가 있을 정도였다. 1930년대부터 등장한 강경애, 모윤숙, 최정희 등 ‘2세대 여류 문사’들은 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여류에 대한 편견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소녀 문단”, “여류라는 프레미엄”, “지나친 섬세 감각이라는 한계성” 등 이 시기 여성 문인들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범주화한 남성 지식인들의 언어를 자세히 살펴본다. 한국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과거를 추적함으로써, 왜 소녀들은 전혜린의 글을 통해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에 입문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경멸과 비웃음을 이기지 못하고 ‘여류’를 벗어나려 애쓰게 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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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들어가며 전혜린은 ‘흑역사’인가 1 전혜린이라는 예외적 존재 2 한국을 탈출하려는 꿈 3 전근대 한국의 세계시민 4 전혜린은 ‘창작’하지 못했는가 5 수필이라는 퍼포먼스 6 신의주, 부산, 그리고 슈바빙 7 번역가 전혜린 8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 된다” 9 신여성에서 여학생까지, 소녀의 탄생 10 ‘소녀 감성’의 폄하 11 여류 작가 수난사 12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 13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 후기 참고문헌 전혜린 연보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신여성에서 전혜린까지, 읽고 쓰는 여자들의 수난사 미문 취향, 낭만적 감상성, 부르주아, 서구 동경, 소녀 감성……. 오랜 세월 여성 작가들의 글에 따라붙어온 수식어들이다. ‘문학소녀’라는 말도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역사의식’이 없으며, ‘감상주의’에 치우쳐 있는 ‘미숙한 글’이라는 등의 온갖 폄하를 응축한 것 같은 단어다. 그리고 전혜린은 그런 ‘부잣집 철부지 문학소녀’의 대명사로 가장 자주 불려나왔던 인물이다. 박정희는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이런 교양주의를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의 소녀”라 부르며 “피와 땀과 눈물을 모르는, 노동하지 않는 자”, “우리의 적”으로 지목함으로써 전혜린, 문학소녀를 구악(舊惡)이자 적폐로 상징화하기도 했다. 온통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남발하고, 한국에 발을 딛고도 유럽의 어딘가를 고향처럼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몰두했던 전혜린의 글은 많은 여성들에게 책 읽는 사람으로서 자의식을 키우게 만든 출발점이지만, 황급히 잊고 극복해야 할 ‘흑역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문학소녀』에서 그 스스로 ‘읽고 쓰는 여성’인 저자 김용언은 전혜린을 경유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읽기와 쓰기가 폄훼되어온 기나긴 역사를 파헤친다. 1920~30년대 ‘여류 작가’들이 글을 쓴다는 사실만으로 신기한 취급을 받으며 남성 평자들에게 멋대로 논평할 대상이 되곤 했던 풍경을 환기시키고, 1960년대 여학생 대상의 잡지에서 “지나치게 감상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소녀다움을 잃어서도 안 되는” 이중규범을 발견한다. 걸출한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나혜석조차 「이혼고백장」에서 가부장제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격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가족과 사회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채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여성 작가는 작품이 아닌 ‘스캔들’로 소비되기 일쑤였다. 잡지 《신여성》에는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 《신여자》 주간으로 활약했던 김원주 등 여성 문인들의 온갖 사생활과 뜬소문을 폭로하며 깎아내리는 코너 ‘색상자’가 있을 정도였다. 1930년대부터 등장한 강경애, 모윤숙, 최정희 등 ‘2세대 여류 문사’들은 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여류에 대한 편견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소녀 문단”, “여류라는 프레미엄”, “지나친 섬세 감각이라는 한계성” 등 이 시기 여성 문인들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범주화한 남성 지식인들의 언어를 자세히 살펴본다. 한국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과거를 추적함으로써, 왜 소녀들은 전혜린의 글을 통해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에 입문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경멸과 비웃음을 이기지 못하고 ‘여류’를 벗어나려 애쓰게 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문학소녀는 작가가 되지도 못할, 글을 제대로 쓰지도 못할,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인문-사회-과학서들이 아니라 감정의 몰입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과 시에 열중하며 여전히 몽상을 끄적거리는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독자라는 느낌이다. 전혜린은 그런 사람의 대표자처럼 자꾸만 불려나왔고, 그래서 어릴 때 전혜린의 글을 읽고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여전히 ‘전혜린의 상태’에 머무르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17) [1965년 창간한 잡지 《여학생》에 실린 세계문학 작품 소개 기사에 관해] 이를테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주인공을 설명하는 기사가 이런 식이다. “돈키호오테 형이라면 적어도 축복받은 느낌을 주지만 결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가볍게 살아가는 타이프는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력으로 이상을 구하는 영원한 젊은이다. 당신 주변에도 조금 괴짜인 실수만 거듭하는 남자가 있을 것이다. 낙제 점수를 받거나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거나 간에 초연한 자세로 있는 이러한 타이프는 보이 프렌드로서는 ‘햄릿형’보다 호감이 가는 타이프다. 고민을 상의하면 즉석에서 해결해 줄 것이다.” 혹은, 여성 주인공을 설명할 때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은 “고집이 센 여성”,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의 세실은 “에고이스트이자 질투심이 강한 여성”으로서 이성 교제에서 불리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니 이성 친구가 리드할 수 있는 여지를 좀 더 주는 게 좋다는 조언을 덧붙였다고 한다.(147) 소녀들의 독서와 글쓰기는 훈육과 계몽의 주체, 많은 경우 ‘남성’들의 시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떤 소녀는 실존주의 문학을 ‘잘못’ 이해해서 자살을 기도했고, 어떤 소녀는 ‘소녀답지’ 않은 현실 인식을 글로 썼기 때문에 옳지 않고, 또 어떤 소녀는 과도한 감상을 글로 쓰는 바람에 ‘열등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공인된 권장 도서를 읽되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고 교양으로서의 지식으로만 습득해야 했고, 그럼으로써 ‘소녀다운’ 순수성은 간직하며 남성-어른들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대단히 복잡한 과제가 제시된 것이다.(157) “남성 작가는 감쪽같이 자기를 은폐하고도 걸작을 내놓을 두력(頭力)을 가졌지마는, 그를 못 가진 여성 작가에 있어서는 반대로 있는 대로의 자기를 표박(漂迫)할 때에 한해서 볼 만한 글을 내놓는다는 불문율을 새로이 인식하였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신진 문단에 등록될 작품”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여류 문단’,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류 문단’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문청(文靑) 문단이란 말에 대하여 소녀 문단”이라 불러 마땅한 집단에서, 최정희의 ‘수필’이 자신의 내면 혹은 사생활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내어 남성은 쓸 수 없는 방식으로 표면에 끌어올렸기 때문에 그나마 봐줄 만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182) 대중들이 열광하고 사랑하는 ‘말랑말랑한’ 종류의 책에 대해 단호하게 그것은 ‘고급 문예’가 아니고, ‘일류 문사’가 쓸 법한 글이 아닌 종류의 ‘창피한’ 책이라는 경멸은 나름의 기준을 통해 고급과 저급의 구분을 가르고, 대중과 지식인 사이의 경계선을 가르고 있는 이들이 취하는 태도다. 천정환은 1920년대부터 “낭만적 감상성의 문학”, “미문 취향”은 극복해야 할 한계이며 공격받아 마땅한 대상이었다고 확인한다.(194) 어쩌면 전혜린은 제1기 여류 문인과 제2기 여류 문인이 겪은 호기심과 조롱과 모욕적인 숭배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한국에 돌아온 전혜린이 급작스레 자신의 평범함과 초라함을 과장스럽게 자문하게 되었던 과정에는 재능에 대한 불안뿐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표현을 빌자면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과 (당시 남성 문인들이 전혜린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썼던 단어인) “괴짜”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당시의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녀는 ‘슈바빙의 자유로운 개인의 위치’에서 ‘1960년대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현실’로 급작스럽게 내동댕이쳐진 것이다.(196~197)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국가와 혁명과 나』를 집필하며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저 특권 지배층의 손”, 그 “보드라운 손결”이 “우리의 적”이라고 지목했다. 그는 왜 부정부패를 통해 대부분의 국민들을 수탈하며 계층의 극단화를 실현했던 ‘주적’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식민지 시기를 급작스럽게 끝낸 다음 큰 혼란 속에 전쟁까지 치르게 된 상황을 이용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했던 이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거기에 느닷없이 ‘고운 손으로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의 형상을 세우는가? 스스로를 변호할 힘이 없기 때문에 비난하기에 가장 손쉬운 대상인 문학소녀는 노동하지 않는 자, 피와 땀과 눈물을 모르는 자로 순식간에 변신한다.(209) ‘책 읽는 여자의 흑역사’ 전혜린을 다시 읽다 “전혜린의 수필들은 비범함을 열망했던 평범한 여성의 평범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고종석이 『말들의 풍경』에서 전혜린에 대해 내렸던 냉정한 선고다. 많은 평자들은 전혜린을 ‘문인’ 혹은 ‘작가’로 부르기를 저어했고, 그녀는 ‘제대로 된’ 작가라기보다 철없는 시절의 열광, 미성숙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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