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 상을 받은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 『순수의 시대』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183)으로 출간되었다. 여성의 글쓰기가 별스러운 ‘도락’으로 치부되던 시절 워튼은 섬세한 필치와 뛰어난 균형 감각, 품위 있는 풍자로 “헨리 제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미국 문단의 중심에 당당히 섰다. 그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발표한 『순수의 시대』에서 번영을 구가하던 옛 뉴욕의 상류사회를 세밀화처럼 정교하게 복원했고, 세 남녀의 삼각관계를 통해 욕망과 도덕, 이성과 감정, 전통과 변화 사이의 대립과 융합을 그려 냈다. 이 소설은 출간 직후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세 차례에 걸쳐 영화화되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당연히 포기해야만 하는 세계
‘축복 같은 어둠’에서 추방된 여자와 그녀의 눈을 보고 만 남자
1870년대 뉴욕, 자신이 속한 세계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살아온 부유한 변호사 뉴랜드 아처는 티 없이 순수한 메이 웰랜드와 약혼한다. 한 폭의 그림처럼 이상적인 연인들의 평화는 메이의 사촌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등장으로 흔들린다. 잔혹한 남편을 피해 집을 뛰쳐나와 뉴욕으로 돌아온 엘렌은 금세 사교계의 추문거리가 된다. 뉴랜드는 메이의 부탁을 받아 마지못해 엘렌을 돕다가 점차 그녀의 독특한 매력에 이끌린다. 미국에서 성장하고 유럽에서 결혼 생활을 하며 두 문화를 누리고 사치와 핍박을 동시에 경험한 엘렌은 지금까지 뉴랜드의 주변에 없었던,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여성이다. 엘렌을 통해 뉴랜드는 그가 믿고 있던 세계가 ‘축복 받은 어둠’에 불과하며, 인간적인 감정을 배제함으로써 순수를 유지하는 공허한 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상적인 여성이라 믿었던 메이가 그 사회의 충실한 산물로서 스스로 사고할 능력이 없는 조화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환멸을 느낀다.
뉴랜드와 엘렌은 사랑에 빠지지만 이미 때가 늦어 그는 메이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고, 뉴랜드는 엘렌이 상징하는 진정한 충족과 자연스러움을 애타게 갈구한다. 그는 그녀에게 도망치려 하지만 엘렌은 가족과 사회에 대한 그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 것을 호소한다. 뉴욕 사람들이 장식처럼 몸에 두른 위선과 달리 엘렌의 도덕률은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눈치 챈 뉴욕 사교계는 메이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엘렌을 추방한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던 뉴랜드도 메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현실에 주저앉아 버린다.
그들이 그렇게 헤어져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동안, 뉴랜드의 마음속에서 엘렌은 점차 간절히 소망했으나 얻지 못한 ‘인생의 꽃’으로 피어난다. 세월이 지나 노년에 접어든 뉴랜드는 엘렌과 재회할 기회를 얻지만 그녀의 집 창문을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과거의 기억 속에 은둔한 뉴랜드에게는 환상을 깨고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시작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두 문화와 두 시대의 융합을 시도한 작가
이디스 워튼은 『순수의 시대』의 여주인공 엘렌 올렌스카처럼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유럽에서 주로 생활했고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러한 경험은 워튼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대 가장 중요한 작가였던 헨리 제임스와 유사하며, 워튼의 작품에도 제임스가 주로 다룬 ‘국제상황 주제’, 즉 신세계와 구세계의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 사회 풍습과 윤리 규범의 만남과 충돌이라는 주제가 자주 드러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번영을 구가하는 신대륙 문화에 거부감을 표한 제임스와 달리 워튼은 엘렌 올렌스카가 유럽의 자유로움과 미국의 도덕관념 모두를 수용하듯 두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또한 지나간 시대를 향수 어린 시선으로 정교하게 복원하는 한편, 『순수의 시대』 마지막 장에서는 뉴랜드의 아들 댈러스가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원하는 상대와 결합하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다가올 시대에 대한 희망을 표시했다.
아들은 섬세하지는 않았지만, 운명을 자신의 주인이 아닌 동등한 상대로 보는 데서 비롯된 여유와 자신감이 있었다. ‘바로 그거야. 저들은 뭐든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자기들의 길을 알고 있어.’ (본문 439쪽)
즉 1차 세계대전의 종점에서 워튼은 이 소설을 집필함으로써 뉴욕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고 공허했던 시기를 스스로 마감하고, 경계와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새 시대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