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자 철학자였던 마그리트
“우리는 우리 밖의 세상을 보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 - 르네 마그리트
액자 속 그림 안에 또 하나의 그림을 즐겨 그려 넣던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갖고 있는 한계를 종종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시킨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파리가 된 새, 나무가 된 여인, 구두가 된 발, 낮과 밤 등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거리. 그의 그림에는 기이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분위기, 상식을 깨는 묘한 매력이 서려 있다. 시뮬라크르, 기호와 상징 등 현대미학의 여러 주제를 설명할 때 단골처럼 등장하는 화가가 마그리트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달리나 미로 등 여타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에 비해 논리정연한 질서에 기반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미술의 오랜 목표이던 실물의 재현에서 벗어나려한 근대 화가들이 추상회화로 나아갔던 것과 달리 마그리트는 정교하고 세밀한 구상회화를 그리되 실물의 재현이기를 거부했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귀를 써놓은 「이미지의 배반」 같은 작품이 바로 마그리트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갖고 있는 통념, 상식을 끊임없이 분석해 이를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표현한 마그리트는 사실 화가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깝다.
마그리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그림은 누구에게나 친숙하다. 파이프, 검은 중절모 쓴 남자, 가려진 얼굴, 일상적인 사물 속에 들어 간 푸른 하늘 등 이 모든 것들에 마그리트의 상표가 찍혀 있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신문, 잡지, TV 광고에 마그리트풍의 광고가 없는 날이 없을 정도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마티스나 샤갈처럼 아름다운 색채로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림도 아니고 어찌 보면 무미건조한 사실화일 뿐이다. 그럼에도 마그리트의 그림이 그토록 많은 광고 이미지에 인용되고 있다는 것은 뭔가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코드가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그리트에 대한 필자의 지적인 관심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유사(類似)와 상사(相似)
필자는 푸코가 1973년에 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그 단서를 발견한다. 르네상스 이래 서구 미술사를 지배해 온 두 가지 원칙은 첫째, 글과 그림은 다르다는 것이고, 둘째, 그림과 제목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문자 요소와 조형 요소가 전혀 일치하지 않고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은 그 누구의 그림보다 더 클레나 칸딘스키와 닮았다. 다만 마그리트는 유사의 파괴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물과 철저하게 유사한 형태들을 비상식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우리의 허를 찌른다.
유사(類似)와 상사(相似)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해석하는 유용한 코드다. 모델을 충분히 복사한 그림이 원본과 유사의 관계라면, 모델과는 아무 상관없이 복제품끼리 서로를 닮아가며 반복하는 이미지들은 상사의 관계다. 예컨대 모나리자는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여인이라는 실제의 모델을 비슷하게 모사한 사본인데 비해, 앤디 워홀의 색깔만 달리할 뿐 똑같은 얼굴의 마릴린 먼로 시리즈는 모델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복제품이었던 어떤 사진을 조금씩 다르게 반복한 시뮬라크르다.
플라톤에게서 시뮬라크르는 이데아와 닮지 않은 허상을 의미했다. 현대에 와서 시뮬라크르는 원본 없는 이미지를 뜻한다. 들뢰즈는 플라톤이 사본과 시뮬라크르라는 두 종류의 이미지 중에서 사본의 우월성만 주장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플라톤에 의해 사악한 이미지로 폐기처분 당했던 시뮬라크르의 권리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들뢰즈가 복권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성질이 다름 아닌 ‘차이’와 ‘반복’이다. 이미지의 등급에서 낙오되어 수천 년간 동굴 속에 처박혔던 시뮬라크르들이 20세기의 들뢰즈를 통해 다시 권리를 회복한 것이다. 그리고 팝아트, 미디어아트 등의 예술을 통해 활짝 개화하고 있다.
마그리트의 상사가 시뮬라크르와 동의어라는 것이 밝혀지면 역시 시뮬라크르를 논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푸코와 들뢰즈가 그토록 열광하고 찬양했던 밝고 역동적인 시뮬라크르는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보드리야르에 오면 아주 어둡고도 비관적인 불길한 허무주의가 된다.
현대는 시뮬라크르의 시대
마그리트의 그림이 오늘날의 대중의 감수성에 그토록 부합하는 것은 거기에 시뮬라크르라는 코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코와 들뢰즈가 팝아트적 의미에서 마그리트에게 열광했다면 마그리트는 보드리야르적 시뮬라크르 이론에 더 부합하는 상상력을 펼쳤던 것 같다.
오늘날의 실재는 실제적인 실재가 아니라 조작된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실제는 하이퍼리얼이다. 하이퍼리얼이란 구체적 세계가 아닌 초월적 공간 안에서 모델들의 조합으로 합성된 다양한 생산물이다. 모든 언어는 그것이 뜻하는 지시대상이 있게 마련인데, 오늘날의 언어에는 지시대상이 없다. 겉껍데기의 기표만 있을 뿐 기의가 사라진 시대다. 실체가 없이 인위적인 가짜만이 지배하는 시대다. 시뮬라시옹의 시대인 것이다. 더 이상 모방, 복제, 패러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없애고 그것을 기호로 대체하는 것이다. 원래 기호란 실재를 모방하는 것인데, 실재는 사라지고 기호만이 그 실재를 대신하고 있다.
실재가 없어지면 실재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강렬하게 대두된다. 진품성이나 진짜에 대해 과도한 관심이 생겨나고, 체험의 가치가 부풀려지며, 강박적으로 실체를 되살리려 애쓴다. 얼마 전 복원된 광화문을 생각해보자. 한글 현판과 콘크리트 구조의 광화문은 최소한 가짜의 구조물이라는 정직성은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돌아가려 해보았자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겸허함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송판에 금이 가서 말썽이 되고 있는, 門化光(문화광)이라고 한자로 쓰인 현판은 원래의 오리지널도 아니고, 당대의 역사를 반영한 것도 아니며, 그냥 글자 그대로 가짜의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현대는 시뮬라크르의 시대다. 그리고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예술은 더 이상 모방하지 않는다. 이제 특권적인, 최종적인, 꼭 있어야 하는 그런 것은 없다. 모든 게 불확실하며 단지 남은 것은 위계 없는 차이의 향연일 뿐이다. 진리를 알고 싶다면 무한히 펼쳐진 차이의 놀이들 속에서 흩어져 버렸던 진리를 다시 조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