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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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로이 전쟁을 실제 있었던 일일까? 슐리만의 발굴 이전에는 트로이 전쟁의 실재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발굴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내용이 트로이 전쟁의 전모를 사실대로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하지만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호메로스가 그린 대로 헬레나라 는 여자 한 명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입장들이 제기된다. 예컨대 리프F.X.Rief는 무역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즉 트로이는 지리적으로 교통의요지에 위치했으므로 사방에서 모여드는 무역상인 들에게 시장세와 통과세를 부과해 번영했고,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 인은 관세장벽을 제거하고 흑해와의 금속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조금 다른 입장으로 미틀러는 트로이가 교통의 요지였다는 이른바 지협이론으로 이 전쟁을 설명한다. 즉 헬레스폰토스 해협은 바다의 물살이 급해 미케네 시대의 항해술로는 선박을 항해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상인들은 이 해협을 건너지 않고 지협의 입구에 위치한 트로이시장에서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은 미케네 시대에 활발한 무역활동이 존재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와 다르게 당시의 활발한 상업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도 있다. 닐슨M.P.Nilsson에 따르면 트로이 원정은 무역 전쟁이 아니며 중세의 바이킹처럼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영웅들의 해적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트로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소진되어 해적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왕과 가신 간의 관계가 이완되고 이로 말미암아 왕권이 쇠퇴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 원정을 왕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습격으로 여기지는 않았으며, 금속원료 등 왕국의 필수물자를 획득하기 위한 조직적인 활동으로 생각했다. 버묄E.Vermeule은 호메로스가 전하는 대로 파리스가 헬레네와 재물을 약탈한 것이 전쟁을 유발했다고 본다. 원정은 연해민족이 왕권지배에서 자립하여 해상활동(약탈)을 시작한 것이며, 그것은 그 후 큰 규모의 해상 민족활동의 서곡이 된다고 주장했다. 요즘 각광을 받는 것은 페이지D.Page의 이론이다. 그는 트로이 제7시가 화재 때문에 파괴된 점, 미케네 시대의 점토판에 영웅의 이름이 적혀 있는 점, 함선표가 당시 각국의 세력을 반영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전쟁의 실재성을 논증한다. 그리고 이어서 소아시아 서부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던 히타이트 제국이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미케네와 대립하며 세력의 균형을 유지했으나 제국의 동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서부에서 정치적 공백이 생겼고, 이 틈을 타 미케네가 진출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트로이 전쟁의 실재를 논증하려는 입장과 달리 슐리만의 발굴 후에도 트로이 전쟁을 호메로스의 문학적 허구로 취급하거나 아니면 미케네 인 아닌 다른 민족의 침입이 와전되었다는 식으로 전쟁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여전히 많다. 2. 마라톤 전투의 수수께끼-삼류 도시국가였던 아테네가 강대국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거대한 페르시아에 맞서 싸웠다. 두 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의 활약에 힘입어 페르시아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전투는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이다. 마라톤의 신화를 낳은 마라톤전투 승리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그리하여 약 1만 명의 중장보병이 출동하여 마라톤 평야 서쪽 끝에 진을 쳤으며, 그 후 6일 간 양군은 대치한다. 아테네 군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대기했는지, 또한 마라톤에서 양군이 어떻게 포진했으며 싸움의 경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헤로도토스의 기술이 너무 간략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테네 군은 병력의 열세를 깨닫고 스파르타 군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 그러면 페르시아 군은 왜 멈칫했을까? 페르시아 군이 마라톤에 상륙한 전략적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페르시아의 주력 부대인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평야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기술에는 기병대의 말이 상륙했다는 표현은 있지만 기병대의 동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테네 군의 중장보병의 밀집대는 적의 보병이나 궁수에 대해서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이 측면이나 배후에서 공격해 오면 대열이 쉽게 무너져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병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10세기의 수우다 사전에는 기병대가 마라톤에서 철수하자 그때까지 페르시아 군에 속해 있던 이오니아 병 사가 나무에 올라가 아테네 군을 향해 기병대가 떠났다는 신호를 보냈고, 다음에야 비로소 밀티아데스는 공격을 해서 승리했다는 기술이 있다. 페르시아의 기병대가 있는 한 밀티아데스는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기에 스파르타 군을 기다리며 6일이나 대기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기병대는 왜 싸우지도 않고 철수했을까? 페르시아 군이 상륙한 해변 바로 전면에 큰 늪지대가 있어 예상과는 달리 기병대가 활동하기 불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테네 시내가 무방비 상태인 것을 알고 기병대를 급속히 팔레론 만에 상륙시켜 아테네 시내로 진격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마도 후자였을 가능성이 컸겠지만, 두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페르시아 군도 첩자를 통해 그리스 군의 동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서 스파르타 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테네로 진격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페르시아 군으로서도 기병대 철수로 병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에 작전이 변경되고 지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밀티아데스는 더 이상 스파르타 군을 기다리지 않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공격했을 것이다 3. 소크라테스가 죽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 최고의 지성인 소크라테스는 독신죄로 고발되어 처형당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마추어리즘의 대중 민주주의와 정치보복 그리고 소크라테스 자신의 오기가 빚은 아테네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기록으로는 그의 제자들이 쓴 스승에 대한‘변명’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고발도 매우 훌륭하고 설득력이 있어 소크라테스 자신도 자기가 유죄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하나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화되고 성화聖化된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 재판의 진상은 알 길이 없다. 민주파들은 민주정의 약점을 규탄하고 민주파에게 악담을 서슴지 않던 오만불손한 소크라테스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로 말미암은 소란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그를 고소했을 것이다. 민주파 내에서도 과격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아무튼 고소 후 사태는 예상치 않게 악화되어 버린다. 1차 투표에서 유죄가 결정된 후 어느 정도의 형량을 받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국가유공자로서 종신연금을 요구했다. 예상치 못한 이 말에 가벼운 형량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던 온건파들마저 반감을 품게 되었고, 원고의 요구대로 사형을 확정짓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원치 않은 민주파들은 그가 보이오티아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제의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제의를 거절한다. 제자들이 눈물로 탄원을 해도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왜 죽음을 고집했을까? 그의 죽음은 결국 그의 오기와 대중민주주의 경망함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회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가 굳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죽음에 관해 여러 가지 말을 남겼다. 가장 감동을 주는 것은 마지막에 남긴 말이다.“ 이제 갈 때가 되었다. 여러분은 삶을 향하여. 나는 죽음을 향하여. 우리들 가운데 누가 보다 좋은 운명을 향하여 가는가는 신만이 알 것이다.”하지만 이런 말을 통해서도 죽음을 고집한 그의 진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