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위의 작가, 염상섭 저수하의 시간, 염상섭을 읽다 4
1984년부터 2004년 가을까지 일본 천 엔권 지폐에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중국 칭다오에는 루쉰魯迅의 이름을 딴 공원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각자의 나라에서 국민 작가로 추앙받는 사람들로 각종 여론조사나 판매량, 인기투표에서 맨 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국민작가들을 두고 각 나라에서는 자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말한다. 반면 중국.일본과 늘 동아시아 3국으로 묶이는 우리나라는 ‘국민작가’라는 단어를 두고 대부분의 사람이 떠올리는 단 한 명의 작가가 없다(여기에는 역사적 특수성이나 사상의 문제 등이 얽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작가를 꼽자면 누가 있을까?
<삼대>와 같은 장편소설로 대중성을 획득하고 <만세전>이나 <표본실의 청개구리> 같은 중단편소설의 한국 근대문학의 한 획을 그은 염상섭이 그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염상섭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부르주아문학자, 보수주의자로 평가받았지만 동시에 해방 후 자의로 ‘문학가동맹’에 가입하고 ‘보도연맹원’이라는 딱지로 위태로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인 그는 대부분의 작가가 극단에 서서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던 시대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한 ‘경계 위의 작가’였다.
‘경계 위’에 서 있다는 점은 염상섭이 지금까지 양쪽 모두에서 이렇다 할 인정을 받지 못하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지만 지금껏 제대로 ‘읽히지’ 못한 염상섭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일부 연구자들은 작년 여름 <염상섭 문장 전집> 1.2(소명출판, 2013)을 출간하여 ‘염상섭 재조명’의 물꼬를 텄고 1년이 지난 지금 <염상섭 문장 전집> 3(소명출판, 2014)과 더불어 염상섭에 관한 다채로운 문제의식들을 아우른 (소명출판, 2014)를 펼쳐내 그 결실을 맺었다.
염상섭의 질문들
염상섭을 읽는 이들은 한 번쯤 염상섭이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했던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는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으로 염상섭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어 보인다. 먼저 염상섭이 1927년 <사랑과 죄>라는 ‘노블형 조선어 소설’을 통해 문학적으로 구현한 식민지 아나키즘 또는 반식민사상의 풍요로운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조선의 프로문학, 프로문화 주창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기획을 추진했던 염상섭의 독자성이 트로츠키와 필리냐크를 적극 참조함으로써 성립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여 염상섭 문학에 내재한 사회주의적 자질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심퍼사이저’의 형상을 거의 전격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했다. 염상섭이 우정과 의리, 중용과 포용력, 예술과 전통에 대한 옹호와 같은 ‘동반자’의 심미적 자질을 원주민 간의 유대를 지속시키는 반식민 저항의 자원으로 적극 활용했으며 이것이 이념과 돈이라는 경직된 대립으로 분열을 획책하는 식민지권력의 책략, 심미적인 것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배제하여 저항의 자원을 빈약하게 만든 프로문학의 과오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의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염상섭 문장을 정밀히 분석하여 그의 사상적?문학적 지향을 밝혀본다. 염상섭의 1차 유학시절(1913~1920)을 전후한 시기의 정치적?사회적 관심사와 독서경험, 인적 교류의 양상 등을 꼼꼼하게 점검하거나 그의 초기 문장을 교우관계, 활동, 논전 등으로 맥락화하여 전반적으로 관철되는 문제의식을 분석하기도 하고 비평/이론 실천과 작품 실천을 교차하여 분석하는 도정을 통해 염상섭이 식민지적 억압에 대한 냉철한 천착을 자기 문학의 과제로 삼았지만, 그 엄정함의 결과가 결국 피식민자의 비루함을 그려내는 것에 그쳐버린 것은 아닌지를 묻기도 한다. 또한 ‘산혼공통散混共通’이라는 독특한 네 가지 개념틀을 창조하여 염상섭 문학의 다성성과 복잡성을 해명해 다양한 매체와 글쓰기 형식을 넘나들며 그 모두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한 염상섭의 호연한 태도야말로 끈질긴 작가적 생명력의 원천이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지나간 소설에 던지는 새로운 질문과 관점
염상섭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만들어진 책답게 식민지와 제국의 혼돈으로 점철된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맥락 속에서 염상섭 문학의 새로운 독해 가능성을 열어준 글들이 돋보인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추락>을 한국형 정치적 암살소설이라는 독특한 측면에서 다루었고 조선 남성과 일본 여성 사이의 혼혈인 ‘문자’(<모란꽃 필 때>)를 중심으로 조선에 유포된 일본식 여성 이름의 문학적 계보학을 그려낸다. 이 계보는 그 자체로 식민지지배의 심화과정이기도 했는데, 일본인 여성을 어미로 하는 유례없던 혼혈 여성의 등장은 가부장제의 메타포를 이용한 강력한 반식민 재현전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둘째 아들의 서사’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성과 모순적 관계를 맺는 문학의 실존을 가족서사로 은유한 글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글은 염상섭을 비롯해 동아시아 각국의 대표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루쉰魯迅의 문학의 역사성을 살펴봄으로써 근대 동아시아에서 자유(반항)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존재론적 불안을 감당해야 했던 인물들의 운명을 해명하고자 했다. 염상섭의 대표작 중 하나의 ?만세전?을 식민지배의 본원적 축적으로 인해 ‘노동력화’되고 ‘난민화’되는 조선인의 존재 전이를 드러낸 텍스트로 규정한 글도 흥미롭다. 이 글은 ?만세전?이 인간에 대한 자본주의의 장악을 높은 수준에서 파악했으며 근대 세계체제에 접수된 ‘조선’의 현재를 가장 냉혹한 자기해부의 방식으로 묘파했다고 봤으며 ‘무덤’을 벗어날 틈이 쉽게 제시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 땅에서 배제된 자들의 어두운 미래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 글은 이러한 주제의식을 ‘파르티잔’이라는 개념을 통해 식민지 이후에도 계속되고 반복되는 ‘식민지’의 단절과 종식에 대한 사유의 심화를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는 염상섭 문학의 이채로운 인물과 사건을 통해 소설에 담긴 시대성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못된 여자’들이다. ‘협의俠義’와 ‘협잡挾雜’을 동시에 수행하며 서사의 편폭을 확장하는 ‘모던 걸’의 존재는, 일본에서 유입된 담론과 식민지 조선의 사정을 결합시켜 활용한 능란한 서사전략의 결과였고 이러한 여성상이 염상섭 특유의 서사를 구축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모던 걸을 비롯한 신여성 형상은 염상섭 문학에 이른바 ‘모델소설’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는 염상섭 문학에 제시되는 신여성상의 흐름을 파악해보았다. 독백의 희생제의 속에 사라지는 ?제야?의 신여성을 지나, 중첩된 스캔들을 말하는 <너희들은 무엇을 얻었느냐>의 신여성에 이르는 흐름을 분석함으로써 여성은 단지 한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핵을 응집한 세태로 의미화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식민지 자본주의 시대를 충실히 재현해낸 염상섭 문학에서 ‘자본’에 대한 논의도 빠질 수 없다. <무화과>에 나타난 이원영이라는 인물은 화폐 축장자에서 벗어나 상업자본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의 실패와 좌절을 보여준다. 염상섭은 이 인물을 통해 식민지 자본의 ‘불임성’을 드러내 식민지의 본질과 그 총체성을 전면적으로 해부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해방과 전쟁을 겪은 염상섭의 소설세계도 재조명했다. 인공 치하라는 극단적 현실에서 생활력과 활기, 포용력을 발휘하는 <취우>의 강순제가 실은 자본주의체제가 작동을 멈춘, 따라서 여성의 육체가 더 이상 자본주의 현실의 은유이길 멈춘 순간에 탄생한 존재라는 분석과 <젊은 세대>와 <대를 물려서>를 통해 해방과 전쟁의 서사에 산포된 혼종과 이동, 이념의 기억이 전쟁이 끝난 후 정주자 도시민의 일상과 여가로 대체되는 과정을 포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