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

양재숙 · 歴史/戦争
352p
購入可能なサービス
content
評価する
3.2
平均評価
(3人)
レビュー
もっと見る

420년 전 벌어진 임진왜란을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다시 되짚었다. '난(亂)'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왜구가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측면에서 살펴본 기존의 임진왜란에 대한 개념을 일본, 한국, 중국(명)의 국제전쟁의 관점에서 살폈다. 시대상황뿐 아니라 7년간의 전쟁 과정을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 자세히 설명한다. 전쟁 발발 전 각국의 정세상황, 일본의 침략 과정, 조선의 대응방법과 당시 수군의 수준, 전쟁 승리의 전략, 명의 파병 이유 등 그간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부분들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개전전야에서부터 1차 전쟁 임진왜란, 2차 전쟁 정유재란 등 각 장별로 당시 상황을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역사에 대한 재미를 더한다.

'그부호' 잇는 독보적 감성

비주얼 마스터 웨스 앤더슨 신작

<페니키안 스킴> · AD

'그부호' 잇는 독보적 감성

비주얼 마스터 웨스 앤더슨 신작

<페니키안 스킴> · AD

著者/訳者

目次

제1장 개전전야 1. 200년 평화에 국방을 잊어 21 북방을 개척하고 남방을 정벌하다 / 탄탄했던 조선 초기 국방체제 / 조선군은 첨단 중화기로 무장했다 / 조총 무장 일본군 단병접전 강해 / 조선 수군 함대 전력은 막강했다 / 병영에 군사는 없고 무기는 녹슬고 2. 망국의 길목에 들어선 대명제국 47 명 관료들의 부패와 권력 다툼 3. 대륙을 향한 군국 일본의 꿈 50 불세출의 전쟁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 / 조선 침공 전 대규모 기동훈련을 하다 4.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56 전쟁 앞두고 역모사건에 정신 팔려 / 당파 따라 ‘침공’, ‘불침’ 엇갈린 보고 / 조선 조정 끝내 ‘불침’ 결론 내려 / ‘일본이 쳐들어간다’ 명나라 먼저 알아 / 불멸의 조선국 전쟁영웅 이순신 역사무대로 / 육지로 북진 바다로 증원… 수륙병진전략 제2장 1차 전쟁: 임진왜란 1. 침공군 16만 나고야에서 발진 73 조선은 일본의 최후통첩도 무시했다 2. 조선왕조 사상 가장 길었던 날 78 조?일 7년 전쟁 막이 오르다 / 경상도 수군 자멸 육군 결사항전 / ‘싸워 죽기는 쉬어도’ / ‘왜군 쳐들어왔다’ 봉화 대신 파발마가 / 천험의 소백산맥 관문 지키지 않아 / 일본군 3로로 나눠 쾌속의 북진 / 일본군 요격 조선군 상주 충주에서 궤멸 / 이일 오합지졸 방어군 풍비박산 / 신입 기병대 조총부대에 전멸되다 3. 침공 20일 만에 떨어진 수도 서울 97 조선 조정 서울 포기 평양으로 파천 / 경복궁?창덕궁 백성들이 불 질러 / 정도 200년 서울에 일본군 무혈입성 / 일본 8개 군단 조선 8도 점령지에서 군정통치 / 경기 황해 평안도 지방군 임진강에서 참패 / 전라 충청 경상 5만 대군 광교산에서 대패 / 평양도 포기한 조정 / 광해군 분조 발족 선조 명에 망명 청원 / 일본군 함경?강원도애서 폭풍 같은 기동전 / 함경도 반민 두 왕자 잡아 일본군에 넘겨 4. 평양에서 정지된 일본군 진격 121 북진 일본군 고립무원에 빠져 5. 전라도 방어전 승리 군수 병력 수군기지로 124 경상도 의병 일본군 전라도 진격 막아 / 웅치?이치에 전주성 방어선 구축 / 고경명 의병군 일본군 사령부 배후에서 기습 / 조선왕조실록 보존되다 6. 무적함대 135 파직 세 차례 백의종군 두 차례 / 이순신에 영웅의 조건 있었다 / 다도해와 바다의 용병 / 최강의 포함_ 판옥선과 거북선 / 무적함대 남해 제해권을 장악하다 / 1차 출동 세 차례 해전 적선 42척 격파 / 2차 출동 네 차례 해전 적선 72척 격멸 / 해전과 육전에서 대승한 조선군 최고의 날 / 3차 출동 적선 79척 섬멸한 한산도대첩 / 적전에서 기상천외의 대규모 함대시위 7. 의병전투 172 일본군 10만 명 후방경비로 묶다 / 수만 의병이 적을 교란하다 / 홍의장군 곽재우 사상 최초의 유격전 / 김면?정인홍 전라도 진공 일본군 덮쳐 / ‘나라 있는 줄은 알았는데 이 한 몸 있는 줄은 몰랐네’ / 권응수 의병군 좌도 요충 영천성 탈환 / 조헌?영규 청주 탈환 일본군 보급선 차단 / 조헌 1천 의병군 금산에서 결사전 전원 옥쇄 / 호국불교 전통 이어 의승군 봉기 / 황해도 이정암 의병군 연안성 사수 / 정문부 의병군 반민토벌 함경도 수복 8. 반격작전 206 명군 선봉 평양성 첫 전투에서 패퇴 / 조선 수군 부산 강습 적선 130척 공파 / 박진 육군 진천뢰로 공격 경주성 탈환 / 김시민, 2만 일본군 격퇴_ 진주성 대첩 / 동장군과 함께 온 명나라 원군 5만 명 / 명 조정 국익 위해 조선 출병 / 조선 전역 관군 의병 총 17만 명 / 조·명 연합군 평양성 탈환 서울로 진격 / 일본군 역습 벽제관에서 연합군 대패 / 권율, 총통기로 일본군 대파_ 행주산성 대첩 / 북진 일본군 전면 퇴각 서울로 집결 / 일본군 전사 동사 7만, 아사 위기 5만 / 일본군 부산으로 전면 철군 서울 수복 / 철수 일본군 10만 진주성에 피의 복수전 / 성안의 사자 6만 수비군 장렬한 최후 제3장 전쟁과 평화 1. 명과 일본 지루한 강화회담 255 조선 4도씩 나눠 갖자 / 명군 주력 본국 귀환, 일본군 축차 귀휴 / 3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한산도에 통제영 2. 이순신 함대증강, 전함 150척 263 조선 수군 7차 출동 적선 31척 불태워 / 가짜 항복문서에 진짜 책봉사절 제4장 2차 전쟁: 정유재란 1. 일본군 12만 재침공 명군 재출동 275 ‘나를 국왕으로?’… 히데요시 대노 / 이순신 긴급체포 혹독한 고문 백의종군 2. 원균 휘하 조선 수군 칠천량에서 전멸 282 배설, 운명의 전함 12척 거느리고 탈출 3. 일본군 전군 동원 전라도로 진격 287 남원성 결사항전 일본군 예봉 꺾어 / 잔악한 코 베기로 교토에 코 무덤 남겨 / 전주성 무혈점령 일본군 서울 향해 북진 / 북진 일본군 소사평에서 명군과 조우전 4. 13척이 200척을 격퇴_ 명량대해전 299 조선의 국가수호신이 그를 지키다 / ‘하나가 천을 이기는 천험’ 울돌목 / ‘필사즉생’, ‘필생즉사’ 장엄한 결전 / 적선 31척, 격파 손상 100척 / 보화도 기지에서 함대 증강 수군 재건 5. 일본군 총퇴각, 연합군 총반격 314 울산성 피의 공방전 쌍방 인명피해 3만 / 조선 수군 10차 출동, 명 수군 관전 /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운의 한 생애 마감하다 6. 조?명 연합군 최후의 공격으로 일본군 패주 321 연합군 전군 동원 총공격 7. ‘이순신은 자살 했는가’ 의문의 전사 324 최후 해전에서 최후 승리 거두고 최후 마쳐 / ‘원수들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 ‘갑옷 벗고 적 앞에’ 직격탄 가슴 뚫어 연표 334 찾아보기 343 참고문헌 350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왜 한국인은 임진전쟁의 승리를 노래하지 않는 것인가! 420년 전 벌어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다시 되짚었다. ‘난(亂)’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왜구가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측면에서 살펴본 기존의 임진왜란에 대한 개념을 일본, 한국, 중국(명)의 국제전쟁의 관점에서 살폈다. 시대상황뿐 아니라 7년간의 전쟁 과정을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 자세히 설명한다. 전쟁 발발 전 각국의 정세상황, 일본의 침략 과정, 조선의 대응방법과 당시 수군의 수준, 전쟁 승리의 전략, 명의 파병 이유 등 그간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부분들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개전전야에서부터 1차 전쟁 임진왜란, 2차 전쟁 정유재란 등 각 장별로 당시 상황을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역사에 대한 재미를 더한다. ■ 출판사 서평 조선의 최후 승리로 끝난 일본과의 7년 전쟁 다시 쓰는 임진전쟁의 역사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으로 다시 불거진 한일관계,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까지 끊임없는 국제정세의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한일’ 관계가 입에 올려지기만 해도 반감이 생기는 이유는 오랜 침략과 전쟁의 역사에서부터 기인한다. 그 중 하나의 전쟁이 벌어진 1592년 임진년.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명나라) 삼국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7년간 1,2차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 이후 3국은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 외에 공통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세는 정권이 바뀔 만큼 급변한다. 이 전쟁은 4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을 만큼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전쟁의 당사자였던 한국, 일본, 중국(명)은 각각 이 전쟁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르는데, ‘난(亂)’을 붙인 이유는 임진년과 정유년에 왜적들이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반면에 일본은 ‘분로쿠노 야꾸(文祿の役)’, ‘게이죠노 야꾸(慶長の役)’라고 부른다. ‘분로쿠’는 1592년~1595년 천황의 호이며 ‘게이죠’는 1596~1614년 천황의 호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야꾸(役)’인데, ‘정벌하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 여기서 ‘원(援)’은 ‘원조하다, 돕다’는 뜻이다. 이 전쟁을 뜻하는 각각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삼국이 이 전쟁을 해석하는 방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삼국뿐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조차 이 전쟁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난리’로 볼 것인가, ‘전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도 역사 수업 논쟁의 주제거리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더불어 임진왜란에 대한 그간의 역사기술이나 이를 소재로 한 소설들에서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인 의문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일본은 과연 국가도 아니었고 일본 병사들은 그 때까지 조선의 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들과 같은 불법 무장집단에 불과했는가? 전쟁을 지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들의 두목이었는가? 이 전쟁에서 조선 조정과 관군은 과연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도망만 다녔고 오직 의병들만이 분전했는가? 조선군은 칼과 활 그리고 낫과 죽창 등 원시무기로 무장했고 일본군은 조총(鳥銃) 등 전천후의 신무기로 무장했는가? 조선 수군의 신화는 과연 이순신의 영웅성과 거북선의 초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일까? 명나라는 과연 평소 저들을 잘 섬겨온 조선이 위기에 처한 게 안타까워 조선을 구해주러 저들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며 파병했는가? 명나라 군사가 승리를 이끌어주었는가? 그리고 조선은 패전했는가? 조선의 최후 승리는 조선 정부(조정)와 정부군(관군)의 줄기찬 전쟁 수행과 세계 전쟁사상 최초의 조직적인 조선 의병군의 유격전 활동 그리고 자신들의 국토에까지 전화가 번질 것을 우려해 예방 출전한 중국 명나라 군사와의 연합작전으로 거두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조선 백성들에서는 물론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거의 인식되어 있지 못하다. 그냥 참담한 민족수난의 역사로만 기억되거나 조선이 처참하게 패전한 것으로 잠재의식화 되어있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 필자가 전쟁에 대한 우리의 역사기술을 바로 잡아보겠다고 나섰다. 필자는 무엇보다 이 전쟁에 대한 오해가 많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을 전했다. “불행하게도 근대 사학으로서의 조선사는 일본인들 손에 의해 편찬됐다. 192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발족시켜 회장에 일본인 정무총감(초대 下岡忠治)을, 고문에 친일 조선인(이완용, 박영효) 등을, 위원에 일본인 사학자(今西龍) 등을 임명했다. 특히 해방 후 우리 국사학계 원로로 한국사학에 일제 식민사관을 부동의 정통사관으로 전승시킨 이병도(李丙燾) 등을 수사관보로 참여시켰다. 편수회는 16년간의 방대한 작업 끝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전범이나 다름없는 <조선사>를 편찬했다. 약자논리와 패배주의로 일관된 <임진왜란사>는 이들의 <조선사>왜곡의 산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재조명 양재숙 저자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그간 왜곡돼 있던 임진왜란의 역사를 꼼꼼히 되짚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일곱 번째 임진년. 임진왜란의 역사가 재탄생했다. △임진왜란은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조선과 일본은 서로 외교적으로 승인한 국가의 정통성 있는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제 일본국 총리(關白)였으며 탁월한 군사전략가로 그가 지휘한 침공군은 일본국 정부군이었다. 이 전쟁은 조선과 명나라의 정부군과 일본 정부군이 충돌한 국제 전쟁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을 압도한 문명 선진국 조선은 일본에 비해 월등한 문명 선진국이었다. 국가 통치체제와 행정조직 그리고 군사제도는 물론 과학기술문명, 특히 국방과학과 무기체계 등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조선군은 오늘날의 기본화기인 대포[총통(銃筒)], 박격포[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기관총[총통기(銃筒機), 화차(火車)], 로켓포[신기전(神機箭)], 다연장로켓포[신기전기(神機箭機)], 수류탄[질려탄(?藜彈)], 지뢰[지화(地火)]에 이르기까지 초보 단계 화약무기로 무장했다. 조선군이 칼과 창 등 원시무기만으로 무장한 게 아니었다. 특히 조선 수군의 전함과 화력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며 이순신의 상승신화도 바로 이를 바탕으로 가능했다. △조선 관군 주도로 우세 이 전쟁 전 기간 중 기록으로 채집되는 단위 전투 105회 가운데 관군 단독 또는 의병 참전 아래의 관군 주도 전투가 87회, 의병 단독 또는 관군 참전 아래의 의병 주도 전투가 18회로 분류된다. 개전 초기에 의병군이 일본군 후방 교란 등 전세 반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의병전투는 7년 전쟁 기간 중 초기 1년에 그쳤고 전쟁은 관군이 주도했다. 총 105회 전투 중 조선군 측 공격이 68회로 조선군이 공세적이었고 조선군 승리 65회, 패배 45회로 전쟁 전 기간 중 개전 초기 후퇴과정 외에는 조선군이 우세했다. 명나라 군사는 조선군과의 연합 작전 8회에 그쳤다. 참전 초기 평양성 탈환작전 및 2차 전쟁 때의 최후 공격전 외에는 대부분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조선의 조정과 관군이 도망만 다닌 게 아니었다. 전쟁 지도는 조선의 조정이, 대부분 전투는 조선의 관군이 의병군과 명나라 군사의 협력으로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명나라는 국익을 위해 파병 결정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명나라 조정은 갈림길에 섰다. 일본군은 ‘명나라를 정복하러 가겠
  • 出典
  • サービス利用規約
  • プライバシーポリシー
  • 会社案内
  • © 2025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