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왜 한국인은 임진전쟁의 승리를 노래하지 않는 것인가! 420년 전 벌어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다시 되짚었다. ‘난(亂)’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왜구가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측면에서 살펴본 기존의 임진왜란에 대한 개념을 일본, 한국, 중국(명)의 국제전쟁의 관점에서 살폈다. 시대상황뿐 아니라 7년간의 전쟁 과정을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 자세히 설명한다. 전쟁 발발 전 각국의 정세상황, 일본의 침략 과정, 조선의 대응방법과 당시 수군의 수준, 전쟁 승리의 전략, 명의 파병 이유 등 그간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부분들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개전전야에서부터 1차 전쟁 임진왜란, 2차 전쟁 정유재란 등 각 장별로 당시 상황을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역사에 대한 재미를 더한다. ■ 출판사 서평 조선의 최후 승리로 끝난 일본과의 7년 전쟁 다시 쓰는 임진전쟁의 역사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으로 다시 불거진 한일관계,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까지 끊임없는 국제정세의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한일’ 관계가 입에 올려지기만 해도 반감이 생기는 이유는 오랜 침략과 전쟁의 역사에서부터 기인한다. 그 중 하나의 전쟁이 벌어진 1592년 임진년.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명나라) 삼국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7년간 1,2차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 이후 3국은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 외에 공통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세는 정권이 바뀔 만큼 급변한다. 이 전쟁은 4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을 만큼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전쟁의 당사자였던 한국, 일본, 중국(명)은 각각 이 전쟁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르는데, ‘난(亂)’을 붙인 이유는 임진년과 정유년에 왜적들이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반면에 일본은 ‘분로쿠노 야꾸(文祿の役)’, ‘게이죠노 야꾸(慶長の役)’라고 부른다. ‘분로쿠’는 1592년~1595년 천황의 호이며 ‘게이죠’는 1596~1614년 천황의 호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야꾸(役)’인데, ‘정벌하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 여기서 ‘원(援)’은 ‘원조하다, 돕다’는 뜻이다. 이 전쟁을 뜻하는 각각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삼국이 이 전쟁을 해석하는 방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삼국뿐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조차 이 전쟁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난리’로 볼 것인가, ‘전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도 역사 수업 논쟁의 주제거리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더불어 임진왜란에 대한 그간의 역사기술이나 이를 소재로 한 소설들에서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인 의문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일본은 과연 국가도 아니었고 일본 병사들은 그 때까지 조선의 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들과 같은 불법 무장집단에 불과했는가? 전쟁을 지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들의 두목이었는가? 이 전쟁에서 조선 조정과 관군은 과연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도망만 다녔고 오직 의병들만이 분전했는가? 조선군은 칼과 활 그리고 낫과 죽창 등 원시무기로 무장했고 일본군은 조총(鳥銃) 등 전천후의 신무기로 무장했는가? 조선 수군의 신화는 과연 이순신의 영웅성과 거북선의 초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일까? 명나라는 과연 평소 저들을 잘 섬겨온 조선이 위기에 처한 게 안타까워 조선을 구해주러 저들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며 파병했는가? 명나라 군사가 승리를 이끌어주었는가? 그리고 조선은 패전했는가? 조선의 최후 승리는 조선 정부(조정)와 정부군(관군)의 줄기찬 전쟁 수행과 세계 전쟁사상 최초의 조직적인 조선 의병군의 유격전 활동 그리고 자신들의 국토에까지 전화가 번질 것을 우려해 예방 출전한 중국 명나라 군사와의 연합작전으로 거두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조선 백성들에서는 물론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거의 인식되어 있지 못하다. 그냥 참담한 민족수난의 역사로만 기억되거나 조선이 처참하게 패전한 것으로 잠재의식화 되어있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 필자가 전쟁에 대한 우리의 역사기술을 바로 잡아보겠다고 나섰다. 필자는 무엇보다 이 전쟁에 대한 오해가 많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을 전했다. “불행하게도 근대 사학으로서의 조선사는 일본인들 손에 의해 편찬됐다. 192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발족시켜 회장에 일본인 정무총감(초대 下岡忠治)을, 고문에 친일 조선인(이완용, 박영효) 등을, 위원에 일본인 사학자(今西龍) 등을 임명했다. 특히 해방 후 우리 국사학계 원로로 한국사학에 일제 식민사관을 부동의 정통사관으로 전승시킨 이병도(李丙燾) 등을 수사관보로 참여시켰다. 편수회는 16년간의 방대한 작업 끝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전범이나 다름없는 <조선사>를 편찬했다. 약자논리와 패배주의로 일관된 <임진왜란사>는 이들의 <조선사>왜곡의 산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재조명 양재숙 저자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그간 왜곡돼 있던 임진왜란의 역사를 꼼꼼히 되짚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일곱 번째 임진년. 임진왜란의 역사가 재탄생했다. △임진왜란은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조선과 일본은 서로 외교적으로 승인한 국가의 정통성 있는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제 일본국 총리(關白)였으며 탁월한 군사전략가로 그가 지휘한 침공군은 일본국 정부군이었다. 이 전쟁은 조선과 명나라의 정부군과 일본 정부군이 충돌한 국제 전쟁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을 압도한 문명 선진국 조선은 일본에 비해 월등한 문명 선진국이었다. 국가 통치체제와 행정조직 그리고 군사제도는 물론 과학기술문명, 특히 국방과학과 무기체계 등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조선군은 오늘날의 기본화기인 대포[총통(銃筒)], 박격포[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기관총[총통기(銃筒機), 화차(火車)], 로켓포[신기전(神機箭)], 다연장로켓포[신기전기(神機箭機)], 수류탄[질려탄(?藜彈)], 지뢰[지화(地火)]에 이르기까지 초보 단계 화약무기로 무장했다. 조선군이 칼과 창 등 원시무기만으로 무장한 게 아니었다. 특히 조선 수군의 전함과 화력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며 이순신의 상승신화도 바로 이를 바탕으로 가능했다. △조선 관군 주도로 우세 이 전쟁 전 기간 중 기록으로 채집되는 단위 전투 105회 가운데 관군 단독 또는 의병 참전 아래의 관군 주도 전투가 87회, 의병 단독 또는 관군 참전 아래의 의병 주도 전투가 18회로 분류된다. 개전 초기에 의병군이 일본군 후방 교란 등 전세 반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의병전투는 7년 전쟁 기간 중 초기 1년에 그쳤고 전쟁은 관군이 주도했다. 총 105회 전투 중 조선군 측 공격이 68회로 조선군이 공세적이었고 조선군 승리 65회, 패배 45회로 전쟁 전 기간 중 개전 초기 후퇴과정 외에는 조선군이 우세했다. 명나라 군사는 조선군과의 연합 작전 8회에 그쳤다. 참전 초기 평양성 탈환작전 및 2차 전쟁 때의 최후 공격전 외에는 대부분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조선의 조정과 관군이 도망만 다닌 게 아니었다. 전쟁 지도는 조선의 조정이, 대부분 전투는 조선의 관군이 의병군과 명나라 군사의 협력으로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명나라는 국익을 위해 파병 결정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명나라 조정은 갈림길에 섰다. 일본군은 ‘명나라를 정복하러 가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