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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트리 스피박 · 人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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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전 세계 인문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 중 하나로, 그의 작업은 한국에도 다수가 소개되어 ‘서발턴’과 ‘포스트식민 페미니즘’ 같은 개념을 확고히 새겨 넣었다. 그렇지만 이들 개념이 너무나 강한 그림자를 드리운 탓에 그가 언제나 읽기의 책임을 요청하는 문학 비평가이자 교사로 쓰고 활동해 왔다는 사실은 제대로 환기되지 못했다. 『읽기』는 스피박이 2012년 5월에 인도의 푸네 대학에서 진행한 나흘간의 강연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스피박은 읽기란 사회 정의를 향한 의지를 육성하는 행동이라는 자신의 오랜 지론을 다시 한번 역설한다. 그리고 그 정신에 입각해 프란츠 파농과 J. M. 쿳시, 엘리자베스 개스켈 등의 작품을, 그리고 자신의 과거 텍스트들을 읽는다. 『읽기』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읽는지, 그 자신은 어떻게 읽는지를 일흔에 접어든 스피박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책이다. 스피박의 문체는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강의 형식을 취한 이 책은 스피박에 대한 이해를 가다듬을 기회를 마련해 준다. 또 문학적 훈련을 통해 상상력을 사용하라고 권하는 이 대가의 어조는 읽기가 사소해지고 있는 오늘날 특별히 감동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요컨대 『읽기』는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읽기들을 돌아보고 우리의 읽기를 위해 그의 읽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최상의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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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감사의 말 편집자 노트 서문 _라라 초크세이 서론 헤겔을 읽는 파농 스피박 다시 읽기 텍스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J. M. 쿳시의 『서머타임』과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 교직과 자서전 마무리 참고 문헌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스피박은 어떻게 읽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읽어야 하는가 “문학적 읽기를 위한 상상력 훈련이 유연한 에피스테몰로지를 생산한다는 점, 바로 이 에피스테몰로지가, 아마도, 우리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가야트리 차르크라보르티 스피박, 나흘간의 교육 무대에서 상상력 훈련으로서의 읽기를 가르치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1976년 서른네 살의 나이에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영어로 번역하고 장문의 해제를 덧붙여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뒤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1985),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1988), 「잘못을 바로잡기」(2004) 등의 작업으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탈구축하는 포스트식민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 세계 인문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 중 하나인 그의 작업은 한국에도 다수가 소개되어 ‘서발턴’과 ‘포스트식민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확고히 새겨 넣었지만, 이들 개념이 너무나 강한 그림자를 드리운 탓에 그가 언제나 읽기의 책임을 요청하는 문학 비평가이자 교사로 쓰고 활동해 왔다는 사실은 제대로 환기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이미지들을 걷어 내고 읽어 보면 그의 작업 중심에는 읽기와 듣기의 문제가, 서발턴의 교육이라는 문제가 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나아가 스피박 자신이 “과거의 과부 화장에서 현재의 일이자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한 아동 정신 변화로”(210) 관심이 옮겨 왔다고 말하듯 읽기(와) 교육은 점점 더 그를 사로잡아 왔다. 그렇다면 스피박은 어떻게 읽으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읽기』의 질문이자 이 책에서 스피박이 실연實演하고자 하는 쟁점이다. 『읽기』는 스피박이 2012년 5월에 인도의 푸네 대학에서 진행한 나흘간의 강연을 엮은 책이다. 역사학 연구자로서 현대 철학의 전회들을 통해 역사학을 다르게 실천할 가능성을 궁리해 온 안준범이 번역한 이 책에서 스피박은 오랫동안 거듭 강조해 온 ‘읽기’의 중요성을 인도의 영문학도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번 역설한다. 그리고 그 정신에 입각해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J. M. 쿳시의 『서머타임』,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 읽기를, 그리고 자신의 과거 텍스트인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과 「잘못을 바로잡기」 다시 읽기를 실행한다. 사회 정의의 원천으로서의 읽기, 세부에 주목함으로써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바라보기 스피박은 인문학의 요체가 ‘욕망들의 비강제적 재배치’임을 우리에게 주지시켜 왔다. 우리의 욕망이 민족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성 차별적인 승리들보다는 계급, 인종, 젠더 평등을 향하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재배치를 위한 교육을 그는 ‘상상력 훈련’이라 부른다. 이 훈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학생과 독자가 텍스트의 세부에 주목해 텍스트 안에 흔적으로 남은 타자의 목소리를 살피게 만듦으로써. 그가 자크 데리다의 텍스트들에서 배운 ‘탈구축’deconstruction이란 해체하고 파괴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이 같은 면밀히 읽기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읽기의 근원적인 목표는 지식 습득이 아니라 정신의 습속 변화며, 비교 문학자인 스피박에게 이를 위한 최상의 무기는 여전히 문학 교육, 특히 영문학 연구 전통이다. 무언가가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음을 언제나 유념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정교하게 발전한 제도적 문학 연구를 폐기하기보다는 ‘긍정적 사보타주’를 통해 그것의 성과를 움켜쥐고 사용하라고 권한다. 이건 한가한 요청 아닌가? 세상이 불의로 가득 차 있으니 세심한 읽기보다는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직접적이고 긴급한 사안이 줄지어 있을 때 읽기에 전념하기란 거의 불가능함을 그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읽기 교육을 통한 상상력 훈련이 꾸준히 선행되지 않는다면 사회 정의를 향한 움직임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을지언정 유지될 수는 없다는 것이 스피박의 오랜 지론이다. “세부를 향한 이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혁명도 지속되거나 고양될 수 없지요”(22). 그의 말마따나 사회적 약자들 혹은 서발턴이 헤게모니의 회로에 진입했을 때 또 다른 억압자로 돌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상상력 훈련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요컨대 스피박은 장기적인 준비를 요청한다. 지식인의 재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지식인으로서 그는 이처럼 상상력을 훈련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것이 문학도와 문학 교사의 임무라고 제언한다. 서발턴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는 그는 실제로 인도 농촌 지역에 학교들을 설립해 비문해자 성인과 아동을 교육하는 프로젝트를 수십 년째 진행 중이기도 하다. 직접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문제 해결자들을 생산하려는’ 욕망을 품고서 미국과 인도, 즉 각각 글로벌 북부와 남부의 한 거점인 이곳들에서 비대칭적으로 교육 실천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인문학이 점점 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더라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 훈련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이러한 교육 실천이 더디고 당장은 효과도 미미해 보이겠지만 궁극에는 더 많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내내 제가 강조했던 것은, 문학적 읽기를 위한 상상력 훈련이 유연한 에피스테몰로지를 생산한다는 점, 바로 이 에피스테몰로지가, 아마도, 우리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점입니다”(44). 문학은 증거가 아니다 텍스트가 펼쳐 내는 욕망을 따라가는 읽기 이렇게 읽기와 교육의 가치를 역설한 다음 스피박은 본문에서 실제 읽기를 행한다. 「헤겔을 읽는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프란츠 파농이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삼는지’를 밝힌다. 헤겔 자신이 주인-노예 변증법을 개인적이거나 심리적인 사례로 읽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파농은 이 변증법을 사용해 마르티니크인들의 심리적 환경을 설명하고자 했다. 누군가는 이것이 오독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스피박이 보기에 “파농은 헤겔을 읽는 것이지, 단순히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52)며, 이것이야말로 파농이 헤겔을 “가장 관여적인 방식으로 읽었다는 증거”(57)다. 다음 장인 「스피박 다시 읽기」에서는 자신의 과거 텍스트인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과 「잘못을 바로잡기」를 검토하면서 이 글들이 나온 배경과 더불어 저자인 과거 자신의 ‘검토되지 않은 문화적 가정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해명한다. 그리하여 그는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이 “요컨대 그들은 틀렸고 우리가 옳으며, (비록 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노라 말할 만큼은 조심스러웠지만) 샬럿 브론테는 인종주의자라는 식”(99)으로 읽혀 온 것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 것에 유감을 표명하며, 「잘못을 바로잡기」와 관련해서는 “바깥의 부름이 있다는, 그러므로 인간 존재들은 타자의 부름을 통해 인간이 된다는 관념이, 이제 제게는, 너무 감상적인 걸로 보”(129)인다고 말하면서 “권리와 책임이 ‘도래하다’라는 영속적 양식으로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다고는 더 이상 믿지 않아요. 이제는 이것이 교육 철학을 통해 하나의 정신 집합으로서 에피스테몰로지적으로 창조되어야 한다고 믿지요”(130)라는 새로운 인식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텍스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서는 J. M. 쿳시의 기이한 자전적 소설 『서머타임』을 읽으면서 수사학 자원들을 두드러지게 활용하는 이 텍스트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묻는다. 특히 ‘간접 자유 화법’을 사용해 쿳시는 백인 남성 크레올이 말할 권리가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이런 수사학적 신호들을 따라가면서 스피박은 쿳시의 텍스트적 질문과 욕망에 주목하고, 허위로 가득한 이 자전적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진실함이 구축되는지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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