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기관과 학계, 언론을 오가며 국제 정세를 분석해온 세계적인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
그가 말하는 오늘날 세계와 지난날 역사
-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왜 멕시코와의 접경지대에 ‘장벽’을 세우려는 것일까?
- 멕시코는 왜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고 정치를 정상화할 수 없는 것일까?
- 우크라이나는 왜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분열하고 말았을까?
- 터키는 왜 이슬람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것일까?
- 중동의 국가들은 왜 IS를 쉽게 진압하지 못하는 것일까?
- 중국과 인도는 왜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일까?
- 미국은 왜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실패한 것일까?
-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은 왜 실패한 것일까?
- 다른 대륙과 달리 아프리카는 왜 경제성장과 무역의 발전이 느린 것일까?
- 한국은 분단국가로 남을까, 아니면 통일에 이르게 될까?
- 미국은 패권국으로 남을까, 아니면 쇠퇴할까?
- 미국이 쇠퇴한다면, 그 대신에 부상할 열강은 어떤 나라들일까?
모든 역사의 무대, 지리.
영원한 것은 지도상에 나타난 인간의 입지뿐이다. 야심찬 지도자는 죽어 없어지고, 찬란한 문명은 닳아 쇠락하기 마련이지만, 산맥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인구가 희박하던 시기부터 인류는 그들의 입지에 적응하며 공동체를 이루었고, 이런 의미에서 지리는 모든 문명과 역사의 주요 기원이기도 하다. 세계 각지의 인류는 지리와 강고하게 결합하여 고유한 정체성을 일구었고 이것이 오늘날 민족들인 것이다. 한편으로 지리는 수십 년 안에 업적을 이루는 ‘영웅’이나 ‘인류 집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이루는 맨 아래쪽에 자리한 채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서서히 작용하는 역사의 ‘장기 지속’ 요소이기도 하다.
지도자들은 역사적 경험과 사상을 동원해 통치 철학을 고민하겠지만, 엄밀히는 ‘지리’가 그보다 먼저 그들의 나라를 규정하는 첫 번째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포악한 독재자나 제국의 황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자연 장벽’을 만나는 법이고, 모든 인류에게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잠재력이 있지만 때로 그들을 각기 다른 역사적 경로로 이끄는 명백한 지리적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리라는 무대 위의 주체, 인간
하지만 지리가 역사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일을 꾸며나가는 것은 인간이고 그 배경에 지리가 있을 뿐인 것이다. 로버트 카플란은 지리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은 이 저작에서, 지리결정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걸출한 자유주의자(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들을 소환하여 그들 사상의 공통분모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냉전 시대에 활약한 이사야 벌린은 ‘인간의 동기’를 강조하며 지리, 환경, 인종적 특성과 같은 거대한 비인간적 힘이 우리의 삶과 세계 정치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부도덕하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이는 ‘인간의 동기’가 비인간적 힘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의미이지 비인간적 힘 자체를 경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의지’를 경시하고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핼퍼드 J. 매킨더 같은 이도 있다. ‘지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매킨더는 ‘결정론자’의 대부라는 공격을 받았으나, 카플란에 의하면, 그는 “지리적 요소는 인간적 요소로 극복될 수 있다”는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힘’에 신뢰를 보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카플란이 향해가는 목적지는 꽤 뚜렷하다. “결국에는 환경적 힘과 조화를 이룬 인간이 환경적 힘에 맞서 싸운 인간을 이기게 될 것이다.”
세계화와 지리의 복수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의 첫 단계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경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세계화는 질적 차원에서 세계를 더 좁게, 더 빠르게 연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세계화는 확실히 ‘지리’나 ‘국경’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지리는 잊힐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카플란은 이를 역사적 사례로 확인시켜 준다.
아직 세계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된 냉전 시기, 1980년대에 서구 지식인들은 ‘중부 유럽’이라는 말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중부 유럽’은 실제 존재하는 지리적 현실이라기보다, 여러 민족이 공존하며 제국을 이루고 문화를 꽃피웠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 시절의 추억에 의존한 이상주의의 산물이었다. 말하자면 ‘개념’으로서의 지리였다. 그리고 이 개념에는 ‘동유럽’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중부 유럽’의 나라들이 소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중부 유럽’ 국가들이 속속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서구의 품에 안기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인위적 장벽인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제 넘지 못할 벽은 없는 것같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서구의 이상주의는 폭발했다.
하지만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2년 뒤인 1991년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중부 유럽’ 국가들이 연루되어 수십만 명이 인종 청소를 당한, 끔찍한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서구인들은 순식간에 ‘발칸’을 ‘중부 유럽’에서 분리하여 다른 지역, 즉 새로운 근동 혹은 옛 근동의 일부로 규정하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틀린 게 아니었다.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서구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발칸과 유럽 중심부 사이에는 오래도록 두 공간을 분할해온 카르파티아산맥이 존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발칸’은 유럽보다는 오히려 옛 오스만제국이나 비잔티움제국에 더 가까웠다. 이것이 탈냉전 이후 서구가 목격한 첫 번째 ‘지리의 복수’였다.
이후 서구는 자신들이 2차 대전 당시 ‘뮌헨’의 실수를 반복하여 나치독일 이후 최악의 학살 사태를 방치했다는 반성 아래 인도주의적 개입에 나섰다. 1995년에 보스니아, 1999년에는 코소보에 군사 개입을 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이후 소말리아, 아이티, 르완다로 이어졌고 모두 성공적이었다. 그러자 서구는 계속된 성공에 도취되어 이번에는 ‘지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간의 도덕성은 구김 없이 실현될 수 있다는 판단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미국이 실행한 2000년대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여지없이 박살났다. 그와 함께 1990년대의 착시도 드러났다. 1990년대의 개입은 진보한 공군력에 힘입은 이차원 평면에 진입하는 문제였다면, 2000년대의 산악지대투성이의 아프가니스탄과 위험한 샛길이 즐비한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이내 삼차원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미국과 서구는 이러한 ‘지리의 복수’에 의기소침해졌고 이후 군사 개입에 대한 열정은 빠른 속도로 식었다. ‘지리의 복수’의 진짜 위험은 바로 이것, 이상의 후퇴일 수 있음을 카플란은 거듭 확인한다.
‘지리의 복수’에 관한 보다 최근의 예로는 ‘아랍의 봄’ 당시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꼽을 수 있다. 튀니지를 기점으로 민주주의 열풍이 주변 국가들을 휩쓴 이 격변의 첫 단계에서 지리는 새로운 통신 기술의 힘에 밀려 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혁명의 열기는 곧 분절되어 나라별로 특유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내러티브는 다분히 지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유럽과 러시아가 만들어지다
지리는 세계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20세기 초의 학자 핼퍼드 J. 매킨더는 일찌감치 지리적 관점에서 ‘유럽의 형성’을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럽은 아시아로부터 절구질을 당하면서 형성되었다. 유럽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을 갖고 있고, 오로지 동쪽으로만 육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로마 제국이 수립한 질서 속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온 제국과 변방은 중앙아시아